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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축하한다. 며칠 전 집 뒷편의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올랐다가 중턱 전망대에서 항구 도시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이곳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살다 이사갔는데, 그리워서 옛 보금자리 주변을 살피러 왔다는 부부를 만나 뜻밖의 도시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여행 책자에는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 행운이었다.
마침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전망대 아래에서 들려, 보통 등산객들은 가지 않는 샛길을 따라 절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산기슭에 종려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데, 꽃이 활짝 핀 상태다. 그런데 꽃이 황금색이다. 축하용 화환이건 조문용 화환이건 화환의 장식으로 종려나무 잎은 자주 사용되기에 익숙한데, 맘껏 개화한 꽃을 본 기억은 아마도 처음이었지 싶다. 다른 영화제의 그랑프리 황금사자상이나 그리스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황금양모피, 뭐 이런 식으로 '황금'을 종려나무 앞에 접두사처럼 붙인 것이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들은 거의 읽은 상태이고, 소장 도서들이라 당연히 있겠지, 싶어 찾아보지만 없다. 아마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나 보다. 몇몇 장면은 떠오르는데, 정확히는 나무들로 변신하는 이야기, 필자에게는 익숙한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도 아슴프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에 푹 빠져 살던 때는 아니었다. 관련하여 어딘가에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찾을 수가 없다.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급한 김에 eBOOK으로 주문해서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미리보기]로 도입부는 이미 읽은 상태, 좀더 읽어나가니 옛 기억들(첫 만남의) 새록새록 재생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식물들도 이동을 한다. 『식물의 정신세계』(정신셰계사)에서 입증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 수긍이 가는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이 책의 부제는 '식물도 생각한다'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에세이 중에는 「동물들에게도 이성이 있지에 관하여」가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을 읽는데 기본 바탕은 정적인 식물이 가진 식물성, 동적인 동물이 가진 동물성의 대비 혹은 대조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립과 갈등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의 감동은 많이 사라져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나무로 변신하는 이야기, 특히, 「월계수가 된 다프네」신화는 이 작품의 밑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모티브일 뿐만 아니라, 나의 형의 <나무들의 변신 이야기>라는 기록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34편 가량)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향연』인데, 거기 등장하는(대담자) 인물 중 하나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사랑론, 자웅동체설로 소설 속에는 직접 인용되면서 '변주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는 고대 서양 고전들의 영향이랄까, 반영이랄 수 있는 모티브들이 이것 말고도 등장하는데, 동서양의 신화가 닮아 있으니 꼭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그 배경이 떠올라 '감동'이 처음 같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일단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독자라면, 앞서 언급한 이 작품에서도 직접 거론한 고전 두세 권쯤을 읽는 것으로 책읽기의 새로운 길을 내보시라는 것.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독자라도(희랍어) 신명, 영웅이름, 지명들이 라틴어로 표기되기에 낯설 수 있다. 그래도 오비디우스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일단 펼친 책을 덮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앞서, 황금종려상 이야기로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잘 알려졌듯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이 소설의 작가 이승우야 말로 한국 작가들 가운데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가장 근접해 있다는 찬사를 보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한 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었디. 이승우 작가에 대한 찬사와 기대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노벨문학상과 같은 상의 수상자가 선정이 되기 마련이고, 그만큼 그들의 정신세계의 원형에 해당하는 신화나 고전들을 바탕에 깔고 새롭게 창조하는 작품일수록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평할 수는 없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뭔가를 건드린 작품인지가 관람 포인트가 될 것 같다.
4인 가족이 식탁에 앉아 만찬을 한다. 『식물들의 사생활』이 마무리되는 즈음이다. 여지껏 제각각 생활공간만 공유하던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4인용 식탁(부부와 두 아들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간행된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19년 4월)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모티브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4인용 식탁#1_55면/4인용 식탁#2)56면) 이안 감독의 오래된 대만 영화 <음식남녀>의 요리사인 아버지와 그 딸들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가족소설로의 면모가 확인되는 지점이다. 4인용 식탁에 앉기 위해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었구나,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은 장면이다. 작가의 최근 저작에서의 언급처럼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듯"(『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도 느리게 읽기, 단숨에 읽었더라도 그 배경이 되는 콘텐츠들을 읽으면서 다시 읽으면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다만, 한 가지 필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읽을수록 화자인 나(기현)의 캐릭터가 좀 작위적이랄까,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작품이 처음 선뵌 때가 2000년이란 점을 감안하면(그리스-로마 등 서양 고대 고전의 원전번역이 쏟아져나온 것은 그 이후이다) 저자의 성실한 독서에도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이승우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007이라는 점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흥미롭다. 영화 007시리즈는 다시 봐도 새롭고 재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