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에 본 영화 <이끼>(2010.07.14)와 연초에 본 영화 <용서는 없다>(2010.01.25), 두 영화의 공통점은 <18세 이상 관람가>라서 안타깝게도 딸아이와 함께 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작품성도 좋지만 흥행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영상비지니스 관계자의 입장에서 15세와 18세 차이는 대단히 크지요. 그런데 <이끼>를 보고 나서 나는 가장 먼저, 굳이 18세이상으로 제한해야 했을까, 또한 그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를 따져봐야 했습니다. 반면에 <용서는 없다>의 경우는, 그리스 신화의 주역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의 사지가 잘린 조각상(비너스상으로 알려진, 책의 표지 아래)이 중요 모티브로 등장하고, 시신 부검하는 장면이 '리얼해야' 할 이유가 있었음을 영화가 끝날 즈음에 알게 되지만 보여주기에 충실한(?) 나머지 18세이상 관람가를 자초하지 않았나 싶네요.
강우석 감독은 애초에 15세를 기대했으며 "18세 수위를 염두에 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기에 수정은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250만 관객을 넘겼고, 손익분기점도 넘었다 하니 인터넷 만화 원작의 힘도 그렇지만, 영화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끼>원작만화, 영화 <이끼>, <용서는없다>[원전으로읽는그리스신화]
얘기를 꺼낸 김에 두 영화를 비교하는 하나의 기준이랄까, <이끼>가 30년간 은폐된 마을을 찾은 한 사람(박해일)과 낯선 얼굴을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간의 숨막히는 대립을 그렸다면, <용서는 없다>의 경우 환경운동가-꼭 그런 설정이 필요했는지 아직도 의문이고 유감이지만-인 범인이 오히려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경계'의 벽을 무너뜨리고 수사망과 복수의 대상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역시 말이 나온 김에, 이끼(Moss)의 꽃말은 '모성애'입니다. 생일꽃(양력 1월 22일)이니 생일점이니 하는 해석을 필자 나름대로 다듬어보면,
"(1)주위를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때라야 온화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 (2)이 부드러움이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일부러 격렬한 사랑을 자아내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것이 당신만의 멋이니까요. "
인데,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영화에서 그 역할이 상당했던 이영지(유선)라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만화 원작보다는 영화에서의 영지 캐릭터가 모성애가 짙다고 할까(유일한 모성을 가진 여자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른 남자배역들의 캐릭터 분석도 가능하겠지요. 영지는 영토(領土)의 유의어인 영지(領地)는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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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영화나 정극인 연극, 그리고 드라마와 뮤지컬,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다른 장르로 갈래지워지고 나름대로 진화하였지만, 현대 '드라마'의 원형은 그리스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대에서 상연된 일종의 희곡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숱하게 변용되어 활용되는 이야기의 원형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살피면 그리스 비극들은 대단히 폭력적이며 피비린내가 나는 현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1)아가멤논이 '집 안'에서 살해된 뒤 문이 열리고 시신이 보여지게 되고(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2)아가멤논을 죽였던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도 '집 안'에서 살해된 뒤에 (관객에게는) 그 시신만이 보여지게 됩니다.(에우리피데스 비극 <엘렉트라> 등) (3)이오카스테가 자살하고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데서는, 사자가 나와 장황하게 설명하고, 오이디푸스가 피를 흘리며 문(집) '밖으로' 나오는(소포클레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식이지요.
대개는 "퀼뤼타이메스트라, 집 안으로 퇴장"(1141행과 1142행 사이) "엘렉트라, 어머니를 따라 퇴장"(1146행과 1147행 사이)과 같은 지문을 통해 '아, 이제 죽이고 죽는 잔혹한 장면이 나오는구나'를 짐작하게 되고,
퀼뤼타이메스트라: (집 안에서)얘들아, 제발 이 어미를 죽이지 말아다오!(1165행~)
코로스장: 그대들은 집 안에서 나는 저 소리가 들리세요?
퀼뤼타이메스트라: 아, 슬프고 슬프도다!
코로스장: 제 자식들의 손에 쓰러지는 저 여인도 불쌍하구나!(~1168행)
와 같이 관객은 집 안에 호소하는 퀼뤼타이메스트라의 목소리와 집 밖에서 이 상황을 논평하는 코로스장의 대사를 연이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오레스테스, 퓔라데스, 엘렉트라 집에서 나온다. 시종들이 두 구의 시신을 집 앞에 내려놓는다'"와 같은 지문을 끝으로, 잔혹한 살해장면은 음성으로 처리되거나 최소한 관객에게 참혹한 장면이 직접적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을 읽다보면 지문에서의 '집 안'만이 아니고, 등장인물의 대사나 코러스에서도 '집안'과 '집 안'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쉽지 않은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왕가에 속한 사람들이므로 여기서 '집'은 '궁궐'이고, '집안'이란 '왕족'을 의미하게 되며, 얽히고 섥힌 '집안'(가족들, 친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1)(당시의)기술적인 한계-얼굴마저도 드러내지 않았던 당시의 옷차림으로 실감나는 연기는 무리였으리라-라고 볼 수 있으나, 2) 비극 시인들이 폭력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3.
그런데 왜 근래의 영화에서 관객들은 폭력(그리고 노출)을 그 자체로 즐기게 되고, 영화감독은 폭력적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을 수요와 공급-닭이 먼저이냐 달걀이 먼저이냐-의 관계로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되어버렸을까요? 김상봉은 "폭력적 상황을 일삼아 재현"하는 것이 관객들이 현실의 폭력적 상황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생하게 보여주기가 비극성을 배가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지요.
아내와 정부가 남편을 살해하고, 또 그들을 그 아들과 딸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해하여 복수하고, 앞서 거론한 것처럼 자신의 눈알을 찌르는 충격적인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그 처연한 슬픔이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텍스트(글)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근원적인 물음, 대체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과 기억의 기능이 기계적으로 확장된 것이 사진이라 할 것인데, 사진술의 등장 이전과 이후의 상황, 회화와 사진 등에 대해 도움을 받았던 책은 <본다는 것의 의미>(존 버거 저 | 동문선 | 2000년 4월)였습니다. 역설적으로 게오르그 루가치의 <소설의 이론> 서문에서 총체성을 잃어버린 현재를 안타까워하면서 북극성만을 바라보고 항해할 수 있었던 시대는 차라리 행복했다는 저 유명한 구절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고 하겠습니다.
인물사진이 대표적이겠지만 좋은 사진은 대상을 과감하게 클로즈업하는 데서 시작된다, 좋은 사진을 언급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지요. 집중할 수 있는 사물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촬영작가의 의도(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을 바꾸면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제거하는(마음속에서 그리고 앵글에서 트리밍) 과정이기도 합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는 것을 도드라지게 하는 보여주기, 달리 표현하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기와 유사한 효과가 아닐까요?
극단적이지만 그리스 비극 얘기를 꺼냈으므로, 그리스 비극=오이디푸스왕(=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오이디푸스의 왕은,
"눈을 잃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김상봉의 앞의 책)
합니다.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또 보려고 했을 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보기를 포기함으로써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국내에는 지난 5월에 개봉된 이란 영화 <참새들의 합창(2008)>, 앞서 개봉되었던 <천국의 아이들(1997)>로 잘 알려진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윌로우 트리>에서 시각장애인을 내세워 던지는 질문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연관이 깊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맹인으로 살다 시력을 되찾은 사람(시각장애인 대학교수 유세프-파비스 파라스투이 분)이 그 욕망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 그동안 자기를 보살펴준 아내가 갑작스레 지겨워지고 그 자괴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 것도 신이고 새로운 시련을 안겨준 것도 그 신이다. 눈을 뜸과 동시에 광기에 휩싸인다...
오이디푸스와는 반대로, 유세프는 실제 눈을 뜨면서 마음의 눈을 닫아버리고 행복 끝 불행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이 감독의 영화 중에서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는 <컬러 오브 파라다이스(1999; 천국의 색깔)가 있고, 근년에 흥행했던 다른 감독의 이란 영화 <블랙>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컬러 오브 파라다이스> 포스터
사건 하나하나를 살피면,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그들의 아들이 그 어머니를 살해하며(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르며, 남편에게 버림받아 그 복수로 친아들들을 살해하는 메데이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비극은 요즘 식으로 하면 그 <18세이상 관람가>인 폭력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비극이 상연되었던 디오니소스 극장의 구조를 살피는 데서도 명확해지지만 영원한 이야기의 원천으로, 드라마라는 장르의 원조로 그리스 비극이 고전의 자리에서 빛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윌로우 트리의 슬로건)을 위해 일부러 시각을 잃을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다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찍는 ‘눈사진’이 더 아름답고 오래 간다는 사실을 드라마(영화)를 만드는 이나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잘 활용했으면 싶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집안'과 '집 안'이 대사와 지문에서 어찌 쓰이는지를 살피는 일은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