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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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후배의 집들이 차 찾아간 돈암동에서 그녀가 예전에 살았던 곳, 자신이 살던 집터를 어렵게 감만 잡은 후, 그 남자네 집을 떠올려본다.

전쟁 전, 살림의 규모를 줄여서 이사해왔던 자신의 집 근처에 엄마의 외가 쪽 친척 집도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어린, 그 집의 막내아들을 보면서 그녀는 설레는 자유에의 예감을 느낀다.

전쟁이 나자 그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미군부대에 취직을 했다.

아버지와 오빠는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그 남자의 형과 아버지는 월북을 했고, 그 남자는 전쟁에 나갔다가 상이군인이 되어 명예제대를 한다.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쏘다니면서 그들은 어울린다.

철없고, 자신을 돌보려 월북하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던 그 남자는 '정지용'과 '한하운'의 시를 낭송하고 음악을 듣는다.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하는 것은 시였노라고..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통에 의식주의 절대 부족으로 그야말로 서울은 아가 사리 끓듯 한 모습이었다.

맨날 붙어 다녔지만, 손 한번 마주 잡은 적 없는 사이였고, 손아래, 먼 친척뻘 동생과의 어울림은 양가에서도 전혀 의심받을 일 없는 사이였지만, 그들에겐 연애였고, 서로가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와의 거리가, 순결의 중요성보다 임신의 두려움으로 인한 거리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전쟁통에 같이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은행원과 결혼을 한다.

자상하고 속 깊은 남편과 대단한 음식 솜씨를 지닌 홀시어머니와 살면서, 문화가 다르다느니, 남편이 쪼잔하다느니, 미신을 믿는 시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열정과 호사를 탓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시어머니는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다. 단지 그녀의 불만은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이 주는 막막한 권태였고 일종의 사치였다.

남편의 배려로 엄마와 하숙을 치던 올케가 동대문에 포목점을 열게 되어, 가끔 들러보던 어느 날, 그 남자의 큰누나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에게 이끌려간 다방에서 그 남자가 많이 힘들어한다고, 건강상의 이유로 휴학을 하고는 발작처럼 소란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녀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노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그 남자의 누나는 자신의 막냇동생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그녀의 결혼에 대한 충격이었다고도 생각되어, 그녀더러 한 번씩 자신의 동생을 만나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밀회가 시작된다.

행복한 밀회가 거듭될수록, 그녀는 자신의 시집살이가 한결 부드러워진다고 느낀다.

그때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이 그 유명한 [자유부인]이다.

남편은 유독 다음 횟수를 기다리면서 읽기를 즐기고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회사 동료들 사이에선 그 소설 속 여주인공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화젯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그 화제가 불편했고 읽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처녀 시절 읽던 [보바리 부인]을 찾아 책장을 뭉텅이로 넘기면서 몇 구절 읽는 걸로 떠돈다.

그 남자가 어느 날, 마석에 있는 자신의 선산에 나들이를 가자고 한다. 둘이 청량리역에서 만나기로 한 날,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몇일동안 독감을 앓고, 그리고 그 남자의 병소식을 듣는다.

뇌 수술과 실명, 그리고 벌레 이야기..

그와의 사랑이 그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벌레들이 시킨 일이었는지.. 엉뚱한 회의를 품어보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고, 또 낳고

나이를 먹는다. 취업한 자녀들에게 용돈을 받을 만큼의..

그리고 그도 늦은 결혼을 했고.

그 남자의 어머니 장례에 찾아가서 울던 그를 안아준다.

그와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노라고, 신문을 통해 그 남자의 부음을 듣고 문상을 가지 않겠다 한다.

전쟁 이후를 살아가던 청춘의 이야기,

'광수'라는 먼 친척과,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군부대에 취직했으나, 결국엔 양공주가 되어, 자신의 가족을 책임졌지만 사랑은 없었다는, '춘희의' 이야기도 병행한다.

그 힘든 시절의 청춘, 그리고 사랑, 불륜일 뻔했던 사랑 이야기를 참 담백하게 그녀답게 이야기한다. 그런 작가만의 여백으로 인해 감성의 에너지를 줄여 더 몰입할 수 있달까 ..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 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169

- 우린 틈틈이 만났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을 못 지킬 적도 없지 않았다. 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붓하던 우리의 연애질이 어쩔 수없이 산만해지고 있었다. 연애질보다 급하고 실제적인 일이 우리를 필요로 하면 서슴지 않고 약속을 뒤로 미루었다. 때로는 거짓 일을 꾸며대면서까지 약속을 안 지킬 적도 있었다. 우린 이제 마지막 남녀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한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신경 써야 할 잡무가 많은데도 그게 오히려 휴식이 되었다. 연애질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 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 궁상들의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에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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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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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1884-1942)'는 무의식 세계의 미묘한 움직이라든가 이상심리, 성적 욕구 등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와 분석이 뛰어난 작가로, 유대인 가문의 후손으로, 빈에서 태어나 남다른 감수성으로 시와 희곡을 썼다고 한다. 그의 문학세계는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나 '릴케'의 시, '니체'의 철학,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유럽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유럽 정신을 대표했다고ᆢ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 이후 내적인 긴장과 불안 속에서 망명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세계를 떠돌며 방황하던 그는 전쟁과 나치에 대한 공포, 그리고 고독감으로 끊임없이 자살을 생각하다가 결국엔 아내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친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는 그의 전성기 때 쓰여진 작품으로 프랑스 혁명(1789.7.14-1794.7.28)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傳記), 혹은 역사 소설이지만, 심리소설에 더 가깝다. 이 두꺼운 소설을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게 만드는 힘은 '츠바이크' 문체 자체도 있지만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심리 분석가적인 묘사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의 부르봉가는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국가나, 국민의 개념이 희박했기에 두 왕조는 오랫동안,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해왔다. 합스부르크가 여성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루이 15세'는 두 가문을 혈연으로 맺어서, 두 가문의 경쟁으로 인해 이득을 꾀하던 다른 국가들에 경종을 울리고, 유럽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그렇게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자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의 결혼이 맺어진다.

11세 때 왕세자비로 승인된 그녀는 프랑스 말과 더불어, 프랑스식 궁중의 예의범절을 익혀야 했고, 그들의 결혼은 세계적인 의전 문제로, 경쟁이듯, 보여주듯이 치러지며 호사와 사치가 극에 달하기도 하지만, 불행의 예감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세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으로 들어간다.

작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의 매력과 황녀로서의 기품은, 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스럽게 비치지만, 어린 그녀의 어린 남편과의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7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해진다.

- 중간 생략-

 

이 소설에서 왕비가 자신의 극장을 만들고 가끔 배우 역할도 하게 되는데

[세비야의 이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785년 프랑스 궁정에서 상연된 이 연극에서 왕비 '마리앙투아 네트'는 여주인공 '로지나역'을 맡고, 그녀의 시동생 '아르투아 백작'은 '피가로'역을 맡게 된다.

후속으로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상연된 이 연극의 내용은 귀족들을 비웃는 정치 풍자로 구제도의 왕권, 귀족, 성직자 등, 특수 계급에 대한 민중의 분개와 공격을 대변하는 명작이다. 국왕(루이 16세)은 당연히 상연 금지를 명했지만, 철없는 왕비와 동생의 간청으로 결국 허락했고,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휩싸인 일부 귀족들은 이 연극을 감싸고 들기도 했고, 또 반정부적인 귀족들은 환호를 했다.

왕비는 생각 없이, 그냥 인기를 좇고, 유행을 좇는 존재였다.

이 연극을 연기할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면서, 자기 운명을 재촉하고 함부로 지껄였던 것이다.

그 유명한 목걸이 사기 사건의 재판은 세계적으로 세상이라는 조명등으로 왕비의 인격과 베르사유 궁을 눈부시게 비추어 그 모습을 드러나게 했고,

프랑스의 백성들은 마리앙투아네트의 쾌락에의 탐닉과 방종을 지탄하고 증오하였다.

깨어나는 시민들은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공격의 방향을 국왕 타도와 왕비 타도로 잡고 혁명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궁궐의 안에도 적들은 있었다. 그들의 비방과 부추김으로 인해 왕비는 프랑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시민들에겐 속죄양이 필요했다.

목걸이 사건과 적자 재정의 폭로는 화려하기 그지없고 낭비가이자 경솔한 왕비에게 파산의 장본인인 '적자 부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그녀를 혁명의 표적으로 삼았다.

그녀에 관한 기록들은 조작이 많았다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까.. 그녀가 주고받았다던 편지들 대부분도 암호화되어 있어서, 해석이 안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 편지조차도 거짓들이 많았다고 하니, 100년 후에 그녀의 전기를 쓴 저자가 밝혀두었지만, 그 자체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어디까지였던 건지의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기도 한다.

동성애와 근친상간, 귀족들과의 연인 관계, 그리고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고 전해져오는 말들,

하지만 혁명은 성공했고

'루이 16세'와 그녀를 단두대의 이슬로 만들었고,

공포정치가 시작되었고,

그녀를 도왔던, 혹은 혁명의 가운데 있었던 인물들도 단두대로 보내졌고..

혼란기를 틈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다시 왕정이 복고되고..

하지만 그녀의 삶 전체에 진정한 벗이자, 사랑이었던 스웨덴의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있었다. 세계인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그는 독일에서 고등 마술(馬術) 교육과 군사학, 이탈리아에서 의학과 음악, 제네바에서 볼테르를 배우고, 세련된 대화와 훌륭한 예의범절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왔다. 18세기 젊은 귀족의 전형적인 교양 과정을 밟았고 잘생기기까지 했던 그는 왕비와 열정적이고 비극적으로 가까워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많은 환멸을 겪으면서 그로부터 마지막 행복을 찾아보려 하였고, '페르센'은 기사적인 사랑과 무한한 희생으로 그녀에게 잃어버린 왕국을 보상해 주려고 하였다.

궁지에 몰린 그녀를 찾아와 함께 죽을 각오로 그녀를 위로하고 도우려 했던 그는, 그녀의 진정한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것.. 그는 왕가를 도주시키려는 계획도 주도했으나, 무산되었다. '페르센'을 향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은 위대하고 단호하게 자기의 남은 생(生)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오를레앙 공작'의 음모와 '루이 16세'의 두 동생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황제의 방관도 그녀의 불행을 부추기게 된다. 프랑스 혁명군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시 그녀의 명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녀는 의연하게 품위 있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다.

결코 평범하지는 않은 한 여인의 기구한 생을 따라 읽어가면서, 프랑스의 혁명과 역사를 훑어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발자크'와 '에밀 졸라'를 읽기 전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 없는 정략결혼의 희생양

무지와 순종에서 깨어난 시민의 속죄양..

그래도 그녀가 마지막 품고 갈 사랑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자기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보여준 오만한 오스트리아 여인이라는 비방이 되었던 최후의 의연함에 비장미까지 돈다.

 

- 프랑스 백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디에선가 자기들에게 부정을 저지르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들은 오랫동안 복종하고 굴종하면서 보다 좋은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믿으며 기다렸다. 새로운 루이가 왕우에 오를 때마다 깃발을 흔들었고, 영주와 교회에 공손히 세금을 바치며 부역을 해왔다. 그러나 허리를 낮게 구부리면 구부릴수록 압박은 가혹해졌고, 세금은 더욱더 탐욕스럽게 그들의 피를 빨았다. 프랑스는 넉넉한 땅이었으나 곡물창고는 텅텅 비었고 소작인은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였다.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땅과 아름다운 하늘을 누리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판이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빵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진탕 먹는 자가 있기 때문이며, 의무에 목이 졸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권리를 독차지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명철한 사고와 탐구에 앞서 나타나기 마련인 어렴풋한 불안이 점차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다. 볼테르, 루소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 잠을 깬 시민계급은 스스로의 힘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독서하고, 저작하고, 의지의 소통을 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서운 폭풍에 앞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부농의 집은 약탈을 당했고, 영주는 압력을 받았다. 거대한 불만이 오래전부터 먹구름처럼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24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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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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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의 경우도 그랬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후반부로 넘어가서야, 한 독일 작가의 전쟁에 대한 반성의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이 소설 역시 그러하다.

독일은 이런 작가를 두었기에, 이런 한사람 한 사람의 집합이 오늘의 독일을 있게 하는구나 하는.

그것은 같은 전범국가인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아한 몸짓이요, 본질적인 것이요, 일본인으로선 감히 흉내 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독일의 힘으로까지 느껴 진다.

주인공 '올가'라는 여인은, 어릴 때 부모를 전염병으로 차례로 잃고 할머니의 손에서 키워진다. 애초에 '올가'의 엄마가 슬라브 여인이란 이유로 아들의 결혼을 반대했던 할머니는 '올가'라는 이름의 슬라브식 이름부터 고치려 했지만, 어린 '올가'의 고집으로 독일식 이름으로의 개명은 이루어 지지 않고, 그때부터 '올가'는 할머니에게 고집 세고 버릇없고 배은망덕한 손녀로 여겨진다.

사랑받지 못해 늘 외로웠던 '올가'는 책을 좋아했고 공부를 좋아했다.

장원을 소유한 부유한 집의 아들 '헤르바르트'와 그의 여동생 '빅토리아'와 어울리면서 그나마 외로운 유년기의 위안이 되기도 했는데,,

'올가'는 초등 교원 양성소 진학이 희망 이라, 입시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돈이 없었고 할머니와 선생과 마을의 목사는 여자의 고등교육을 반대했다.

'빅토리아'가 여학생 기숙학교로 떠난 이후 달리기를 좋아하는 '헤르바르트'와 자연스러운 이성관계가 형성되는데, 밀회를 즐기면서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던 그녀는 국립 사범대학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하여 2년의 과정을 마친 후 교사가 된다.

서남아프리카로 가는 방위부대에 자원한 '헤르바르트'와 결혼을 꿈꾸었지만, '빅토리아'의 농락으로 둘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고, '올가'는 다른 시골의 교사직으로 내쫓긴다.

군 생활을 하면서 휴가 기간이면 '올가'와 함께 지내던 '헤르바르트'는 반복된 부모의 결혼 반대로 아르헨티나로 떠나기도 하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

위대한 독일과, 식민통치에 관심이 많아, 그것을 주제로 강연을 다니던 '헤르바르트'는 북극 원정대에 나섰다. '올가'와 겨울이 되기 전 돌아오기로 약속 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의 구조대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더 이상 그를 찾는 일을 이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올가'는 그에게 편지를 쓰면서, 죽을 때까지 그와 함께 산다고 여기며 남은 생을 산다.

그녀는 가난한 농가의 아이 '아이크'와 우정을 쌓고

더 늙어서, 열병 끝에 귀머거리가 되어 교사직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바느질 솜씨를 살려 소일거리를 하며 드나들던 목사 집의 어린 아들 '페르디난트'와도 우정을 쌓고 그 소년들에게 '헤르베르트'의 모험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올가'를 따르고 좋아하던 '페르디난트'가 어른이 되어 대학을 나오고 공무원이 되어, 결혼을 하고 은퇴한 후, '올가'에게 늘 들어왔던 '헤르바르트'의 원정대에 대한 기록을 찾아 나서면서, '아이크'의 딸과 만나고, '올가'가 부쳤다던 받는이 없는 편지들을 찾아 우편물을 건네 받고 그 편지를 읽어가면서 퍼즐처럼 '올가'의 일대기가 완성되는 이야기이다.

 

"흑인들은 저항을 통해 지배권을 빼앗아 가려고 해. 그렇게 돼서는 안돼.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 그들의 축복이자 우리의 축복이야. 그들은 아주 낮은 문화 단계에 있는 인간 유형이라서 우리에게 있는 근면이라든가 감사, 동정 그리고 모든 이상적인 것에 대한 최고의 지고한 개념이 없어. 외적으로 교육을 받았더라도 영혼이 따라주지를 못해. 만약 그들이 승리를 하게 되면 문명화된 민족들의 삶에 끔찍한 타격이 있을 거야. 69



- 내게는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 그리고 먼 곳을 향한 나의 그리움은 나의 향수와 다르지 않게 느껴져. 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가슴이 답답해. 울어서 흘릴 수도 없고 자유롭게 숨도 못 쉬게 만드는 눈물이 목으로 차올라.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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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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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는 영국 출신으로 인도 벵골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드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인도 동부 캘커타의 '톨리 건지'와 미국의 '로드아일랜드'이다.

'우다얀'과' 수바시' 형제를 중심으로, 그들의 부모님, 그리고 그들의 아내였던 '가우리'와 그들의 딸, '벨라'에 걸친 삼대의 이야기가,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에서 공산혁명운동을 기점으로 펼쳐진다.

15개월 차이의 이들 형제는 쌍둥이처럼, 외모도 목소리도 비슷하다. 형 '수바시'는 조심성 많고 자신의 존재감을 최소화하려는 소심한 편이고, 동생 '우다얀'은 자기통제를 모르는,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있는 아이다. 서로 속해있고 서로 연결되어 자라난, 그들은 다 수재이다.

그들이 나고 자란 '톨리 건지'는 조용한 주거지로 중산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주거지 안에 길쭉한 연못과 그 뒤로 부레옥잠으로 가득한 '저지대'가 있다.

그 마을에는 외국인이나 드나들 수 있는 '톨리 클럽'이라는 골프장,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

둘은 나란히 가장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수바시'는 화학공학을 '우다얀'은 물리학을 전공한다.

형제는 어른이 되면서 인도의 정치적 현실에 눈뜨고 분노하기도 하지만, 온건한 '수바시'에 비해, '우다얀'은 '마오쩌둥'의 어록을 읽고, 생각이 같은 학생들과 어울리며 행동에 나선다. '낙살라이트'가 되었던 것이다.

둘 다 대학원을 마치고, '수바시'는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지원한다. '우다얀'은 처음엔 형의 유학을 반대하고 말렸지만, 집을 떠나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 돌아오곤 하는 일을 반복하며 지내고, 손을 떠는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인도에 공산당이 출범하고, '우다얀'이 집회에 참가하기도 하는 즈음, '수바시'는 미국 '로드아일랜드'로 간다.

해양 화학연구를 하면서 장학금을 받고 혼자 사는 생활에 젖어가는 갈때..'우다얀'의 편지와 사진을 받는다. 사진 속에는 '수바시'의 눈에도 매력 있어 보이는 여인 '가우리'의 사진이 들어있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철학을 전공하는 이 여인이 자신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수바시'는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별거 중에 있다는 '홀리'라는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만, 그녀가 전 남편과 다시 합치게 되었다며 이별을 통보할 즈음, '우다얀'이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2년 만에 '톨리 건지'로 돌아간, '수바시'는 장례를 치르고 '가우리'에 대한 책임감과 '우다얀'과의 유대감으로 23세에 동생의 아이를 잉태한 채, 과부가 된 그녀와 결혼 의사를 부모님께 밝히고 미국으로 먼저 온다.

 

-중간생략-

미국의 다양한 가족 구성원에 대해

미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인도의 삼대의 삶을 관통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의 현대사와도 많이 닮아있다.

인도의 역사를 들춰보며 독서해야 했다. 다른 나라의 문학을 읽는 것은 낯 설고 이질적인 그 문화와 언어와 사회와 역사를 읽는 기쁨을 준다. 유럽의 소설과는 또 다른,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이야기들이라서 호기심과 함께 더 자극이 되는 책이었다.

오래도록 인상 깊게 남을 책이다. 작가의 서술 방식도 매우 좋다.

나는 개인의 삶의 이야기 속 배경이 되는 커다란 사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우리처럼 지극히 개인의 삶을 살고, 이야기하지만,

그 개인이 그런 삶을 사는데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상황.. 그것이 세계대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전쟁 이야기도 아니고, 전쟁 언급은 고작해야 몇 번, '수바시'가 태어난 연도와 상황, 인도의 분리 독립 언급 시 잠깐 등장한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그 시대를 반영해야 하는 의무감도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전율하는 독서를 마치고 나면, 몰려오는 피로와 벅찬, 호흡에 숨을 크게 몰아쉬어야 하지만 행복하다. 이런 책을 만나게 해주고 이끌어주시는 이웃들에게 늘 감사드린다.

 

 

- 왜 철학을 전공해?

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해?

플라톤은 철학의 목적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살아 있지 않다면 배울 것도 없어. 죽음 앞에서 우린 평등해. 그 점에선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 같아.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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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찾아 떠난 남자 - 빛으로의 여행
클라라 마리아 바구스 지음, 김희상 옮김 / 청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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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왜 봄을 찾아 떠났을까'가 궁금했지만, 막연히 봄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운현궁의 봄]을 읽고는 또 [봄을 찾아 떠난 남자]를 읽으며 봄의 시작을 만끽한다.

작년에 책 나눔 해드린 이웃 중, 이 책이 두 권 있다 하시어 냉큼 받아두었던 책이다.

'클라라 마리아 바구스'는 심리학을 전공한 여성으로, 여행을 하면서 자아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들이 자아를 탐색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이야기들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의 내용은 그 마법 같은 이야기들이다.

한겨울, 서리와 얼음으로 덮여있는 어느 날 창가에서 차를 마시던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화려한 색채에 작고 반짝이는 깃털을 가진 새의 지저귐을 듣는다. 그새가 앉았던 곳에는 찬 바람의 숨결이 그치고 봄의 향기가 풍겨온다.

목련도 꽃을 피우지만 새가 사라지자 다시 겨울이 된다.

그 새는 숲으로 날아가고, 건너다보는 숲에는 나무들이 신록으로 물들고 꽃들이 피어나고 역시나 향기가 전해온다.

남자는 배낭을 꾸려 그 새를 찾아 숲으로 향한다.

새가 사라진 숲은 나뭇잎들도 시들고 만개했던 꽃들이 다시 봉오리가 된다.

그 새의 행방을 찾아 떠나는 이 남자의 여행은

'봄을 찾아 떠나는 것'이고, '잃어버린 꿈'과, '영혼'과 '자아'를 찾아 그리고 '진리'를 찾아다니는 여정이 된다.

방앗간 주인을 만나고, 사공을 만나고, 와인 빚는 노인을 만나고 새알도 만나게 된다.

새알을 소중히 품고 다시 길을 떠나, 헌 신을 신은 소년과, 왕과 식당 주인과 벤치 위의 할머니를 만나고 포도밭 농부, 그림 그리는 소녀와 아버지, 노인, 어부, 선장, 상인, 양봉가 등을 만나면서 그들과의 짧은 대화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조금씩 달라져간다.

- "살아 있는 한, 너무 늦은 것은 없다오. 포도를 자세히 보시오. 포도의 수확이 포도의 죽음을 뜻하지는 않아요. 그건 그냥 변화일 뿐이 라오. 어떤 상태에서 아직 있지 않았던 다른 상태로의 바뀜이랄까? 와인은 본래 상태의 변화이지, 끝이 아니라오. 그리고 건포도도 포도의 죽음은 아니죠."104

- 어쨌거나 가을의 시작이 여름의 죽음은 아니라오. 그냥 가을의 출발일 뿐이라오. 오로지 상태가 변한 거죠. 변화한 상태에서도 많은 것이 가능하다오. 아마도 당신이 상상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다른 것일게요."105

- 끝이란 없다. 모든 것은 계속된다. 모든 것은 오로지 상태의 변화일 뿐이다. 106

-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도 끝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이전 모습의 변화일 뿐이다. 이전 것이 아직 있지 않았던 어떤 것으로 바뀌는 변화를 남자는 생각했다. 가을에 잎이 녹색을 빨갛고 노란 단품 색으로 바꾸듯, 우리는 늙어가며 환상을 경험과 맞바꾼다. 인생의 가을은 반드시 우리 꿈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 인생이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것으로 그만큼 더 풍요로워짐을 뜻할 수도 있다. 더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 새로운 가능성에 자리를 내어준다. 변화는 상실이 아니다. 106- 107

 

노년의 지혜는 젊음의 피와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인데,

기존의 가능성이 닫히고 새로운 가능성은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인 좁은 구멍을 슬기롭게 잘 빠져나와야 맞이할 수 있는 넓은 바다..

인생이란, 더 이상 아무런 가능성이 없을 정도의 꽉 막힌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거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중간의 좁은 길도 길은 길이니까, 어디로든 통할 테고..

다시 나타난 새의 도움을 받아, 모래시계에서 탈출한 그 남자의 여행은 종료된다.

그리고 자기가 메모해 두었던 여행 중에 헤매었던 길들이 자신의 지문과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된다.

지문은 인생의 지침서였다.

좋은 인생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가 갈망해 오던 보물, 봄은, 자신 안에 숨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 남자는 이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갔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기도의 주제가 '지혜를 주십사'이다. 아직은 모래시계의 좁은 길에 놓여 있지만, 내 시작이 넓었듯이, 지혜를 획득한 나의 노년 또한 넓은 바다이기를 잔뜩 갈망해본다. 또한 청춘들이 그 좁은 길에서 성급히 판단하지 않기를,, 인내하고 지혜를 갈구하며, 통과해 나오기를 이끌어 줄 수있는 어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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