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여우 길들이기
리 앨런 듀가킨.류드밀라 트루트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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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은 어쩌다 가축이 되었을까?  

 개는 거의 최초로 가축이 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개는 늑대와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을 텐데, 개는 어떻게 늑대와 다르게 가축이 되었는가. 그 차이는 뭘까. 그 차이에 가축화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구(舊) 소련 전역에서 (모피 생산의 목적으로) 사육되던 은여우는 같은 갯과 동물로서 이 과정의 유전적 성질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은여우의 가축화를 시도하면서 동물 가축화의 비밀을 밝혀보자는 것이 이 실험의 목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과 몇 년 만에 가축으로의 가능성을 내보이더니 30년도 되지 않아 실질적인 가축화에 성공한다. 지금은 몇몇 가정에 분양까지 한 상태다. 

 

 유전학자인 드미트리 벨랴예프의 ‘대담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그의 지도하에 마찬가지로 유전학자인 류드밀라 트루트에 의해 실질적으로 실행된다. 냉전 시대 초반에 시작된 실험은 탈냉전을 거쳐 21세기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60여 년의 긴 시간이지만 유전학적으로는 찰나도 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이다. 

 

 술술 읽히는 편은 아니지만 대중 과학서적으로써 적당한 수준을 지키면서도 통찰력을 선사하는 좋은 책이다. 

 

 우선 실험의 아이디어 자체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처음부터 아주 복잡한 실험 방식을 실행하는 게 아니라,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시작을 해서 점점 어려운 방식들이 적용된다. 이는 이 실험이 과학기술(특히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실험이 계속될수록 유전학은 세계적으로 급격히 발전하고, 그것은 다시 여우 실험에 적용된다. 유전학의 발전 과정을 쭉 훑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실험 자체가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된다. 물론 연구자들과 작업자들의 오랜 인내와 시행착오가 있었겠지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확실한 결과가 나왔고, 거의 처음에 예상했던 방향대로 결과가 순조롭게 나오면서 차곡차곡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옛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가 크게 한몫했는데, 실험 초반에는 소련 과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사이비 과학자’ 트로핌 리센코 때문에 실험의 본래 목적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는 시작될 수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리센코의 몰락과 함께 대규모 물량이 투입된다. 


 여우를 키울 농장을 구하거나, 부지를 정해 아예 농장을 만들어 버린다던지, 실험용 집이 필요하면 새로 짓는다던지, 많은 수의 여우를 안정적으로 먹이고 키우는 일, 수많은 작업자를 고용하는 일, 그리고 이렇게 몇 십 년짜리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진행되게끔 뒷받침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냉전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미국과의 경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상상해 보게 된다. 하긴 그러니까 우주선까지 쏘아 올린 거겠지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이 끝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다) 

 

 실험 과정은 대단히 흥미롭다. 유달리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야생 여우들을 선별해서 짝짓기를 거듭하면, 불과 몇 대만에 아주 온순한 가축에 근접한 여우들이 탄생한다. 그들은 인간을 친근하게 대하며, 나중에 가서는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새끼 여우에 대한 묘사와 그 새끼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애정 때문에 실험 과정은 의외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무엇보다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판타지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동물을 좋아한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번쯤 동물의 새끼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새끼고 성체고를 떠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동물들의 외형에 매료되곤 한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고, 손으로 만지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야생의 동물들과 ‘화해하는’ 장면을 자주 꿈꾸곤 한다.  


 야생은 오랜 시간 동안 인간에게 극복의 대상이자, 정복해야 할 힘겨운 ‘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야생동물과 인간이 친근함을 유지하는 장면은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킨다. 각종 SNS에는 그런 야생 동물들과의 화해, 일종의 낙원을 재연하는 듯한 동영상으로 넘쳐난다. 

(알래스카 회색 곰과 공생하고자 했던 남자가 결국 그것에 실패하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 맨>(2005)이 떠오르기도 하고, 공룡과 교감하고자 하는 ‘공룡 판타지’ <쥬라기 공원> 시리즈도 떠오르는데, <쥬라기 월드>(2015)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랩터와 교감하고 훈련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야생 여우가 단계를 거듭할수록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과학적인 표현은 아니다) 조금씩 인간의 애정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런 본능적인 감동이,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더 이상 야생은 적이 아니고 친구다. 그리고 인간과 개의 첫 만남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면 괜히 뭉클해지는 것이다. 처음 무리를 이탈해서 인간에게 접근하는 유독 온순한 늑대와 동물을 유독 좋아하던 어떤 인간의 만남. 

 

약 2만 6천 년 전에 사자, 검은 표범, 곰 등의 사나운 포식자들이 그려진 정교한 벽화로 유명한 이 동굴에는 바닥에 열 살로 추정되는 한 소년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혔는데, 그 옆으로 줄곧 커다란 갯과 동물의 발자국이 따라다녔다. 발자국 모양을 보아 이 동물은 늑대보다 개에 더 가까웠다. 소년과 그 옆을 총총 걸음으로 충실하게 따라가는 원시 형태의 개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p. 154

 

 실험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실험을 주관하던 류드밀라는 여우와의 교감을 제외한 객관적 관찰만으로는 더 이상 정확한 실험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물의 가축화는 동물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적응한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동물에게 적응한 결과다. 가축화에서는 동물과 인간, 그 둘의 서로에 대한 애정을 빼고는 온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조언은 류드밀라가 잊지 않고 지침으로 삼는 구절이다. 

 

“길들인 것에는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인간과 가축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무리에서 온순함이 생존에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체 생활에 익숙한 늑대에게서 개라는 최초의 가축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험의 ‘대담한 아이디어’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인간 또한 가축화된 존재라는 가설을 세우기에 이른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가축화 시켰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계에 유리하다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가진 폭력성과 위협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인간은 더불어 살기 위해 온순함을 발달시켜온 대표적인 사회적인 동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온순함이 털 뭉치 같은 새끼 여우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게 만드는 우리의 본능 속에 숨어있다. 여기서 독자는 어떤 희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잊고 있던 본능을 가축, 반려동물들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왜 SNS에 동물 영상이 넘쳐나는지 알 것도 같다. 

 

 은여우 실험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험을 지도했던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병상에서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가 21세기 인류에 대해 그가 바라는 바를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 책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30여 년 후에야 나왔다) 

 

“친절해지십시오. 그리고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십시오. 모든 이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평화롭게 살고, 우리의 ‘형제들’─지구상에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전적으로 책임을 수행하십시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자연법칙을 연구하고 이 지식을 이용할 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p. 202

 

 너무도 당연하고 익히 들어온 이 말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은여우의 가축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길들여진 지 너무 오래됐기에 잊은 것들이 많아 보인다.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길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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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
스즈키 다이스케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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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 바쁜 일상에 위로를 주는 감상적인 에세이나, 성공한 인생을 뒤돌아보는 회한에 찬 회고록 정도로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결과적으로는 앞에서 얘기한 그런 책들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물론 주관적인 평가다) 기대치가 크지 않았는데 의외의 보물을 건진 느낌이었다.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투병기나 임상실험 보고서에 가까웠다. 물론 그렇게 딱딱하지만은 않다는 게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저자는 프리랜서 르포라이터로, 마흔한 살 되던 2015년 여름,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고차뇌기능장애’(高次腦機能障碍)를 겪는다. 고차뇌기능장애는 뇌경색 후유증의 하나로, 기억장애나 주의력결핍장애, 수행기능장애, 인지장애 등을 겪는 일종의 뇌기능 장애다. 뭔가 일본식 한자 조어 같은 느낌이 나서 검색해 보니 고차뇌기능장‘해’(高次腦機能障害)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는 것 같은데, 한 글자가 달랐다. 

 

 어쨌거나 저자는 르포라이터라는 직업 정신에 근거해서 자신의 질병을 최대한 정확한 묘사로 기록해 놓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전반부는 질병에 대한 묘사, 후반부는 질병을 야기한 저자의 생활습관과 태도에 대한 자아성찰, 마지막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상처들까지 파고들어간다. 밖에서 안으로 향해 들어가는 구조인데, 스스로도 자신을 취재하는 과정으로 임했음을 밝히고 있기도 하고, 내관법內觀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내관’이란 교도소 등에서 쓰는 치료법의 하나로 ‘가족과 배우자에게 받은 것’, ‘갚은 것’, ‘피해를 끼친 것’을 조용한 환경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가족에게 학대를 받아온 소년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내관법을 실시하듯 자신을 취재하면서 내 성격을 상세히 이해했고 결점을 찾아내 고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할 수 있었다. p. 179-180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의 태도는 정확하게 반대를 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사례를 통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취재해 오던 소외된 자들을 상기한다. 고차뇌기능장애 때문에 상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고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게 된 것을 설명하면서, 나중에 조직폭력배가 되는 어떤 불우한 소년의 대화 방식을 떠올리는 식이다.

 이렇게 병든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을 보고 있으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질병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감이 되어버린다. 심지어는 자신의 질병을 행운이고 기회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야 상대를 이해하게 되었으니, 이건 기자로서 행운이다.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뇌경색이라는 질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제 그들의 인식, 감각을 공유할 수 있고 글쓰기 능력도 잃지 않았으니 최고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p. 38

 

이어지는 말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사회에서 ‘성가신 존재’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으니 그들을 대신해 부자유스러운 감각과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사명이다! p. 38


 저자의 이런 태도는 그가 꾸준히 사회의 어두운 면을 취재해서 알리려고 노력한 기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책날개에 소개된 간략한 작가 이력만 봐도 알 수 있다. 


15년 넘게 빈곤층 어린이와 청소년, 성노동 여성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취재해왔다.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을 폭로한 논픽션 《최빈곤 여자》는 9만 부 넘게 팔렸고 추오코론신샤가 주최하는 신서 대상 5위에 올랐다. 그 외 쓴 책으로 《집 없는 소년들》, 《노인 잡아먹기》, 《뇌는 회복된다》가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는 이런 기록을 남기기 위해 ‘준비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병에 걸린 것 자체가 운명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 또한 저자가 만들어낸 운명이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그는 사명감을 갖추고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전반부를 차지하는 ‘증상에 대한 묘사’ 부분이 대단히 재미있는데, 띠지에 적힌 추천사에 보면 ‘심각한데도 웃음이 터진다’는 문구가 있다. 실상은 웃음이 터지는 정도를 넘어 흥미진진할 지경이다. 환자인 저자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저자 본인이 타고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고, 주변인들이 하나같이 재미있다. 특히 저자의 아내 치나쓰는 발상 자체가 대단히 특이하고 귀엽다. 심각해질 만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튀어나와서 시종일관 재밌게 독자를 이끈다. 

 

 흥미진진함은 저자가 자신의 증상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려 심각하게 고민하는 부분에서 최대치를 이룬다. 묘사가 절묘하다 보니까 어렴풋이 어떤 상태인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각 능력에 이상이 온 것을 설명하면서, 인공지능에 비유를 한다거나(시야에 들어온 것들 중에 우선순위 판단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똑같은 비중으로 받아들여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상태), 손가락 감각이 없다가 조금씩 돌아오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던 유명한 역사 인물의 이름이 번개 치듯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을 예로 든다. 공감을 안 할 수가 없는 절묘한 비유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저자는 감각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독자인 나도 거기 동참하는 기분이 든다. 일종의 체험에 가까울 정도. 저자의 묘사는 그 정도로 집요하다.  

 저자의 극단적인 역지사지 경험은 마치 ‘사회적 약자로 다시 태어나기’ 과정인 것 같다. 그걸 읽는 독자도 그 역지사지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묘사한 환자들이나 장애인들 외에 치매나 파킨슨병을 앓는 분들의 처지를 상상해 보게 되었다. 저자의 저작 의도도 정확하게 그 지점일 것이다. 그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걸 돕고, 사회적 관심과 복지의 필요성을 호소한다. 

 

 증상 묘사의 생생함에 비해서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인 느낌이나 추론에 의지한 부분이 많다. 때문에 저자의 판단과 과학적 사실을 구분 지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저자의 판단이 의사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디테일한 부분을 전달하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묘사된 기록이 흔치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전반부가 전문적 의료 지식과 비전문적인 분석이 뒤섞여 있다면, 후반부는 저자 자신을 향한 자기반성과 타인을 향한 따끔한 질책이 섞여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뿐이다. 하지만 전반부의 맥락 그대로 후반부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자기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지만, 자기 비난을 핑계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쓴소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의료시스템 같은 복지 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늘어놓았던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 절반은 그 시스템의 수혜자인 사회적 약자들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한 추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지나칠 수도 있지만, 나는 저자의 인류애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를 구하는 방법은 외부적인 도움에만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약자 스스로의 자기 혁신이 뒤따라야 진정한 구제가 가능해진다. 저자는 그 문제점 지적을 차마 당사자들을 향해 직접 할 수 없어서 자신에게 화살을 돌려 난도질을 해놓는다. 타인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난도질은 그만큼 동정의 여지없이 이뤄져야 했다. 그 자기비판이 과도하게 느껴진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이 느껴져서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단어로만 들어왔던 살신성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정도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벌거벗기고,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스스로를 욕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정도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살신성인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인간이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해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 평범함과 소박함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살신성인인 줄도 모른다. 저자는 그렇게 슬그머니 자신의 선의를 뒤로 숨긴다. 자기 성찰과 자기 위로인 척하면서 누구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타인의 도움에 호소한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타인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경우에 빗대어, 자신이 그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인간관계도 없을지 모를 약자들을 걱정한다. 

 

평상시라면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해주면 오지랖 넓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은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내가 도와줄 거 있어?”라는 질문 따위는 하지 말고 그냥 도와주다 보면 상대는 정말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말없는 행동이야말로 무엇보다 따뜻하고 고마운 것이다. p. 192

 

 나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선량한 사람들, 진심으로 타인을 걱정하고 불쌍해하는 사람들, 기꺼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는 사람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요즘은 비슷비슷한 에세이들이 많이 나온다. 모두들 자기 자신을 챙기자고 말하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자기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자고 말한다. 그런 책들 속에서 이 책은 소박하지만 특별한 빛을 발한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 글 처음에 했던 말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책이 진짜 위로를 준다. ‘위로’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말이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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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병자호란 - 하 - 격변하는 동아시아, 길 잃은 조선 만화 병자호란
정재홍 지음, 한명기 원작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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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필자가 병자호란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원작인 한명기의 책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는 사실을 밝혀둬야 할 것 같다.) 

 

하권부터 읽었지만 병자호란의 전체 개요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쟁의 조짐부터 전쟁의 시작과 전쟁의 의미 정리까지 모두 하권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권의 목차를 보니 인조반정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작하고 있었다. 인조 정권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역시 상하권 모두 읽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만화다 보니까 술술 잘 읽히고, 이해도 쉽게 표현이 친절하다. 책의 기획에 부합하는 면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병자호란은 일어날 만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당대 조선은 정말 개판인 나라였다. 전쟁의 발단, 전개, 절정, 결말 모두 하나같이 암 유발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고, 고구마의 연속이었다.  

 왕과 조정 대신들이라는 사람들의 상황 대처가 굉장히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문제가 뭘까 골몰하던 중에 ‘환향녀’ 부분에 이르러서 뭔가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이른바 ‘환향녀’로 불리는,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성들이 있었는데, 문제는 기혼녀인 환향녀들이 이혼을 당하고 쫓겨날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진 여자에게 조상의 제사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다. (물론 미혼 여성들은 결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그야말로 병자호란이 야기한 부조리 중 최고의 부조리라고 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책에서는 계속 ‘여인’이라는 멸칭을 쓴다)  

 

 많은 속환녀들이 그 때문에 어렵게 고향에 돌아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당시 이혼을 죄악시했던 조선이기에, 이혼을 허락해 달라, 혹은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환향녀의 가족들 입장)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이에 최명길(등장인물 중에 거의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보이는 사람)이 환향녀를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왕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그 기록과 함께 실록은 다음과 같은 비평을 남겼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포로가 된 부녀자들은 비록 본의 아니게 끌려가긴 했으나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p. 266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한 유교 사상이 모든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대하는 조선인의 태도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유교적 관계 원리가 모든 인간관계를 비롯해 국가 간의 관계에까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명과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후에 청이 되는 후금은 조선과 '형과 아우'의 관계로 묶여 있었다. 군자가 임금을 배신하고, 형을 임금으로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보면 정말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위험천만한 생각이지만, 당시에 그런 사상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면, 청의 부상과 병자호란 자체는 세계관을 깨부수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인 것이다.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가 썩어 있었던 것은 맞다. 특히 인재 등용 부문에서 그걸 가장 실감할 수 있었다. 척화파는 세계관의 한계 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온갖 부정부패, 우스꽝스러운 영웅심, 이기주의, 임무 태만, 그냥 (관리가 될 수 없을 정도의) 어리석음 등, 어떻게 하나같이 그런 자들이 조정의 대신이고, 관리가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직과 등용제도가 하나같이 썩어 있지 않으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전쟁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당시에는 당시의 세계관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오늘날의 독자는 그것이 이해가 잘 안되어 오해할 수는 있다. 물론 그걸 이 책의 미흡한 설명 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상권을 읽어보지 않은 상황이라 지나친 감이 있다. 

 


(할줄 아는 게 우는 것 밖에 없는 인조)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책에는 유독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부분이 많다. 인조의 우는 것에 감정이입을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거나, 왕의 비참함에 비극적인 연민을 부여한다거나. 그런데 내용의 맥락 상, 그것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인조가 전쟁을 대비해 최선을 다하고,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그런 비극적 결말에 다다랐다면 충분히 그 감정에 동참할 수도 있겠다. 영화 <300>의 비장함 같은 것. 


 하지만 인조가 전쟁을 위해 한 일이 뭔가. 우유부단하게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시간만 끌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군사적 방비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도망을 부지런히 빨리 간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다가 도망갈 타이밍마저 놓쳐서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에 갇힌 것 아닌가. 갇혀서도 무능함이 빛을 발해서 제대로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이런 플롯이라면 오히려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과 탐관오리들이 벌을 받아서 통쾌해져야 할 판이다. 물론 역사서에서 그런 식의 감정은 개입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억지 연민과 감정이입은 개입해도 된다는 말인가. 왜 저자는 당대 실록의 저자라도 된 것 같은 포지션을 잡고 있는 것일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식의 괴상한 감정이입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전황이 나빠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관리들의 모습을 비장하게 그리는 것도 그런 것 중 하나다. 친절하게 마지막으로 지은 비장한 시구를 같이 실어준다. 역사서에서 자결을 미화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다. 

 

 척화파의 대표로 청에 포로로 끌려간 홍익한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가관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존망을 걸고 끝까지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한,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할 인물임에도 저자는 그를 심하게 미화시킨다. 끌려가는 내내 같은 조선인에게 박해를 당하고, 청의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청의 관계자도 감탄하는 것처럼 묘사해 놨다. 그렇게 거의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그리며 본문은 말한다.  

 

의롭고 강직한 사내 홍익한은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p. 209

 

 도대체 어디가 의롭고 강직하다고 봐야 하는 건가.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상은 전근대 조선의 유교 사상인 건가. 역사를 냉엄하게 해석하는 것은 책 후반부의 마지막 챕터, 그 얇은 부분에 맡겨 버리고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당대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 이런 걸 ‘만화화’라고 한다면 그건 만화에 대한 모욕이다. 만화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옛날 것을 그대로 전달해도 되는 핑계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병자호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해서 내용이 허약해도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감상주의, 싸구려 민족주의를 주입한 만화로 된 역사서. 어렸을 때 분명히 많이 본 스타일이다. 2018년에도 이런 책이 나온다는 게 정말 놀랍다. 마치 청이 중화를 지배했다고 깜짝 놀라는 조선 선비들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끝까지 명과의 의리를 지킨다고 관직에도 나가지 않고 연호도 청이 아닌 명의 것을 사용했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태도가 병자호란에서 조선의 무능함을 만들어 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책의 결론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책은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는, 본론과 결론이 정반대인 기괴한 역사만화다. 그 기괴함을 통해 병자호란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80~90년대 학습만화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건 척화파의 무능함과 다를 바가 없다. 부디 시대착오적인 만화 역사서는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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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같은 소리 하네 - 과학의 탈을 쓴 정치인들의 헛소리와 거짓말
데이브 레비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정치인들이 자기의 발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적 헛소리를 하곤 하는데, 명쾌한 과학적 사실로 그 헛소리를 조목조목 따지는 통쾌한 책이다. 미국 사례뿐이어서 아쉽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사례로 나왔으면 훨씬 더 통쾌했을 것 같다.  

 

 총 열두 가지 유형으로 헛소리를 분석하고, 각 유형마다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짚어 헛소리의 정체를 밝혀낸다. 미국인들이 이 책을 통해 얼마나 속 시원했을지 짐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은 덤이다. 

 

 우리나라 사례가 아니다 보니까 확 와닿는 사례는 별로 없다. 대신에 기후 온난화에 대한 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온난화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가 보다 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은 완전히 깨졌다. 지구 온난화가 ‘과학적인 논쟁 중에 있다’는 주장 자체가 헛소리였다. 온난화는 엄연한 증거가 있는 사실이다. 점점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수준이 아주 심각한 상태다.  

 책에서 이 부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자주, 자세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굉장히 많이 언급되는 이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 과학자들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말이다.  

 

2009년 후반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첫 10년 동안 미국의 최고 기온 기록은 최저 기록을 2.04:1의 비율로 앞질렀다. 최저 기온이 한 번 경신될 때마다(예를 들어 특정 해의 11월 12일이 이 지역 관측 사상 가장 추운 11월 12일인 경우) 최고 기온 기록이 두 번 깨졌다는 뜻이다. 이 비율은 1990년대(1.36:1)와 1980년대(1.14:1)보다 높다. 

좀 더 최근 데이터를 봐도 이런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2010~2015년까지 최고 기온 기록은 여전히 최저 기온 기록을 2:1 정도로 앞서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율은 곧 급등할 가능성이 높다. p. 49

 

 우리나라는 온난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확실히 구체적으로 뭔가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것 같다. (‘북극곰이 살 곳이 없어요’ 라거나 ‘지구가 아파요’ 정도의 인정주의적 수준에 머문다.) 

 특히나 정치인들이 뭔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정치인과 과학은 잘 맞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진다. 정치인들은 대부분 법조인 출신이 많다. 아니면 인문학 계열의 학자 출신이거나. 아무래도 문인들을 중요하게 인용하던 과거 시대의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고 미국 정치인들이 과학적 소양이 높다는 말은 아니다. 책을 읽어보면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다만 미국 정치인들은 과학적 근거를 자기 논거로 자주 사용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과학적인 언급 자체가 거의 없다. 

 책에서 지적하는 미국 정치인들의 나쁜 입버릇은 ‘내가 과학자는 아니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이다. 과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나중에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무책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정치인들이 과학과 과학자, 전문가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은근히 분노를 나타낸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유시민 작가가 비트코인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논란이 됐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것은 과학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존경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소리다. 혹은 토론 문화가 어느 정도 익숙한 문화권에서나 하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아예 그것조차 없는데, 나는 그 이유가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한 존중과 존경심이 없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토론과 연설 자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예 언급조차 안 하는 것은 이 책에 소개된 열두 가지 유형 외에 ‘고의적인 침묵’이라는 유형에 속한다. 저자가 마지막에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유형이다.  

 

중요한 사안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 사안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꼴이 된다.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문제를 왜 국민이 걱정해야 하는가? p. 249

 

 우리나라는 도리어 정치인들이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 과학적 논쟁이 더 빈번히 일어난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수많은 ‘팩트’들을 우리는 모두 보지 않았던가. 세월호 때는 심지어 비밀을 모두 파헤쳤다는 아마추어 영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인터넷에는 자칭 전문가들이 넘쳐나고 우리는 가짜·조작 뉴스와 음모론의 범람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내는 걸 쉽게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개인은 과학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면 바로 그런 점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열두 번째 유형인 ‘순수한 날조’에 대해 맺는말을 살펴보자. 

 

(…) 터무니 없는 얘기가 들리면 일단은 의심해봐야 한다. 그리고 백신 같은 쟁점을 둘러싼 꽤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들리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출처를 찾아 스스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그걸 바라지 않겠지만,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도록 노력하자. p. 247

 

 책날개의 저자 소개에서도 그렇고, 서두에 저자가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과학적으로 검증을 하되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가능한가 싶기도 했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과학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그 주장이 옳은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어쩌면 우리가 과학적 사고를 잘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인 지도 모르겠다. 진영 논리 앞에서 과학은 필요에 의해 언제든 가져다 끼워 맞춰진다. 저자가 가장 경계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국민이 정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 끊임없는 감시에 필요한 덕목 중에 과학이 추가된 기분이다. 국민은 정말 피곤한 위치다. 탄핵시키랴, 부패하지 못하게 감시하랴, 거짓말인지 아닌지 과학 공부하랴. 어쩌겠는가.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저자는 서두에 트럼프의 언사들을 사례에서 제외한 이유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트럼프가 과학적 쟁점과 관련해 내놓은 발언들은 너무 뻔뻔하고 조잡한 데다 물리학·생물학·화학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하기 때문에,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쉽게 뒤집을 수 있다. p. 8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은 다양한 유형의 실수와 왜곡을 만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중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다. 과학에 대한 그의 실책은 치밀하지 않다. 그러니 그가 ‘물대포 쏘기’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자. 실책이 한꺼번에 수십, 수백, 수천 개씩 쏟아지면 하나하나 거짓말이나 오류를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다. 그게 설령 ‘지구는 평평하다’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p. 9

 

 한 마디로 ‘클라스가 다르다’는 말인데, 거기에 비해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얼마나 더 나은지 자신할 수가 없다. 미국은 그나마 나사(NASA)에 호감을 갖고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국민이 과반 수 이상이다. 우리는 ‘4대강 개발’이라는 최악의 개발을 밀어붙인 전력이 있는 나라 아니겠는가.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는 식의 헛소리가 먹히던 시절은 지났다. 과학적이지 않은 논거는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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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할 거예요, 어디서든
멍작가(강지명) 지음 / 북스토리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시작은 역시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이다.  

5년 차 회사 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오랫동안 미뤄온 자아실현에 대한 열망.  

그리고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 약간.  

20대 후반, 전체적으로 검토가 필요한 시간이 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작가는 저질러버린다. 

 

언젠가 한 외국인 친구가 불쑥 나에게 던진 말이 기억난다. 


“그거 알아? 한국 유학생들은 

이십 대 후반이랑 삼십 대 학생이 유독 많은 거.  

내 생각인데 말이야. 한국에서는 어렸을 땐 명문대 입학, 

이십 대 때는 대기업 취업 같은  

똑같은 목표만 보고 공부하다가  

막상 회사에 들어가면 그제야 뒤늦게 

사춘기를 겪게 되는 거 아닐까?” p. 18

 

그렇게 시작된 외국생활. 새로운 장소에 대한 흥분은 분명 달콤하고 짜릿하지만 그것은 또한 쉽게 익숙함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던 두근대는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순간마다 벅차오르던 감정들을 비워내기 시작하고 서서히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연애 초기에 그렇게도 뜨겁던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게 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p. 97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곳을 바라보게 되면서, 멍작가는 반대로 자기 모습을 보게 된다. 

회사 다닐 때는 잘 모르던 자기 자신을 일을 그만두고야 발견하듯이, 

해외에 나가고 나서야 그때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한국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특히나 외국에서 회상하는 한국 회사의 모습은 촌철살인이 빛난다. 불합리한 근무형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과 벌이는 신경전. 그중에서도 최고는 역시 회사를 그만두기 2주 전 벌어진 송별회 장면이다. 예기치 못하게 머리를 다친 멍작가에게 다음 날 팀장이 한 말은 회사 생활을 접기에 충분했다고 멍작가는 말한다. 

 

설마… 

이제 회사도 관두는 마당에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p. 63

 

외국이 더 이상 새롭지 않고, 한국 사회를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나자,  

작가의 결론은 의외의 종착지로 향한다. 어느 곳에도 나에게 완벽한 낙원이 없다는 것. 

 

외국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한국의 장점과 단점 모두가 나란히 같은 선상에 올라간다.  

작가는 한국 회사에서의 회식문화를 그리워하다가도, 독일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을 마음에 들어 한다. 한국에 들어오면 밤 문화와 익숙한 음식들, 배달 문화에 만족하면서도,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에 누워있을 때 중년 아저씨들의 시선에 불편해 한다. 

 

이 평등해진 외국과 국내의 조건들 속에서, 작가는 모든 곳에서 자국인처럼 살 수도 있고, 국내라고 해도 이방인처럼 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단절시킨다면 여기가 어디든지 간에 나는 영원한 이방인일 테니까. p. 247

 

그래서 책 전체에 걸친 저자의 가치 판단은 언제나 중립적이고 양립적이다. 오래 된 인간관계만이 결속력이 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오래 된 관계에 대한 미련까지 버리지는 못한다. (p. 196)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단점으로 꼽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성향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균형을 잡는다. (p. 225) 

 

외국 생활 중에 작가는 국내 회사에 있을 적 알았던 직장 선배를 떠올린다. 항상 예의 바르고 상대를 배려했던 사람. 너무 지나치다고 치부했던 그 사람의 가치가 해외에 나와서 보니 재평가 된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얼마 전 무슨 서류를 찾다가 한 편지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선배가 선물이라며 준 책 사이에 있던 하늘을 닮은 색상의 편지지. 

길지는 않지만 정성스레 한 자씩 꾹꾹 눌러쓴 그 선배의 편지였다. 


‘잘 할 거예요, 어디서든…….’ 


군더더기 없이 짧은 그 말 한마디가 

한 번씩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는지 

아마 그 선배는 모를 것이다. 

그 선배의 유난히 예의 바른 존댓말과 따뜻한 마음씨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p. 181

 

선배의 편지는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면을 드러낸다.  

 

‘잘 할 거예요, 어디서든…….’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 말은 자기에게 맞는 환경과 생활을 찾아 떠난 멍작가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저 편지의 말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좋은 사람과 환경만 있다면 말이죠’ 선배는 ‘나쁜 환경’ 속에서 선한 배려를 실천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 선배와 같았다면, 멍작가는 해외로 떠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꼭 해외에 나가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내에 사는 사람이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음 안 맞는 사람들과 마음에 들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데, 그나마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도 부족한 편이다. 이것이 20대 후반의 청년들을 계속해서 다른 환경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핵심적인 이유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자신의 저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일본의 불경기 속에서도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에 대해서 친한 친구들과 지내는 자기만의 작은 우주가 유지만 된다면 어찌됐든 젊은이들은 행복해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그마저도 용납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도 그것을 깨달았기에 외국으로 나갔던 것이고, 거기서 한국도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와 해외의 장단점을 오가던 작가는 결국 양자택일의 선택을 유예한다.  

 

외국에서 한국을 그리워하는 것과 한국에서 다시금 외국 생활을 동경하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p. 2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국내에 마련되어 있는 인프라(가족, 고향, 국적 등)는 그것대로 가치가 있고 유리한 면이 있다. 하지만 독일이라는 또 다른 삶의 터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그만큼 많다. 그래서 둘을 오가면서 장점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칙이다. 일종의 편법이고 나쁘게 말하면 꼼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될 건 또 뭔가? 어디에도 나를 위한 완벽한 장소가 없다면 모든 장소의 장점만을 취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택지 아닌가. 우리 모두가 항상 꿈꾸는 게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을 우리는 질투에 못 이겨 손가락질 하고 욕하지 않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재촉하면서. 

 

작가가 해외로 나선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미뤄뒀던 꿈을 위해서’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내와 해외 사이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그 장점들만을 취하려고 했듯이, 작가는 자기만의 신념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은 절대적이다. 때로는 숨통을 막히게 하고 심하게는 자살로 내몰 정도다. 하지만 해외에서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크나 큰 이득이다. 그렇다. 진정한 자유다.  

 

“사람들이 너한테 뭐 하냐고 물어보면 처음엔 적응이 안 될 수도 있어. 아마도 너도 모르게 넌 전에 일하던 데가 어디고 거기서 뭘 했는지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을지도 몰라. 첨엔 나도 그랬으니까.”  p. 258

 

“근데 있잖아, 그렇게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지금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어쩌면 내 인생에서 다시 못 올지도 모를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자고.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을 옛날얘기 따윈 나중에 이력서에나 다시 늘어놓고 지금은 그 대신 한 번 더 마주한 사람의 눈을 마주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자고.” p. 259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황하는 존재, 이쪽과 저쪽 사이를 오가는 어리석은 존재로 그리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봤을 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기만을 위한 틈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발버둥치는 투사에 가깝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욕하고 그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자기 불안감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거창한 속뜻은 없다는 듯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놨을 뿐이지만, 그 장난스러운 그림과 글 속에서 그의 처절한 투쟁이 느껴진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위해, 자기만의 작은 틈을 위해 투쟁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것이 꼭 회사를 때려치우고, 해외로 넘어가서 외국어를 배우고, 예술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멍작가는 자기가 시도했던 자기의 방법을 풀어놓았다. 당신만의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듣고 싶다.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다.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반드시 꼭 뭔가 이뤄야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이야기를 온전히 했다면,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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