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여우 길들이기
리 앨런 듀가킨.류드밀라 트루트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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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은 어쩌다 가축이 되었을까?  

 개는 거의 최초로 가축이 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개는 늑대와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을 텐데, 개는 어떻게 늑대와 다르게 가축이 되었는가. 그 차이는 뭘까. 그 차이에 가축화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구(舊) 소련 전역에서 (모피 생산의 목적으로) 사육되던 은여우는 같은 갯과 동물로서 이 과정의 유전적 성질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은여우의 가축화를 시도하면서 동물 가축화의 비밀을 밝혀보자는 것이 이 실험의 목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과 몇 년 만에 가축으로의 가능성을 내보이더니 30년도 되지 않아 실질적인 가축화에 성공한다. 지금은 몇몇 가정에 분양까지 한 상태다. 

 

 유전학자인 드미트리 벨랴예프의 ‘대담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그의 지도하에 마찬가지로 유전학자인 류드밀라 트루트에 의해 실질적으로 실행된다. 냉전 시대 초반에 시작된 실험은 탈냉전을 거쳐 21세기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60여 년의 긴 시간이지만 유전학적으로는 찰나도 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이다. 

 

 술술 읽히는 편은 아니지만 대중 과학서적으로써 적당한 수준을 지키면서도 통찰력을 선사하는 좋은 책이다. 

 

 우선 실험의 아이디어 자체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처음부터 아주 복잡한 실험 방식을 실행하는 게 아니라,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시작을 해서 점점 어려운 방식들이 적용된다. 이는 이 실험이 과학기술(특히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실험이 계속될수록 유전학은 세계적으로 급격히 발전하고, 그것은 다시 여우 실험에 적용된다. 유전학의 발전 과정을 쭉 훑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실험 자체가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된다. 물론 연구자들과 작업자들의 오랜 인내와 시행착오가 있었겠지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확실한 결과가 나왔고, 거의 처음에 예상했던 방향대로 결과가 순조롭게 나오면서 차곡차곡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옛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가 크게 한몫했는데, 실험 초반에는 소련 과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사이비 과학자’ 트로핌 리센코 때문에 실험의 본래 목적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는 시작될 수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리센코의 몰락과 함께 대규모 물량이 투입된다. 


 여우를 키울 농장을 구하거나, 부지를 정해 아예 농장을 만들어 버린다던지, 실험용 집이 필요하면 새로 짓는다던지, 많은 수의 여우를 안정적으로 먹이고 키우는 일, 수많은 작업자를 고용하는 일, 그리고 이렇게 몇 십 년짜리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진행되게끔 뒷받침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냉전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미국과의 경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상상해 보게 된다. 하긴 그러니까 우주선까지 쏘아 올린 거겠지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이 끝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다) 

 

 실험 과정은 대단히 흥미롭다. 유달리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야생 여우들을 선별해서 짝짓기를 거듭하면, 불과 몇 대만에 아주 온순한 가축에 근접한 여우들이 탄생한다. 그들은 인간을 친근하게 대하며, 나중에 가서는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새끼 여우에 대한 묘사와 그 새끼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애정 때문에 실험 과정은 의외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무엇보다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판타지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동물을 좋아한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번쯤 동물의 새끼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새끼고 성체고를 떠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동물들의 외형에 매료되곤 한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고, 손으로 만지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야생의 동물들과 ‘화해하는’ 장면을 자주 꿈꾸곤 한다.  


 야생은 오랜 시간 동안 인간에게 극복의 대상이자, 정복해야 할 힘겨운 ‘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야생동물과 인간이 친근함을 유지하는 장면은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킨다. 각종 SNS에는 그런 야생 동물들과의 화해, 일종의 낙원을 재연하는 듯한 동영상으로 넘쳐난다. 

(알래스카 회색 곰과 공생하고자 했던 남자가 결국 그것에 실패하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 맨>(2005)이 떠오르기도 하고, 공룡과 교감하고자 하는 ‘공룡 판타지’ <쥬라기 공원> 시리즈도 떠오르는데, <쥬라기 월드>(2015)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랩터와 교감하고 훈련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야생 여우가 단계를 거듭할수록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과학적인 표현은 아니다) 조금씩 인간의 애정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런 본능적인 감동이,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더 이상 야생은 적이 아니고 친구다. 그리고 인간과 개의 첫 만남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면 괜히 뭉클해지는 것이다. 처음 무리를 이탈해서 인간에게 접근하는 유독 온순한 늑대와 동물을 유독 좋아하던 어떤 인간의 만남. 

 

약 2만 6천 년 전에 사자, 검은 표범, 곰 등의 사나운 포식자들이 그려진 정교한 벽화로 유명한 이 동굴에는 바닥에 열 살로 추정되는 한 소년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혔는데, 그 옆으로 줄곧 커다란 갯과 동물의 발자국이 따라다녔다. 발자국 모양을 보아 이 동물은 늑대보다 개에 더 가까웠다. 소년과 그 옆을 총총 걸음으로 충실하게 따라가는 원시 형태의 개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p. 154

 

 실험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실험을 주관하던 류드밀라는 여우와의 교감을 제외한 객관적 관찰만으로는 더 이상 정확한 실험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물의 가축화는 동물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적응한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동물에게 적응한 결과다. 가축화에서는 동물과 인간, 그 둘의 서로에 대한 애정을 빼고는 온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조언은 류드밀라가 잊지 않고 지침으로 삼는 구절이다. 

 

“길들인 것에는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인간과 가축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무리에서 온순함이 생존에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체 생활에 익숙한 늑대에게서 개라는 최초의 가축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험의 ‘대담한 아이디어’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인간 또한 가축화된 존재라는 가설을 세우기에 이른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가축화 시켰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계에 유리하다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가진 폭력성과 위협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인간은 더불어 살기 위해 온순함을 발달시켜온 대표적인 사회적인 동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온순함이 털 뭉치 같은 새끼 여우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게 만드는 우리의 본능 속에 숨어있다. 여기서 독자는 어떤 희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잊고 있던 본능을 가축, 반려동물들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왜 SNS에 동물 영상이 넘쳐나는지 알 것도 같다. 

 

 은여우 실험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험을 지도했던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병상에서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가 21세기 인류에 대해 그가 바라는 바를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 책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30여 년 후에야 나왔다) 

 

“친절해지십시오. 그리고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십시오. 모든 이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평화롭게 살고, 우리의 ‘형제들’─지구상에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전적으로 책임을 수행하십시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자연법칙을 연구하고 이 지식을 이용할 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p. 202

 

 너무도 당연하고 익히 들어온 이 말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은여우의 가축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길들여진 지 너무 오래됐기에 잊은 것들이 많아 보인다.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길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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