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병자호란 - 하 - 격변하는 동아시아, 길 잃은 조선 만화 병자호란
정재홍 지음, 한명기 원작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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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필자가 병자호란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원작인 한명기의 책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는 사실을 밝혀둬야 할 것 같다.) 

 

하권부터 읽었지만 병자호란의 전체 개요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쟁의 조짐부터 전쟁의 시작과 전쟁의 의미 정리까지 모두 하권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권의 목차를 보니 인조반정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작하고 있었다. 인조 정권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역시 상하권 모두 읽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만화다 보니까 술술 잘 읽히고, 이해도 쉽게 표현이 친절하다. 책의 기획에 부합하는 면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병자호란은 일어날 만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당대 조선은 정말 개판인 나라였다. 전쟁의 발단, 전개, 절정, 결말 모두 하나같이 암 유발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고, 고구마의 연속이었다.  

 왕과 조정 대신들이라는 사람들의 상황 대처가 굉장히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문제가 뭘까 골몰하던 중에 ‘환향녀’ 부분에 이르러서 뭔가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이른바 ‘환향녀’로 불리는,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성들이 있었는데, 문제는 기혼녀인 환향녀들이 이혼을 당하고 쫓겨날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진 여자에게 조상의 제사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다. (물론 미혼 여성들은 결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그야말로 병자호란이 야기한 부조리 중 최고의 부조리라고 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책에서는 계속 ‘여인’이라는 멸칭을 쓴다)  

 

 많은 속환녀들이 그 때문에 어렵게 고향에 돌아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당시 이혼을 죄악시했던 조선이기에, 이혼을 허락해 달라, 혹은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환향녀의 가족들 입장)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이에 최명길(등장인물 중에 거의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보이는 사람)이 환향녀를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왕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그 기록과 함께 실록은 다음과 같은 비평을 남겼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포로가 된 부녀자들은 비록 본의 아니게 끌려가긴 했으나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p. 266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한 유교 사상이 모든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대하는 조선인의 태도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유교적 관계 원리가 모든 인간관계를 비롯해 국가 간의 관계에까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명과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후에 청이 되는 후금은 조선과 '형과 아우'의 관계로 묶여 있었다. 군자가 임금을 배신하고, 형을 임금으로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보면 정말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위험천만한 생각이지만, 당시에 그런 사상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면, 청의 부상과 병자호란 자체는 세계관을 깨부수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인 것이다.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가 썩어 있었던 것은 맞다. 특히 인재 등용 부문에서 그걸 가장 실감할 수 있었다. 척화파는 세계관의 한계 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온갖 부정부패, 우스꽝스러운 영웅심, 이기주의, 임무 태만, 그냥 (관리가 될 수 없을 정도의) 어리석음 등, 어떻게 하나같이 그런 자들이 조정의 대신이고, 관리가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직과 등용제도가 하나같이 썩어 있지 않으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전쟁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당시에는 당시의 세계관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오늘날의 독자는 그것이 이해가 잘 안되어 오해할 수는 있다. 물론 그걸 이 책의 미흡한 설명 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상권을 읽어보지 않은 상황이라 지나친 감이 있다. 

 


(할줄 아는 게 우는 것 밖에 없는 인조)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책에는 유독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부분이 많다. 인조의 우는 것에 감정이입을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거나, 왕의 비참함에 비극적인 연민을 부여한다거나. 그런데 내용의 맥락 상, 그것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인조가 전쟁을 대비해 최선을 다하고,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그런 비극적 결말에 다다랐다면 충분히 그 감정에 동참할 수도 있겠다. 영화 <300>의 비장함 같은 것. 


 하지만 인조가 전쟁을 위해 한 일이 뭔가. 우유부단하게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시간만 끌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군사적 방비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도망을 부지런히 빨리 간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다가 도망갈 타이밍마저 놓쳐서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에 갇힌 것 아닌가. 갇혀서도 무능함이 빛을 발해서 제대로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이런 플롯이라면 오히려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과 탐관오리들이 벌을 받아서 통쾌해져야 할 판이다. 물론 역사서에서 그런 식의 감정은 개입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억지 연민과 감정이입은 개입해도 된다는 말인가. 왜 저자는 당대 실록의 저자라도 된 것 같은 포지션을 잡고 있는 것일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식의 괴상한 감정이입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전황이 나빠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관리들의 모습을 비장하게 그리는 것도 그런 것 중 하나다. 친절하게 마지막으로 지은 비장한 시구를 같이 실어준다. 역사서에서 자결을 미화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다. 

 

 척화파의 대표로 청에 포로로 끌려간 홍익한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가관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존망을 걸고 끝까지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한,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할 인물임에도 저자는 그를 심하게 미화시킨다. 끌려가는 내내 같은 조선인에게 박해를 당하고, 청의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청의 관계자도 감탄하는 것처럼 묘사해 놨다. 그렇게 거의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그리며 본문은 말한다.  

 

의롭고 강직한 사내 홍익한은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p. 209

 

 도대체 어디가 의롭고 강직하다고 봐야 하는 건가.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상은 전근대 조선의 유교 사상인 건가. 역사를 냉엄하게 해석하는 것은 책 후반부의 마지막 챕터, 그 얇은 부분에 맡겨 버리고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당대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 이런 걸 ‘만화화’라고 한다면 그건 만화에 대한 모욕이다. 만화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옛날 것을 그대로 전달해도 되는 핑계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병자호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해서 내용이 허약해도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감상주의, 싸구려 민족주의를 주입한 만화로 된 역사서. 어렸을 때 분명히 많이 본 스타일이다. 2018년에도 이런 책이 나온다는 게 정말 놀랍다. 마치 청이 중화를 지배했다고 깜짝 놀라는 조선 선비들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끝까지 명과의 의리를 지킨다고 관직에도 나가지 않고 연호도 청이 아닌 명의 것을 사용했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태도가 병자호란에서 조선의 무능함을 만들어 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책의 결론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책은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는, 본론과 결론이 정반대인 기괴한 역사만화다. 그 기괴함을 통해 병자호란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80~90년대 학습만화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건 척화파의 무능함과 다를 바가 없다. 부디 시대착오적인 만화 역사서는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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