그 여자의 자살편지
케르스틴 기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목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남들이 내가 무슨 책을 읽나 관심 갖는 게 싫었던 예민하고 시건방졌던 십 대 때는 들고 다니는 책들을 포장 종이나 불투명 비닐로 표지를 감쌌었다.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 제목이 신경 쓰여서 그 시절처럼 종이로 쌀까나? 짧게 생각했더랬다. 물론 그 시절처럼 대중교통과 걸어서 다니는 길이 줄어들어서 참았지만, 암튼 책 제목이 그렇게 거슬렸던 것이다.

 

웃님의 리뷰를 보면서 사두었던 책이다. '케르스틴 기어'는 인물 검색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읽은 '정이현 작가의 달콤한 나의 도시'도 떠오르는.. 연애소설이라 하겠다. 것두 독일의 연애소설이다. 독일어로 표현되는 연애 소설이라~~ 근데 번역의 힘인가? 자꾸 우리나라 소설을 읽는 듯한 자연스러움.

 

 

가 특유의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고 과장된 표현을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식의 매끄러운 번역이 너무 매끄러워서 웃다가 미끄러질 지경이었다.

 

 

른 살.. 삶이 꼬여버린 갈색 머리카락의 살도 조금 찐 게리가 직업과 연애와 기타 등등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세상과의 이별을 결심하게 된다. 자살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녀의 엄마를 비롯한 이모들, 자신의 언니들, 조카들, 친구, 동창,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연애를 도모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죽어 없어질 존재이기에 가능했던 비수들을 글로 남긴 편지를 쓰고, 부치고, 바로 그날 죽어야 했으나 이러저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휘말려 죽지 못해서 생긴 코믹한 일들,,

 

어이없는 웃음과, 과감함에 놀라며 유쾌한 소설에 빠져보았다. 가볍고 재미있는 연애소설 하나 추가요~~!

 

 

 

일단 네가 계속 살아남기로 결정해서 기쁘다. 얘야, 인생이란 거대한 모험과 같단다.

그리고 그런 인 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문제는 우리의 능력을 알아볼 기회일 뿐이야, 그러니 우리 아가야, 당당하게 나아가라. 넌 젊고 아름다우며 온갖 희망으로 가득해. 내가 너와 자리를 바꿀 수만 있다면 당장 바꾸겠구나. p463



그래, 세상은 이래야 하는 거야, 달라서는 안 돼, 바로 이래야 해...... 이건 천박한 게 아니야, 이건..... 그래, 실존적이야! 내가 엄청난 비밀을 캐낸 사람처럼 생각됐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했을 때 아마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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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깊은 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5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국의 소설은 굳이 팍팍한 삶을 다룬 책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많이 보아 왔기에..

더구나 그것이 전쟁이나 일제 치하 이야기는 영화로든, 드라마로든 .. 마치

사극 드라마의 당파싸움이나 모함 등이 지리멸렬하게 여겨지듯이..

 

 

 

때 읽어대던 국내 소설들 속에서 만난 전쟁 이야기는 진부하기도 했더랬다.

 

 

현대의 이야기를 다뤄도 그 캐릭터에게 영향을 미친,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또 전쟁으로 인해 삶의 패턴이 바뀌어서 어찌어찌하였다는 식의...

최근 들어 외국의, 고전이 아닌 소설들 속에서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병을 앓는 주인공 이야기(바다 사이 등대)나 헤밍웨이의 소설(무기여 잘 있거라)을 읽으며 전쟁의 상흔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나 다 같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비로소, 나의 좁은 경험이 우리만 그랬던 게 아니라고 우리만 아팠던 게 아니라고 .. 그리고 이제 독자로서의 내가 성장하였음을, 하여 불편하다고 치부해버리기 보다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또한 작가나 작품 역시 많이도 세련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당 깊은 집은 1954년(6.25전쟁 직후) 대구의, 마당이 깊어서 여름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셋집에 모여 살던 네 가구와 삼대가 모여 사는 주인댁의 이야기이다.

 

 

세를 살던 사람 중 나, 길남은 시장통 주막에서 심부름을 하며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엄마와 누나와 동생들이 살고 있던 셋집으로 합치면서 그의 눈에 비치는, 다른 가난하고 사연 있는 이웃들과의 삶을 살면서 성장해가는 작가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다.

 

 

장소설은 대부분 가독성이 좋다는 진리를 얻게 된다.

 

 

90년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밉살스런 경기 댁이 김수미, 재봉틀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의 엄마 역이 고두심이었다는 정보를 찾아냈다. 그냥 상상으로만 두 쟁쟁한 배우들을 이입하면서 책을 읽으니 드라마 소재로 매우 적합하고, 두 배우에게 딱인 것 같고, 어차피 볼 수 없는 드라마를 감상하듯 한 책 읽기였다.

 

 

직공장을 하는 주인집의 형편은 날로 번창하는데 비해 나머지 네 가구는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생계를 이어가면서 특히나 주인공의 어머니가 네 남매 중 유독 주인공을 장남이라면서 가혹하고, 매정하게 구는 장면이 그리고 묵묵히 반발도 못하고 따르던 길남의 가출사건의 종지부는 읽던 내내 차별에 석연찮았던 나를 뭉클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런 길남이 야간대학을 나오고, 결혼도 하고, 출판사 일도 하게 되기까지 장남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와 의지로 인한 다그침을 버텼을 어깨가 가슴 아팠다.

 

전쟁 중 가족을 잃고 신체의 일부를 잃고, 기반을 포기하고 내려와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 속에 사랑도 있고, 희망도 있고, 미래도 있다는..

상이군인 준호 아버지와 폐병쟁이 정태, 김천 댁, 길수, 안 씨... 가엾지 않은 인생이 없다.

다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은 이제 이런 드라마를 봐줄까 싶기도 하다.

 

 

리고 그 시대 장남..

 

어느 누가 얘기했더랬다. 선교사든, 주재원이든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장남이더라고~~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장남으로 사는 일은 힘이 드노라고,,,그리고 보니 대부분 주위 사람들이 그러하다는 결론을 나도 내렸더랬다.

 

그 세대 장남들이 안쓰럽다...

 

 

- 저물 무렵 그 귀갓길의 추위란 배고픔 못지않게 마음을 외로움과 슬픔으로 채워 더러운 세월을 탓하는 어머니처럼, 나 역시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사느냐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꽁꽁 얼어붙은 어둠 속으로 먼지보다 더 작은 알갱이가 되어 형체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195



- 한주 어머니는 휴전 네 해 뒤에 돌아가셨지만 그 죽음 역시 원인을 전쟁 탓으로 돌린다면, 이 땅에 알게 모르게 전쟁의 잠복성 종기를 오장 육부에 오래 여투어두다 끝내 그 종기의 독성으로 죽게 되는 목숨이 그 얼마나 되랴.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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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 납치사건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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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굳이 시체를 불태워야 했던 이유를 알고자, 그 이유를 드러내고자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43세의 일본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는 유지 임선규는  한때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 공부를 하던 중 그의 증조부 임석호가 명성황후 시해 당시 병사들과 함께 도주한 사관이었고, 제천에서 황후를 지키고자 상경한 농민을 총으로 쏘아 죽인 부끄런 과거를 알고는 역사 공부를 접는다. 그리고 목사인 그의 부친이 전두환을 위한 범 기독교단 조찬 기도회를 주도했던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황 끝에 그의 선조가 죽였던 제천 살던 농부의 후손을 찾다가 김인후를 알게 된다. 김인후의 고조할아버지인 농부는 일본인들이 황후를 시해하고자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몽둥이를 든 채로 뛰어들어 도망가는 병사들과 사관들을 호통한다. 도망치던 사관 임석호의 총을 맞고는 죽어버리지만 김인후의 아버지 역시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다가 죽임을 당한다.

임선규는 자기 선조들의 부끄러움을 갚고자 김인후의 성장에 많은 기여를 한다.

사를 거슬러 명성황후 시해를 보고한 전문 중 없어진 부분이 황후의 시체를 불태우기까지 한 이유라는 데 결론을 얻어서 그 능욕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가부키 공연을 관람차 왔던 황태자비 마사코를 납치한다.

미궁에 빠진 수사를 위해 유능한 다나카 형사가 투입되고...

납치범 임선규의 인격과 황태자비 마사코의 품위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다나카가 수사를 펼쳐 나가는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왜곡에 대한 자각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인 거다. 너무 훌륭한 일본인의 시선이 소설 속에서 작가의 바람대로 ... (그래서 작가의 낭만적인 상상이 비애감마저 든다.)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한 의식 있는 많은 지식인들이 우익단체의 역사왜곡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마사코의 바람처럼 과연 그들이.....

- "이것은 단순한 교과서가 아니오. 자학의 역사를 버리고 자랑의 역사를 되찾기 위해 일본을 움직이는 거인들이 힘을 합해 만들어 낸 56년 만의 대역사란 말이오" 92

- "주인공이 떠나면서 하는 말입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순간 실행하라. 용기는 자유를 주지만 비겁은 굴종을 줄 뿐이다." 155

- 졸업 후 오랜만에 모교를 찾아가는 길이라 다나카는 잠시 감회에 젖었다. 비록 법대에 다니며 고시 공부에 몰두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가치관과 철학을 얻은 곳이었다. 199

-"드디어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던 거요. 종교에서 말하는 교조적인 용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용서였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신이 필요했고,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되돌아왔소." 283

- "전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 잘못되었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죠. 과거에 침묵사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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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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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등어 -한때 넉넉한 바다를 익명으로 떠돌 적에 아직 그것은 등이 푸른 자유였다.

"그들은 생각할 거야, 시장의 좌판에 누워서 나는 어쩌다 푸른 바다를 떠나서 이렇게 소금에 절여져 있을까 하고, 하지만 석쇠에 구워질 때쯤 그들은 생각할지도 모르지. 나는  왜 한때 그 바닷속을, 대체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헤엄쳐 다녔을까 하고."

1980년대를 아프게 살았던 청춘들이 1990년대에도 시대착오적으로 살아내느라 부대끼는 이야기이다. 젊음을 힘들게, 힘들게 헤엄쳐 다녔던 고등어들의 이야기...

때 노동운동가였던 '공지영'이니깐 이런 이들의 아픔을 모른 척하며 살기에는  그녀의 투쟁정신이 그녀를 평화롭게 할 수 없는가 보다. 이런저런 사회적인 소설도 쓰고, 목소리도 내고 욕도 실컷 얻어먹는 걸 보면 .. 이러한 '공지영'이니까...

가을에 읽기를 잘한 소설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7년 만의 재회와 그로 인한 파장과 영원한 이별까지 이 한 계절에 모두 들어있다.

'명우'는 서른세 살의 두 살 난 딸을 둔 이혼남 이다. 아내 '연숙'은 임신 사실을 숨기고 이혼을 진행할 만큼 남편 '명우'를 증오했다. 그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회고록 이나 자서전 등을 집필하며 산다.

리고 그 오피스텔 다른 층에는 광고일을 하는 여동생 '명희'가 살고, 그녀의 연애관, 남성관은 오빠를 당황시키지만 동생 덕분에 26세의 미술을 하는 '여경'과 자유분방한 교제를 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7년 전 유부녀였지만 함께 도망치 고자 했던 여인 '은림'이 나타난다. '은림'의 남편 '건섭'도, 그녀도, 그도 모두 노동운동을 하던 이십 대 시절..

간절히 원한 하룻밤을 보내고 도망치고자 '은림'은 남편에게 사랑하지 않았다며 헤어지자 해놓고 싸놓은 가방을 들고 '명우'를 만나러 가지만 '명우'는 그녀에게 이러는 게 옳지 않다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노동자 출신 '연숙'과 결혼을 한다. 사랑이라고 타일러서..

'은림'은 어린 나이에 '건섭'과 결혼을 했다. 사랑이라고 굳게 믿어서..

리고 모두 불행했다.

'은림'은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던 중 '명우'와 친구였던 오빠 '은섭'이 노동운동으로 고문 받고, 징역을 살고 끝내 미쳐버리고 충격으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미국으로 가버린 역경 속에서 노동운동을 하게 된다. 

한편 그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친구 '경식'의 집에서 고등학생이던 반듯한 동생 '경운'을 보았었는데, 훗날 신문의 1면을 도배한  분신하는 대학생의 사진을 보며 그가 '경운'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그들의 주변은 20대를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살 수 없었던 상처투성이 의  청춘들이었다.

'림'은 정신병원에 있는 오빠 '은철'을 빼고는 모두 30대가 되고, 90년대가 되는 시점에서 생활전선이든, 무엇에든 뛰어들고 빠져나와 버린 그 운동권의 세계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 였다고 하며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그녀의 남편 '건섭'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어쩌면 학대인지도 모를 결혼 생활을 유지 하다 가 감옥에 가게 되고, 결핵이 걸린 그녀는 지방 생활을 정리하고 '명우'를 찾아오게 되었던 것 이다. 마침 '명우'가 그들이 맞서 노동운동을 하던 악명 높았던 봉림 전자의 '정봉출 사장' 자서전 을 집필하는 중에...

어리둥절한 상황들이 자신도 어쩔 수없이 전개 되는 중, 그는 문득 '여경'이 지금은 여위고 힘 빠졌지만 자신과 불륜에 빠졌던 그 나이 '은림' 과 많이 닮았고, 그녀의 말처럼 모조품 '여경'이 , '은림'의 등장과 함께 결혼을 서두르자 '명우' 는 '은림' 의 상황들과 자신의 상황들에 분노 하던 이유를 깨닫게 되고 '은림'을 찾아 간다.

리고 지나간 세 여자에게 한 번도 없었던 책임이라는 것을 그는 '은림'에게 지고 싶어 한다.

'여경'이 틀었던 비발디의 바순 콘체르토를 듣는다.

소설을 통해 가장 나를 울렸던 단어 미망, 그리고 회한

미망에 빠졌던 80년대 청춘들, 희망이라는 미망 속에 갇혀있던 '은림'의 생애와 '은림'을 향해 "넌 내 회한이야, 이자식아~" 를 외치던 '명우', 그리고 깊어가는 가을... 우리 아프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그 시대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검색해 본다.

 

- 침묵을 깨뜨린 건 예민한 웃음소리였다. 뭐랄까, 웃음소리에 무게를 달 수 있다면 예민한 저울 바늘조차 조금도 움직이게 할 것 같지 않은 느낌의 그런 허탈한 웃음소리. 19



- 예전보다 조금 더 여위었을 뿐 그녀는 그대로였다. 그는 얼른 그녀와 마주칠 뻔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눈께에 뜨거운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이상했다. 칠 년 만인데 새파랗게 젊은 시절의 칠 년이었는데, 젊은이 하나를 아주 딴사람으로 만들어놓기에 너무나 충분한 세월이었는데,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세월이 시치미를 뚝 떼는 듯한 기분이었다.28



- 모래성 귀퉁이가 무너지듯 다잡은 마음 한구석이 어쩔 수없이 스르르 그의 통제를 빠져나가면서 무너져내리겠지만, 견딜 수 없어, 이대로는 견딜 수 없어, 머리를 비비겠지만, 곧 문득문득 잊어버리고, 다시 문득, 문득 생각나고, 그러다가 차츰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불쑥 자맥질하듯 떠오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잊는 것이다. 칠 년 전에도 잊었었는데, 이제사 못 잊을 이유도 없었다.56



- 아니오,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잊지 않는 사람들, 죽어간 친구와 미쳐간 친구와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 그들이 곧 이 나라를 이끌어가게 돼요. 이제 곧 우리 세대에게서... 그래요. 형 말대로 우리 세대를 거치느라 운전면허 하나 따지 못 했던 젊은이들이 ... 그들이 대통령이 되고 그들이 예술가가 될 거라고요. 가짜들 말고 진짜들.... 그것두 권력이라구 운동하지 않는 불쌍한 친구들 주눅 들게 하면서 거들먹거렸던 사람들 말구, 이제 와서 어리석었다고 그 세월 전체를 매도하는 인간들 말구, 진짜들. 끌려가는 친구들도 있는데 미안해서, 정말 미안해서 테니 스체를 사놓고 한 번도 치지 못 했던 친구들, 고시 공부하다가 도서관 밖의 집회 바라보고는 머리를 싸매고 그날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 길거리에 누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서로서로 사슬을 얽어매고 울었던 그 친구들." 216



- 그녀의 속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시간들은 뜨거워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221



- " 그건, 아니야. 다만, 다른 성격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난 속으로 참아내고.... 넌 .... 그걸 다만 표현할 뿐이야. 참는 사람은 참는 사람의 비애를 가지고 있어. 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은... 아마 또 그 나름의 비애를 가지고 있겠지만."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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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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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님 리뷰를 보다가 문득 박완서 님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꽤나 많이 그분의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목만 아련할 뿐 기억나는 것이 없더라..

사진 속 박완서 님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음전하다.~~'이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아는 가장 음전한 이미지가 아닐까한다.

사 심영빈은, 역시 의사 한광과 함께 유현금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영빈과 광은 현금이가 어릴 적 한 농담... '나는 돈 잘 버는 의사와 결혼할 거다'라는 도발적인 말에 포로가 되어 의사들이 된다.

현금의 2층 집 창문을 뒤덮은 능소화를 보면서 영빈은 그녀에 대한 환상과 함께 사춘기로 들어선다.

현금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이사가 버리고, 영빈 역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불명예스러운 퇴직과 사망에 이어 태어난 늦둥이 동생 영묘, 그리고 공부 잘하는 형 영준, 어머니와 함께 그 마을을 떠난다.

광의 결혼 소식과 함께 현금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허전해 하지만 곧 그도 국어선생과 결혼을 한다.  그는 실력 있는 의사로 두 아이의 아빠로 미국으로 떠나가 버린 형 영준을 대신해 어머니와 동생 영묘를 아끼며 가장 노릇을 한다.

런 그가 병원에서 우연히 이혼한 현금을 만나고, 그녀와 밀회를 갖게 된다. 영빈은 거리낌 없고, 매력적인 현금에게 푹 빠지게 되지만, 실은 자신의 집에선 아들 노릇, 아빠 노릇, 남편 노릇, 그리고 병원에선 의사 노릇을 해야 하지만, 그녀 현금의 집에선 남자 이기만 하면 되는 것에 매우 평온을 느끼고 무책임해도 되는 것에 안도를 한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수록 더욱 그녀를 찾게 된다.

영빈의 무거운 어깨, 그리고 장남의 무게를 피해서 미국으로 가버린 걸로 취급된 영준.. 이야기는 어찌어찌 되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가족이란 것에 대해서, 가부장 제도, 남아 선호, 여성의 정체성, 게다가 영묘의 재벌가 시댁 사람들의 속물근성 등 많은 화두를 던지는 이야기이다. 

읽는 중간쯤 흔한 불륜 이야기던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다가 이 책이 작가 나이 70대에 씌어졌고, 벌써 출간한 지가 18년이나 흘렀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녀의 고급 진 단어나 클래식 한 어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사전을 기웃거리며 읽어야 했지만, 간만에 한국 소설, 그리고 여류 소설가의 소설, 더구나 박완서 님 작품을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중 특히 심심 파적(심심풀이)과 불감청이언정 고소원(不敢請 固所願-감히 청하지는 못하였으나 바라던 바 올 시다.)이라~~

 

 

- 요새 세상엔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병이란 있을 수없다고 생각하는 게 현대의학에 대한 일반의 상식이지만, 치료가 시작되기 전, 단지 암이냐 결핵이냐를 결정하는 데만도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고비를 예비해 놓고 있는 것 또한 현대의학의 당당한 횡포였다. 102

- 영빈은 누이에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나른한 밍크의 감촉에 무너져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독한 피곤이었다. 109

- 이렇듯 현금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영빈은 그 집을 떠나곤 했다. 적나라한 외설의 현장에서 견고한 일상으로 은근슬쩍 스며들기 위해 112

- 나는 싫고 무서워요. 이 이메일이라는 것이요. 내 편지가 이렇게 자꾸 길어지다간 언젠가는 태평양을 건너고 대륙을 횡단해 형의 몸에 휘감길 수 있는 길고 긴 촉수가 될까 봐도 두렵지만, 아무도 구겨 버리거나 태워버리지 않아도 감쪽같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더 무서워요. 나의 집요함도 싫지만 그 허망함은 또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요. 294

- 이 착한 여자는 내가 상습적으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착한 여자는 대게 눈치가 없다. 그래서 착한 여자는 남자들의 큰 복이다. 301

- 그는 가족이라는 게 이렇게 엉성한 허구 덩어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만약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가족이라고 대답하는 게 가장 정답인 걸로 돼있는 모범적 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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