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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평점 :
이웃님 리뷰를 보다가 문득 박완서 님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꽤나 많이 그분의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목만 아련할 뿐 기억나는 것이 없더라..
사진 속 박완서 님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음전하다.~~'이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아는 가장 음전한 이미지가 아닐까한다.
의사 심영빈은, 역시 의사 한광과 함께 유현금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영빈과 광은 현금이가 어릴 적 한 농담... '나는 돈 잘 버는 의사와 결혼할 거다'라는 도발적인 말에 포로가 되어 의사들이 된다.
현금의 2층 집 창문을 뒤덮은 능소화를 보면서 영빈은 그녀에 대한 환상과 함께 사춘기로 들어선다.
현금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이사가 버리고, 영빈 역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불명예스러운 퇴직과 사망에 이어 태어난 늦둥이 동생 영묘, 그리고 공부 잘하는 형 영준, 어머니와 함께 그 마을을 떠난다.
광의 결혼 소식과 함께 현금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허전해 하지만 곧 그도 국어선생과 결혼을 한다. 그는 실력 있는 의사로 두 아이의 아빠로 미국으로 떠나가 버린 형 영준을 대신해 어머니와 동생 영묘를 아끼며 가장 노릇을 한다.
그런 그가 병원에서 우연히 이혼한 현금을 만나고, 그녀와 밀회를 갖게 된다. 영빈은 거리낌 없고, 매력적인 현금에게 푹 빠지게 되지만, 실은 자신의 집에선 아들 노릇, 아빠 노릇, 남편 노릇, 그리고 병원에선 의사 노릇을 해야 하지만, 그녀 현금의 집에선 남자 이기만 하면 되는 것에 매우 평온을 느끼고 무책임해도 되는 것에 안도를 한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수록 더욱 그녀를 찾게 된다.
영빈의 무거운 어깨, 그리고 장남의 무게를 피해서 미국으로 가버린 걸로 취급된 영준.. 이야기는 어찌어찌 되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가족이란 것에 대해서, 가부장 제도, 남아 선호, 여성의 정체성, 게다가 영묘의 재벌가 시댁 사람들의 속물근성 등 많은 화두를 던지는 이야기이다.
책 읽는 중간쯤 흔한 불륜 이야기던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다가 이 책이 작가 나이 70대에 씌어졌고, 벌써 출간한 지가 18년이나 흘렀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녀의 고급 진 단어나 클래식 한 어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사전을 기웃거리며 읽어야 했지만, 간만에 한국 소설, 그리고 여류 소설가의 소설, 더구나 박완서 님 작품을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중 특히 심심 파적(심심풀이)과 불감청이언정 고소원(不敢請 固所願-감히 청하지는 못하였으나 바라던 바 올 시다.)이라~~

- 요새 세상엔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병이란 있을 수없다고 생각하는 게 현대의학에 대한 일반의 상식이지만, 치료가 시작되기 전, 단지 암이냐 결핵이냐를 결정하는 데만도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고비를 예비해 놓고 있는 것 또한 현대의학의 당당한 횡포였다. 102
- 영빈은 누이에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나른한 밍크의 감촉에 무너져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독한 피곤이었다. 109
- 이렇듯 현금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영빈은 그 집을 떠나곤 했다. 적나라한 외설의 현장에서 견고한 일상으로 은근슬쩍 스며들기 위해 112
- 나는 싫고 무서워요. 이 이메일이라는 것이요. 내 편지가 이렇게 자꾸 길어지다간 언젠가는 태평양을 건너고 대륙을 횡단해 형의 몸에 휘감길 수 있는 길고 긴 촉수가 될까 봐도 두렵지만, 아무도 구겨 버리거나 태워버리지 않아도 감쪽같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더 무서워요. 나의 집요함도 싫지만 그 허망함은 또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요. 294
- 이 착한 여자는 내가 상습적으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착한 여자는 대게 눈치가 없다. 그래서 착한 여자는 남자들의 큰 복이다. 301
- 그는 가족이라는 게 이렇게 엉성한 허구 덩어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만약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가족이라고 대답하는 게 가장 정답인 걸로 돼있는 모범적 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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