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금도 극장 한두 곳에 상영중일 <경계도시2>나 송두율 교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듯하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경계의 이편과 저편, 혹은 경계지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책과 영화 등에서 만나보는 시리즈물로 기획한 글이기에 그러하다.  

0.그때 거기, 지금 여기 

오래된 생각이지만, 흔히 쓰는 '여기와 저기'와 '거기'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듯하다. 전자와 후자는 시간의 차이라는 점에서, 전자 안의 ''여기'와 '저기'와는 공간적인 거리에 또 다른 차이 혹은 경계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늘 궁금한 것은 '여기'와 '저기'의 차이인데, 흔히 상대방을 부를 때, 호칭 혹은 이름을 모르거나 '아저씨' '아줌마'라고 부르기엔 좀 그래서-실제 그렇게 불리면 화가 날 혼기가 늦어지는 어른들이 의외로 많다- 예우(?)한다는 것이 '저기요!' 아니면 '여기요!'가 되는 것이다. 시선집중에서 손석희 교수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 인터뷰 대상에게 "안녕하세요!" 대신에 "여보세요!"하여 웃음을 자아내듯이 우리는 습관적으로 여기요와 저기요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여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저기'가 되는 것일까? 여기와 저기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경계가 있을 것이지만 음절의 차이 말고는 분명한 경계 지점을 짚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에 '거기'는 여기와 저기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시간차가 있는데, 그 차이는 아주 오래된 것일 수 있고 최소한 영화의 장면의 차이 이상은 있다. 다만, 그렇게 부를 때에는, 상대방과 당사자가 '거기'에 같이 있었거나 그런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기나 저기와는 구분이 된다.

 

 

"인생이란 드라마의 다른 막들을
훌륭하게 구상했던 자연이
서투른 작가처럼 마지막 막을
소홀히 했으리라고 믿기 어렵네."
-20면, <노년에 대하여> 5절 중에서
 

키케로지음, 천병희 옮김, <<노년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숲 펴냄)

언제부터인지 사용 빈도가 늘고, 지금은 어떤 개념어로 자리잡은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거기 어디쯤에선가 와서, 이승에서 살다가 저승으로 가야하는, 그것이 돌아가는 것인지 생소한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입창의 차이와 숱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경계에 대한 이야기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삶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행복과 불행이 뒤바뀌고, 그 경계의 장벽이 턱없이 높아짐으로써 또한 행복과 불행이라는 경계가 모호해지게 되는 일은 삶의 곳곳에서 잠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에서 만나는 경계랄까-사실은 이것도 숨쉴틈이 없이 말해도 부족할 만큼 벅차다- 그런 얘기를 해볼까 한다.

1.경계에는 '선(線)'이 있다.

벌써 데뷔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단 한 권의 시집(<<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7,)을 내놓은 젊은 시인, 장만호의 시에서 발견하는 것은 절묘하게 포착된 선(線)의 아름다움이다.


개구리밥 가득한 수면
물뱀 지나간 궤적

늪은
가만히
푸른 실눈을 뜬다
--68면 <악어> 전문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이 오고
세계는 조금씩 녹슬어간다
새들은 허공에 밑줄을 긋거나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다
--48면 <시월> 처음 4행

너무 멀리 왔다, 생각했을 때 나는
벌써 이 길의 식도(食道)를 넘은 것이다
새벽 한시,
돌아갈 길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이 길을 가다 보면 태백은 있다는데
앞서가던 한 떼의 차량들이
저마다 밤의 기나긴 위장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시 빠져나온다
--84면 <태백행> 첫연.

물뱀과 새들과 차량은 수면, 허공 ,깊은 산의 적막을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놓는다.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기에 좀 그렇지만 경계는 경계이다.
문인수의 시집 <<배꼽>>의 표제시 <배꼽>에서도,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 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초반부 4연)

잡초만 무성한 빈집으로 통하는 길이 생겨 공간을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놓는데, 장만호의 그것이 식도와 창자('밤의 기나긴 위장')이라면 문인수는 경계인 길을 '탯줄'에 비유하고 있다. 창자와 배꼽은 우리 몸 안(내부)에 있어면서 밖(외부)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또 다른 경계가 된다.  

    

 

 

 

 

 

 

 

 

<<무서운 속도>> 장만호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7,), <<배꼽>>문인수 지음(창비, 2008년 4월), 창비시선49 <<깨끗한 희망>> 김규동 지음(창비, 1985. 3.) 

2. 시간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경계'
 

"번개같이 스치는 것은/깨끗한 한 개의 희망이다"(시 <희망>의 두 행)  

바로 이 대목에서 김규동 시인의 대표시집 <<깨끗한 희망>>이라는 책제목이 나왔다.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시인이 경험한 해체된 풍경에는 1)'일정 때/ 두만강변 회령 경찰서 취조실' 안에서 흘러나오던 그 사나이의 비명이 있다. 그것은 평생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다.  2)"6.25때/한강을 헤엄쳐 건너온/백골부대의 한 병사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던 일도 잊히지 않는다. 강(한강)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왔다는 것은 저편의 죽음에서 이편의 삶으로 건너왔음을 의미하며,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다. 3)시인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으면서 안내꾼에게 회중시계를 그 대가로 건네주어야 했다. 남과 북의 경계, 휴전선의 경계를 사이에 둔 쓰라린 기억도 있다. 
 


3. 경계에 핀 꽃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김규동의 시집처럼, 표제시가 따로 없고 수록된 시행(<꽃>) 가운데 시집의 제목을 뽑았다는 점에서, 함민복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도 빼놓을 수 없는 시집이다.  

시인은 스스로가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놓인, 화분('흙의 공중섬'이라는 점에서 역시 경계가 명확한)에 핀 국화('전생과 내생 사이'-경계-에 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 화분에 대해, 의미(추측)를 부여한다.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 인 담은 철책에 비유되고, 그 위에 놓인 화분'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에 해당한다. 화분은 나의 공간의 남의 공간(혹은 공유)과 구분짓는 깃발이 되는데, 압권은 그 다음이다. 담 위에 놓인 꽃의 향기마저 안과 밖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나 싶은데, 시인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고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필자의 느낌에는 사족 같다. 뭔가 마무리를 해야 하므로 하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지음, 창비(1996년 10월) 

받들어 꽃
곽재구 지음, 미래사(1992년 5월)   


4. 전쟁과 평화, '받들어 총!'과 <받들어 꽃!> 사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MBC와 KBS 양대 공중파방송에서 한국전쟁을 재조명한 <로드넘버원>과 <전우>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천안함 침몰'이라는 사건이 어쩌면 예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만 그런 것일까?   
함민복이 궁극적으로 꽃에서 경계를 읽어냈다면, 발표시점이 198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 곽재구 시인의 <받들어 꽃>은 '받들어 총!'의 전쟁을 상징하는 '총' 대신 한 음절의 '꽃'이라는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16~19행)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24~29행)

창작과 발표 시기에서  <받들어 꽃>이 함민복의 <꽃>보다 10여 년쯤 앞서지만, 우리나라 "해안가 철책에 초병"은 여전히 귀를 곧세우고 "받들어 총!"을 외치며, 김규동 시인에게 회한인 38선(휴전선)은 여전히 다만 휴전인 상태를 의미하는 경계로서 경계근무중인 상황이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08년 10월),  <<그리스 비극 걸작선>> 아이스퀼로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10년 2월) 

 

5.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Anti-고뇌苦惱>
사람들은 보통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에서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고, 그 지은이가 소포클레스라는 것을 상식으로 떠올린다. 그러나, '경계'를 얘기할 때, 가장 비극적인 등장인물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아니겠는가! 오이디푸스 왕이 남성인물(남성성)이면서 부모(아버지)이자 아들로서의 고뇌를 대면한다면, 안티고네는 여성인물(여성성)이면서 자식(딸), 친족(오빠들과 여동생 사이에서)으로서의 고뇌를 대변하는 '경계'인이다. 반대를 의미하는 '안티-'나 '-고네'는 고뇌(苦惱)라는 한자어 우리말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을만큼 삶 자체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다. 그저 말장난처럼 하는 얘기이지만, <Anti-고뇌苦惱>로 그녀의 캐릭터를 함축할 만큼 그녀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경계를 넘어섬에 있어 초연하고 당당하여, 그녀에 대한 해석들은 세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다행히 그리스어(희랍어)로 된 작품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천병희 선생의 노고에 힘입은 원전번역으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만날 수 있다. 영원한 고전 그리스비극 원전을 직거래 번역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 아이스퀼로스비극전집, 에우리피데스비극전집 1,2권과 함께 소포클레스비극전집까지 그리스비극 3대 대표작가의 현존하는 33편의 비극이 완간된 상태이나, 3대작가의 대표작 두 편씩을 다룬 <그리스 비극 걸작선>으로 그리스 비극 맛보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걸작선에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가 실려 있는데, 그리스비극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옮긴이의 배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전번역된 작품을 읽고 한 발 더 나아가 살피는 것을 전제로, 나라 안과 밖에서 씌어진 주목할 책 한 권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한정숙 지음,  길(2008년 3월) 

안티고네의 주장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동문선(2005년 3월)

 

6.  나라 안팎 두 여성학자와 다시 만나는 안티고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와 <안티고네의 주장>
한정숙은 '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이란 부제가 붙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안티고네-국가보다 존엄한 인간의 영혼을 위해 죽다>라는 장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속의 여성주체들1'로 안티고네의 삶을 현대 '한국인의' 정서와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그런데,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에 매장의 예를 베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안티고네의 선택을-여기까지가 한정숙의 시각이라면-, 주디스 버틀러는 근친상간의 표현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최근의 연구자이다. 그녀가 펴낸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라는 부제가 붙은  <<안티고네의 주장>>이 그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경우, 역자해설부터 읽는 편이 접근하기에 쉬운데,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면 안티고네는,   

"더 이상 순수하지도 영웅적이지도 못하며, 애도의 주체이기보다는 적절한 애도에 실패한 '우울증 환자'일"(145면)
 

뿐이다. 버틀러는 더 나아가 안티고네의 우울증과 죽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족구조의 우울증으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한다. "이성애 제도의 규범 속에서 동성애 가족은 인식 불가능한 삶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우울증이 되었다"(146면)는 것이다.  
<안티고네-국가보다 존엄한 인간의 영혼을 위해 죽다>라는 소제목(한정숙)과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라는 부제(버틀러)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우리 정서에는 한정숙이 다룬 부분이 안티고네를 이해하는 개론서쯤에 해당한다. 반면 버틀러의 저작은 원론서쯤이라고 해야할런지. 
<안티고네>라는 비극 작품에서 만나는 등장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경계에서부터 현재에도 계속되는 삶의 경계 혹은 그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저작들에서도 이어가기로 하고, 일단락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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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ko3 2010-07-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들에 대한 해석이 참 마음에 들어요. 오이디푸스왕하고 안티고네는 읽었는데, 전집 전 작품을 읽고 싶네여.

timeroad 2010-07-30 16:22   좋아요 0 | URL
마음 먹었을 때 전작을 읽어나가도록 해보세요.

새우 2010-07-2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오랜 만에 님의 글을 다시 읽게 되어 기분 좋고,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timeroad 2010-07-30 16:22   좋아요 0 | URL
늘 감사, 다른 일로 좀 바빴어요.

yess1985 2010-07-2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웃으로부터 새로운 글을 올렸다는 연락을 받고, 와서 읽었어요. 미처 못읽은 좋은 시들이 있다는 점, 안티고네 관련 글들을 꼭 읽어볼 생각이랍니다.

timeroad 2010-07-3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이웃을 두셨군요. 이 주제로 안 걸리는 시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많은 시집들 가운데 아끼는 시들을 골라봤어요

라라 2010-07-3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ti-고뇌 재밌는 말이네요. 고뇌 속을 가다라는 러시아 소설이 있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timeroad 2010-07-31 15:56   좋아요 0 | URL
알렉세이---톨스토이 소설인데, 나중에 고난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가 그래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