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투 퀸 1
무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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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풍의 황실을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하지만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배경의 리얼리티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얼핏 왕좌의 게임 같은 판타지 소설의 갈등 구조도 떠오르지만, 훨씬 치정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퀸’이 되는 이야기가 핵심이 되는데, ‘황제’나 ‘황후’ 같은 단어들과 ‘퀸’이라는 단어가 아무런 위화감 없이 함께 나오고 있다. 판타지 소설다운 분위기라고 볼 수 있겠다. 더군다나 퀸(Queen)은 여왕이나 왕비를 뜻하는 단어일 뿐, 황후를 뜻하지 않기도 하다. (황후는 ‘Empress’) 하지만 판타지이기도 하고, 로맨스가 핵심인 가볍게 즐기는 이야기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설정이나 시대 배경 같은 것은 최소한의 수준만 유지돼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무래도 계급 호칭들이 한자어로 표기되고 있고, 말투마저 조선시대 궁에서 쓴다고 해도 어색할 것 없는 말투다. 그러다 보니까 등장인물의 이름만 아니라면 동양풍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한 느낌인데, 이때 중간중간 서구풍 명칭들이 등장하면서 분위기 조성을 돕고 있기도 하다. 로맨스 소설계에 한해서 서양풍과 동양풍은 다분히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다. 

 

 우선 치정물답게 정적을 향한 독자의 분노를 끌어내는 방식이 확고하다고 느껴졌다. 독자의 강력한 감정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분명 큰 무기다. 단지 후반부로 가면서 주인공과 조력자들이 도덕적으로 선을 넘게 되면서 선악 구분이 조금 희석되기도 한다. 이후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악녀에게 연민을 가질 여지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 여지도 있어 보인다. 단순한 구도를 넘어서서 캐릭터가 좀 더 복잡해지면 이야기는 더 풍성해질지는 모르지만 단순한 쾌감을 주기는 힘들어진다. 앞으로 작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독자가 작품에 원하는 바가 분명한 장르물이다 보니까 클리셰들이 여러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죽일 듯이 싫어하는 남녀 사이가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가까워지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상당히 불가항력적으로 이뤄진다. 마음의 변화라는 것은, 특히나 연정의 마음이라는 것이 늘 그런 느닷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좀 더 다양한 변주를 주지 않는 면이 아쉬웠다.  

 

 황제와 황후라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빈번히 혼자 있는 상태가 된다. 여주인공이 혼자 있는 상태가 되면 곧 황제가 나타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면 어김없이 뒤이어 비가 내린다.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독자가 이 장르에 원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 딱히 불만은 없다. 

 

 작품의 핵심과도 같은 문장, “언니 대신 내가 퀸이 될게.”를 처음 봤을 때는, 언니라는 라이벌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여동생의 욕망으로 읽혔다. 어찌 보면 심술 맞아 보이는 그 욕망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선량하게 포장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그런 심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소설에서 결혼은, 제아무리 황후가 되는 결혼이라고 해도 불행의 가능성을 내포한 독이 든 성배다. 그 독은 남편의 또 다른 여자를 뜻한다. 곧 남편의 바람이라는 독이 든 성배인 것이다.  

 

 그리고 먼저 결혼한 언니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동생이 있다. 착하기만 하고 요령 없는 언니는, 남자의 바람에 의해(악녀에 의해) 처참하게 실패한 결혼 생활을 한다. 그런 언니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던 동생은,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언니보다는 영악하고 모진 면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언니 대신 겪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시간을 되돌려 ‘언니 대신 퀸이 되는’ 이야기 밑에 흐르는 감정이다. 

 

 언니 대신 결혼을 한 동생은 정적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그 분노는 자신과 언니 이중의 것이기에 훨씬 강렬하다. 하지만 그 분노에 쉽게 꺾이는 악녀라면 재미가 없다. 악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 위험한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못하고 계속된다. 아마 영원히 안 끝날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인 페트리지아는 든든한 여성 공동체를 구성한다. 자신의 언니 페트로닐라, 호위 무사인 라파엘라, 시녀인 미르야. 이들의 공동체는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평등하다. 황제로 대표되는 남성적 공동체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이다. 황제는 함부로 모두에게 반말을 한다. 그런 권위주의는 황제 본인에게도 해롭다.(또 다른 클리셰인 남자 주인공의 ‘상처받은 여린 마음’은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페트리지아의 여성 공동체가 상대적으로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사실 <레이디 투 퀸>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서는, ‘왕비’가 아닌 ‘여왕’이 최종 목적지이길 기대했다. 물론 1권의 내용만으로 결론 내리기 힘들겠지만, 그런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인 페트리지아가 황제를 대신한 섭정을 통해 느끼는 것은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 황후는 힘이 없다’라는, 다소 김 빠지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다시 ‘남편의 여자’라는 자리로 돌아와 ‘남편의 인정과 사랑’을 받아 ‘남편의 권력’을 대리하는 치정 싸움에 집중하게 된다. 권위주의에 대한 염증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직접 주어진 권위를 거부하고 남자를 통해 권위를 얻으려 하는 건 우스꽝스럽다.

 

 이것을 로맨스 소설 장르 자체의 한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변하고, 주 독자층인 여성들의 욕망이 변화한다면, 자연스레 장르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장르의 문제는 곧 독자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그런 고민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여성 공동체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도 그렇고, 사냥대회에 나서는 활동적인 여주인공의 모습, 남자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적극성 등이 그렇다. 앞으로는 더 많이 변하게 될 거라고 본다.

 

 인터넷에 연재되는 웹소설을 책으로 엮어냈음에도 한 권의 이야기로서 기승전결의 완성도를 잘 갖추고 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이르면 숨겨진 비밀들을 암시하는 등, 다음 편을 궁금하게 만드는 미덕도 갖추고 있다. 과연 페트리지아가 황후의 자리 이상을 노리게 될지, 이 이야기가 단순한 여자들의 치정 싸움에 머물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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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안 사회 - 제국과 식민지의 번안이 만든 근대의 제도, 일상, 문화
백욱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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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안의 과정과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는 재미가 상당한 책이다. 물론 현재의 우리와 연결고리가 분명할수록 더 재밌고, 번안의 결과가 우스꽝스러울수록 더 재밌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번안 사회』라는 제목과 ‘제국과 식민지를 거쳐 번안된 근대와 서양’이라는 주제는 단번에 내 시선을 붙들었다. 근대와 근대화에 대한 책은 꽤 읽어봤지만, ‘번안’이라는 키워드는 뭔가 막힌 곳을 뚫어주는 느낌이었다.  

 

 80년대 변두리 서울에서 자란 나는 나를 둘러싼 것들에서 괴이한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레스토랑은 레스토랑이 아니었고, 햄버거는 햄버거가 아니었고, 핫도그는 핫도그가 아니었다. 조잡한 그림으로 덧그려진 불법복제 만화는 명백히 뭔가를 감추려고 했고, 캐릭터 상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엉성했다. 매스컴에서는 모두들 국산 제품이 좋다고 주장했지만, 실생활에서 국산을 구입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들뿐이었고, 뭔가 다른 것을 찾던 나는 결국 대안을 찾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예 모든 정보가 통제된 상태였다면 모르겠지만, TV에선 AFKN이나 더빙판 외화, 헐리우드 영화가 판을 쳤다. 팝송도 지금과는 다르게 가요의 일부처럼 인기가 많았다. 나는 모든 것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상품에 한정해서라면, 분명히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  

 

 변두리긴 하지만 서울에서 자란 나에 비해 지방, 그것도 도시가 아닌 곳에서 자란 사람들의 경우는 훨씬 심했을 것이다. 어렸을 적에 시골 친척 집에 놀러 갔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내 또래 사촌들이 즐겨보는 만화책을 발견하고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들 자랑스럽게 그 만화책을 <드래곤볼>이라고 주장했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드래곤볼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큐 점프>에 정식 연재 중인 ‘별책부록’ <드래곤볼>을 모으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만화는 <타이의 대모험>(<드래곤 퀘스트> 시리즈 중 하나)이라는 만화의 해적판이었다.  

 

 이런 혼란을 일시에 정리해준 것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990년에는 번안의 영역이 점차 별 볼 일 없어진다. 번안을 거부하는 세대가 등장하고, 번안이 무력해진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소득 증대, 여행 자유화와 인터넷의 대중화를 통해 말 그대로 ‘지구촌’ 시대가 전개된다. 이제 근대적인 것은 일본적인 것, 서구적인 것, 미국적인 것을 넘어 ‘전 지구적’인 것이 되었다. (…) 이제 더빙이 필요 없는 자막의 시대가 되었다. p. 168-169

 

 비로소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무엇이 번안판이고 무엇이 원본인지를 구분할 정보처를 확보한 것이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뭐든 그 근원이 무엇인지 파헤치고자 했다. 진짜가 뭔지 알고 싶었다. 왜곡된 형태가 아니라 원본 그대로의 본래 모습을 말이다. 나는 우뢰매의 디자인이 일본 애니메이션 <닌자전사 토비카게>에서 표절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후레쉬맨>의 아류로 알고 있던 <바이오맨>이 실은 후레쉬맨보다 먼저 나온 작품임을 알게 됐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시기를 거치게 된 것일까. 왜 <슬램덩크>의 ‘쇼호쿠’는 ‘북산’이 되었을까. 왜 우리는 한일전에서 <마징가Z>의 주제가를 응원곡으로 부르게 된 것일까. 

 

 저자는 이런 대한민국의 특징을 ‘번안 사회’로 명명하고, 그 근원을 식민지 시대로까지 거슬러 가서 파헤친다.  

 

서양식과 원래 우리 것 사이에 일본식(왜식, 화식)이 하나 더 끼어든다. 일본도 서양의 힘으로 개항된 반식민지 체제를 경험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흉내 내고, 베끼고, 자신의 것과 어떤 식으로든 결합시켰다. 일본은 그대로 베끼기도 하고 상황에 맞게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차용하기도 하면서 번안의 다양한 방식을 활용했다. 식민지 조선은 그런 일본을 다시 베껴 냈다. p. 271-272


 일본이 곧 근대였고, 일본이 건네준 서구 문물이 곧 원본이나 마찬가지였던 시대에 우리는 원본을 접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을 통해 한번 왜곡된 근대를 우리 식으로 다시 한 번 왜곡시킨다.


 

모방과 번안은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모방을 또 모방하면 원본의 윤곽이 흐려지고 알맹이가 빠져나가면서 원본이 자리 잡았던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맥락이 사라진다. 그래서 모방된 문화를 다시 모방하면 원본과 다른 ‘이상한 번안물’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탈맥락화가 번안의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장점으로 작동할 수도 있겠으나, 번안은 대체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타인의 모방물을 모방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맥락화의 장단점은 결국 번안물을 만들고 수용하는 주체의 취향과 행위, 문화적 역량에 따라 판가름 난다. p. 301

 

 식민시대 당시 그나마 원본을 직접적으로 수용해 우리 식으로 번안한 것은 기독교였다. 원본이라고 볼 수 있는 외국인 선교사가 직접 와서 전달했고, 번안 작업에 조선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당대 성경과 찬송가의 번안 수준은 상당히 높았고 이미 초기에 그 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전통문화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이기 때문에 새롭게 들어온 근대문화(그나마 이중으로 왜곡된 근대문화)는 전통문화와 무분별하게 섞이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고, 그 모습은 필히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잘못된 절충과 융합은 꼴이 말이 아니다. 맥락에 맞지 않아 모양새가 안 나오는 조잡한 흉내, 설익은 모방을 ‘키치’라고 부른다. ‘짬뽕’이나 ‘잡탕’이라는 일상용어도 막무가내 혼합과 융합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단어다. 서양의 산물과 동양의 문물, 근대의 산물과 전통의 유물이 만나고 충돌할 때 각각이 어떤 위치에 서는가에 따라 그 ‘꼴’이 만들어진다. 그 꼴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할 땐 ‘꼴불견’이 된다. p. 212

 

 폐쇄적인 사회는 저질 번안을 유지시키는데 한몫한다. 중국에는 정식으로 판권을 구입해 제작한 중국판 ‘프로듀스101’이 존재하지만, 아류 프로그램도 함께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그것의 원본이 일본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중국의 폐쇄적인 통제는 저질 번안을 유지시키긴 하지만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군사독재 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제대로 된 번안의 시기를 놓치고 만다. 경제부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본제국주의를 번안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베트남 파병이 소개된다. 

 

식민지 시대의 외부로부터 강요된 모방은 신문물의 힘에 압도된 대중의 수동적 모방과 수용을 낳았다. 1960년대의 외부적 강제자 없이 진행된 자발적 모방은 자신이 모방한 대상을 철저하게 감추었다. 박정희는 식민지 조선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1960년대 한국에 적용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방을 감추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베트남 파병이 식민지 시대 징용·징병제의 또 다른 모방이자 변형이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p. 116

 

 하지만 군사정부의 서슬 퍼런 통제에도 원본에 대한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참전을 통해서라도 외국에 나간다는 경험은 중요하다. 그만큼 원본을 접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파견된 장병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한복판에서 고국에 없는 풍요를 접하게 된다. 한국군 장병들에게 베트남전은 외국 문물을 직접 접하고 습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p. 120

 

 이미 세계화를 지나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했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정보는 왜곡 없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아직 번안의 수준을 뛰어넘어 원본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문화적인 식민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직 근대를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번안의 단계를 뛰어넘어 원본이 되려는 시도들도 이뤄지고 있지만 지름길은 없다. 그동안 청산하지 못한 번안들을 차근차근 다시 살펴봐야할 때다.

 

번안 기간을 줄일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에 답하기는 어렵다. 배경이 형태보다 빨리 변하면 쓸모없는 흉물이 남고, 형태가 배경보다 빨리 변하면 너무 전위적인 생산물이 된다. p. 103

 

 저질 번안이 용인되는 시기는 끔찍한 ‘짝퉁’의 시대였다. 자신이 짝퉁인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배나 더 비참한 시기다. 사실 짝퉁이란 단어는 ‘원본’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책에도 언급되지만, 과거에는 ‘나이롱’이라는 말이 쓰였다. 원본이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원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우리는 원본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원본을 갈구해 왔다. 한 번도 짝퉁이 되기를 원했던 적은 없다. 그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열망이 우리를 분명히 원본의 자리로 올려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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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2018-08-31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보관함에 넣어 봅니다.

Bookbuff 2018-08-31 22:08   좋아요 0 | URL
번안이라는 키워드로 새롭게 근대화를 바라볼 수 있었어요 ㅎ 감히, 조심스레 추천합니다^^
 
INTEGRITY NEW YORK
정인기 지음 / 지식과감성#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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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이 커서 첫인상은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큰 판형 덕분에 사진들이 크고 보기 좋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비교적으로 내용은 많이 빈약한 편이다. 뉴욕 여행을 다녀온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을 훑어보는 느낌? 

 

뉴욕에 가봤던 사람이라면 굉장히 시시하게 보지 않을까.  

그보다는 뉴욕에 관한 책을 읽어봤던 사람이라도 시시하게 볼 정도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뉴욕에 대한 책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관광 엽서 사진과 뻔한 내용으로는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 역시 장점은 큰 판형뿐인가. 두께가 얇아서 앉은 자리에서 읽힌다는 것도 장점이겠다. 

 

뉴욕에 대한 아주 대략적인(아주, 아주 대략적인) 개요로 시작한다. 큰 판형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지도 부분에도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 D.C.라면 세계의 수도는 뉴욕이다. 정치, 경제, 미디어, 음악, 뮤지컬, 문화, 패션, 박물관, 대학,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뉴욕은 세계의 수도가 되어 왔다. p. 7

 

흔히들 미국에서 가장 미국다운 도시라고 하면 시카고(Chicago)를 이야기한다. 반면 뉴욕은 미국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복합적으로 집합해 있다. 뉴욕은 세계의 수도인 것이다. p. 27

 

여러 가지 상징물들을 훑어보던 책은 갑자기 뉴욕의 수제버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뉴욕을 넘어 서부와 중부까지 아우르는 햄버거 가게 설명은 관광지 설명 보다 훨씬 디테일하다. 저자의 버거 사랑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사진들의 면면을 보다 보면 세계의 수도답게 서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전형적인 도시 모습이 종종 보인다. 도시 문제에 있어서도 비슷한 듯 보였다. 

 

지금은 뉴욕 패션과 쇼핑의 중심인 소호. 한때 신진 예술가나 여류작가들이 모였던 개성 넘치는 곳이었지만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 렌트비는 해가 거듭할수록 오르고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이 떠난 자리는 프랜차이즈들이 점령하여 버렸다. p. 61

 

세련된 도시는 어디나 비슷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뉴욕만의 멋이 느껴지는 곳은 역시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빌딩들이나, 소호 같은 역사와 전통이 느껴지는 장소들이었다.  


유홍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 보면 도시에서는 시간의 변화를 느끼기 힘들어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변하는 액정 화면을 들여다본다고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뉴욕 사진들을 보면서는, 그런 변화의 역할을 수많은 광고판들과 그래피티들이 맡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거대한 공원들도 그런 역할을 하겠지만 이 책에는 뉴욕의 공원 이야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도시가 어디서나 비슷하듯이, 도시인들도 어딜 가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서울에서 만난 지 3주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난 지인과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승현이의 공부와 일, 이번 학기 마치고 승현이가 가야할 군대 등 여러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 끝은 다이어트로 귀결되었다. 작년 여름 그리고, 얼마 전 겨울 서울에서 보았을 때에도 우리 대화의 주제는 다이어트였는데, 지구 반대편 뉴욕까지 와서도 동일하니 다이어트는 남녀노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중요한 주제임을 실감했다. p. 68

 

도시인의 고민거리도 비슷비슷할 것이다. 

뉴욕이 다른 점은 세계인이 모이는 도시라는 점이다. 확실히 ‘세계의 수도’라는 별명다웠다.  

 

브루클린 브리지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 중 하나이기 때문인지, 걷기에 딱 좋은 날씨 덕인지 다리는 양옆으로 브루클린으로 가는 사람들과 맨해튼으로 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물론, 주변에선 한국말도 들렸고, 중국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국어 등 영어 빼고 다 들리는 것 같았다. p. 71


하지만 저자는 그 세계의 관광객들과 자신을 구분 지으려고 한다.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대다가 저자는 문득 자신의 모습을 의아해 한다. 

 

마치 처음 온 사람처럼 사진을 찍어 대어 ‘나 뉴욕 자주 온 사람 맞나?’라고 자문할 정도였으니…. p. 71

 

자주 왔다는 이유로 자신을 뉴욕 시민에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 왔던 자주 왔던 관광객은 관광객일 수밖에 없고 외국인은 외국인일 뿐이다. ‘세계의 수도’라는 별명으로 은근히 시민의 지위를 얻어냈던 저자는 다른 외국 시민의 등장에 자신을 더 특별한 지위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뉴욕이란 도시가 주는 허영심이 엿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급작스럽게 한국인으로 회귀한다. 

 

국내 유명 쇼 프로그램 덕분인지 덤보에 다다르자 우리 주위에는 90%가 한국 사람이었으며, 대부분이 커플이거나 여자들이었기에 우리처럼 남자 둘이 온다면 이성 교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여겨지기에 딱 좋아 보였다. 그런 것을 느꼈는지 둘 다 너무 어색해했다. 문제는 순진한 두 청년은 쑥스러워서인지 서로의 사진만 찍은 후 주변의 ‘한국’ ‘여자’ ‘사람’에게 가서 사진을 요청하거나 찍어 주겠다는 말조차 걸지 않았다. ‘승현이는 정말 뉴욕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는 착실한 청년인 것 같다.’ 결국 승현이가 외국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해서 둘이 함께 간단한 사진을 남겼다. p. 74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깨닫게 되었다. 시컴시컴한 남자 청년 두 사람이 모이면 카페보다는 함께 걷는 것이 훨씬 덜 어색하다는 것을. p. 77


‘세계의 수도’ 어쩌고 하며 뉴욕 시민의 지위로 올라섰던, 그래서 특히나 현지 햄버거 맛집을 자랑스럽게 소개해주던 저자는 갑자기 전형적인 ‘시컴시컴한’ 한국 남자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이런 면이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세계의 수도라면 이런 극동아시아의 ‘시컴시컴한’ 남자들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는 원래 그런 곳이다. 그 나라의 국민이라면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곳.  

 

뉴욕은 특별한 곳이다. 전 세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개성 있는 곳이며 그곳에선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p. 77

 

9. 11 테러 당시 뉴욕에 있던 기억을 회상하던 저자는 다시 세계 시민으로 돌아와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은 뉴욕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에 가까운 감정이다. 아무도 추궁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뉴욕 시민을 자처하면서 갖게 되는 책임감이랄까. 

 

나 자신에게는 그때부터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아 온 물음이 있다. “나는 과연 그들이 아닌 내가 산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다행이다?”…“맞다.”, “다행이다.”, “감사하다.” 하지만 그러한 감사함 속에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든다. p. 93

 

그리고 그 시민의식은 미국의 가치를 지향한다. 그가 생각하는 미국의 가치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더 높고 숭고한’ 것이다.  

 

흔히 자본주의의 끝을 볼 수 있는 곳을 미국 뉴욕이라고 이야기한다. 세계 자본이 모이는 가장 과열된 도시 한복판인 로어 맨해튼에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은 단순히 이곳이 그라운드 제로이기 때문이 아닌 자본주의를 넘어선 더 높고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미국 사회의 윤리의식을 나타내어 준다고 생각한다. p. 96

 

마지막 9.11 테러 추모 건축물 부분에 이르러 저자는 거의 순수한 미국인, 혹은 뉴요커다. 마지막 당부를 읽다 보면 뉴욕을 ‘자주’ 가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뉴욕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곳에서 오래 살고 있는 사람 같다. 뉴욕에 대한 애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뉴요커들은 그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을까. 

 

부디 앞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건축물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짧게나마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가볍지 않은 축복을 기원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아울러 9/11 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의 가족들에게 소소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들의 이름은 이곳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모두의 마음 가운데 있다. 적어도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p. 96

 

책 내용 자체보다는 저자의 투명한 욕망이 드러나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 보면 뮤지션들이 쿠바에서 뉴욕으로 초청돼 공연을 하게 된다. 그중 한 명인 이브라힘 페러가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뉴욕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는다. 뉴요커들은 쿠바의 이국적임을 멋있게 생각해서 그를 초청했는데, 정작 이브라힘 페러는 뉴욕의 모습에 매료된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내가 진작에 이곳에 왔어야 했는데.’ 뉴욕은 확실히 그런 곳인 것 같다. 환상을 주고, 그 환상의 일부가 되고 싶게 만드는. ‘뉴요커’라는 단어에는 그런 환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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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나에게 친절하기로 했다 - 나를 아끼고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크리스토퍼 거머 지음, 서광 스님 외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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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표지를 보면 현대인, 특히 자존감 낮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문구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책을 펼쳐보면 일종의 불교적 명상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처음의 당혹감을 추스르고 내용에 집중하다 보면, 이해가 잘 안 가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라도 내가 이해를 제대로 했더라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은 마음이 든다. 

 

 책의 핵심은 자기연민과 마음챙김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자기연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나온다.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네이버 국어사전)

 

 하지만 이 책에서는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부정적 태도로 자신을 더 힘들게 하기보다, 자신의 상처와 상황에 대해 먼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와 일맥상통하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간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자기연민이란 수용의 한 형태다. 수용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을 가리킨다면, 자기연민은 그런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연민이란 고통스러워하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p. 56

 

 마음챙김이란 개념도 자기연민과 비슷한데, 좀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챙김이란 힘겨운 일을 겪을 때 우리를 몸에 안심하고 계속 머무르게 해주는 특별한 자각 상태다. 마음챙김은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생활방식이 될 수 있다. 마음챙김 상태에서는 불쾌한 경험으로부터 굳이 도망칠 필요가 없다. 불쾌한 경험 주위에 숨통을 틔워주는 작은 공간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p. 61

 

 얼핏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저자는 독자가 계속된 뜬구름 잡는 소리로 혹시라도 흥미를 잃고 포기할까봐 계속해서 다음 단원에 나오는 내용을 미리 예고한다. 자기연민이라는 원래 있던 개념을 먼저 내세우고, 그 이후에 마음챙김이란 낯선 용어를 내보이는 것도 비슷한 목적으로 생각된다. 워낙에 이해하기 쉽지 않고, 흥미를 잃어버리기 쉬운 탓이다. 

 

 내용과 관련된 과학적 실험 결과를 박스 안에 넣어서 사이사이에 배치하기도 한다.(과학의 권위를 빌려오는 느낌. 큰 도움은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 개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보다는 ‘무엇이 아닌지’를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개념들이 애초에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고 느껴졌다. 

 

 ‘마음챙김이 아닌 것’이라는 제목의 박스(p. 86)에는 6가지의 마음챙김이 ‘아닌 것의 예’가 등장한다. 

 마음챙김은, 느긋해지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아니다, 평범한 생활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비워내는 것이 아니다, 어렵지 않다,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6가지에 더해서 마음챙김은 현실도피도 아니고, 자포자기도 아니고, 맹목적 수용도 아니고, 체념이나 침체도 아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아닌 것’들이 마음챙김을 설명해주는 단서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가장 가까운 개념이 현실도피일 것 같은데,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는 점이 어렵다. 

 명상 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마치 외부에서 자신을 바라보듯’한 시점을 요구할 때가 많다. 마음챙김은 거의 그 정도 수준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서 일체의 집착 없이 객관적으로 그것을 ‘관조’하는 것 말이다. (이것조차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일반적으로 자기연민은,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태도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현대인이라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기 위해 자기연민부터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반대로 자기연민을 통해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그 목적성 자체에는 수긍이 간다. 객관성을 잃어버리면 문제를 파악조차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거기에 더해 자기를 몰아붙여서는 문제가 더욱 커질 뿐이라고 한다. 저자가 내세우는 공식은 이렇다. 

 

 아픔 × 저항 = 고통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보수적인 집권층이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태도 같아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아픔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원래 인생은 아픔이니까, 그것을 받아들이고 관조해라. 그러기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 

 

 모든 문제는 개인 수준의 정신승리로 해결 가능하다. 모든 것은 ‘오해’의 문제일 뿐, 객관적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될 수가 없다. 너무 순진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런 정신승리가 필요하려면 모든 방법을 다 강구했지만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하지만 도무지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가장 비슷한 개념이 ‘현실도피’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아픔에 대한 저항 없이 생명체는 생존할 수 있을까, 시민사회는 발전할 수 있을까. 

 

 가만히 보다 보면 이런 식의 치료법이 시행되는 곳은 미국의 대도시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도 힘든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고학력으로 단련된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거기에 생계의 문제가 아닌 마음속을 괴롭히는 문제 해결에 이런 고급(?) 치료를 받는다는 건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전통적인 정신과 치료나 종교 활동이 아니라 대안적인 명상을 치료법으로 선택하려면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정도의 잘난 사람들이라면 마음챙김의 태도를 불쾌한 집권층의 프로파간다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문제될 건 없다. 

 

 저자는 이것이 종교가 아니라고 했지만, 유사성을 들어 불교로 분류해 본다면, 대승불교 보다는 소승불교에 가까운 것 같다. 개인적인 수행이 좀 더 강조되는. 그래서 책은 개념 정의보다는 체험 자체를 요구하고 있다. 명상을 함께 하면서 읽어 내려가야 하는 일종의 가이드북인 것이다.  

 

마음챙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체험해봐야 한다. 말로는 마음챙김을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 마음챙김의 순간이란, 말보다 앞서 경험하게 되는 일종의 자각이다. p. 61-62

 

 종교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 정도라면 거의 신흥종교에 필적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종교라고 말하지 않는 종교라고나 할까. 

 

 하지만 확실히 소승불교는 책으로 배우기 힘들 수밖에 없다. 명상 방법을 글로 읽으면서 감정이입을 하다보면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다. 아마 절이었다면 죽비로 한 대 맞았을 것이다.  

 

 불교적인 배경지식이 있고, 명상을 적극적으로 삶에 적용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추천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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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ta 2019-02-21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비판적인 도서 평가이네요. 혹시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책은 현실도피, 경제력, 신흥종교 등과는 전혀 무관한 책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한번 꼬이고, 그렇게 번역된 글을 독자가 읽는 과정에서 다시 곡해가 일어난 듯합니다. 저자와 역자, 독자가 직접 만나 오해를 풀었으면 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어렵겠지요. 번역의 문제라고 해서 원서로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하여튼 제가 아는 한에서는, 이 책은 명확하지 않은 개념을 공연히 어렵게 꼬아서 만든 책은 결코 아닙니다(그럴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경제력 있는 지식 계급의 한가한 치료 활동도 절대 아니고요. 적절한 번역과 올바른 독해는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국내 저자라면 모셔다 놓고 오해를 풀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서광 스님을 위주로 하는, 거머 박사의 Mindful Self-compassion(MSC) 모임에 실제 나가보시면 이러한 오해는 어느 정도 풀리실 거라 생각합니다. 주저리 주저리 제가 아는 말만 늘어놓았네요, 죄송합니다.

Bookbuff 2019-02-22 00:47   좋아요 0 | URL
안타까움이 담뿍 묻어나는 댓글 잘 봤습니다 ㅎㅎ 그런데 ‘모임에 실제 나가보시면’ 오해가 풀릴 거라는 말씀은 다시 포교용이라는 생각이.. ㅠㅠ 어떤 종류의 종교이든 그 종교의 ‘도’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죠 책 한 권으로 이해하기를 바란 저의 욕심이 문제라면 문제 같습니다^^
 
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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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가 고백하는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나’.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에 대한 거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주제에 비해 제목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대문호답게 결론부터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겪어왔던 사고와 감정의 과정 전체를 처음부터 기승전결을 갖춰 설명합니다. 덕분에 그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독자도 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독자는 톨스토이가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느끼게 되거든요. 


 동어 반복이 많은 데도 워낙에 글을 잘 쓰다 보니까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게 잘 읽힙니다. 내용 자체도 결국에는 ‘돌아온 탕자’같은 단순한 이야기지만 막상 읽다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게 바로 ‘문학적인 힘’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책을 단순한 기독교 서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한 가지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톨스토이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고뇌이기 때문입니다.  

 

오십의 나이에 나를 자살 직전으로 몰고 갔던 나의 의문은 우매한 아이에서 지극히 지혜로운 나이 많은 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고,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람이라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지 않고는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의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이나 내일 하게 될 일의 결국은 무엇인가? 내 인생 전체의 결국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왜 나는 어떤 것을 원하거나 행하는 것인가?” 또한 이 질문은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 속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드시 내게 찾아올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p. 38-39


 물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지는 않죠. 하지만 톨스토이의 경우는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중차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의미를 잃은 삶을 끝내지도,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어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누구보다 진실한 실천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도무지 실재 삶과 이상의 괴리를 견딜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탐구하게 됩니다. 그는 오히려 이런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이상하게 여깁니다. 

 

다만 내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진리가 아주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을 것인데, 내가 그런 진리를 왜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질병과 죽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내게 닥쳐올 것이고(아니, 그런 것들은 이미 닥쳐왔다), 부패로 인한 악취와 구더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내가 한 일들은 그것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잊혀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분명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내게 정말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p. 31-32

 톨스토이는 먼저 학문에 매달립니다. 크게 실험 학문과 추상 학문으로 나눠서 파고들지만, 곧 전혀 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다음으로 매달린 것은 역사적으로 지혜롭다고 추앙받는 성현들.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솔로몬, 석가모니로 대표되는 이들에게서도 해답을 얻지 못한 톨스토이는 결국 (넓은 의미의) 기독교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해왔던 이성적 지식 외에도, 인류 전체가 소유해 온 또다른 종류의 지식, 곧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 삶의 의미를 알게 해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앙이라는 지식이었습니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 75


 하지만 신앙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시작에 가까웠죠. 왜 미신에 가까운 예식들이 있는 것인가, 현란한 교리는 또 어떤가. 왜 신자들은 비신자들보다 더 세속적인가. 이성을 버리고 시작한 신앙이었지만, 계속해서 이성적인 의문들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체를 통째로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신앙은 엄밀히 말하면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는 ‘톨스토이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지만, 그 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회의적인 기독교인. 

 

 그의 신앙에서 한 가지 도드라지는 것은 민중(혹은 노동계급)들에 대한 동경(?)입니다. 귀족 계층과 지식인층에 실망감이 컸던 그는 민중들을 상대적으로 순수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여깁니다. 확실히 무리가 있는 시각입니다. 귀족들 중에도 사이비 같은 종교인들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다수 민중들 중에도 사이비는 있을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비신도가 많을 수도 있고요. 톨스토이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그를 엘리트적이고 귀족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정도라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를 나태와 향락과 삶에 대한 불만족으로 허비하고 있었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갔지만 부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삶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보았습니다. p. 85


 제가 생각하는 신앙은 성도 각자의 성향에 맞춤형으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런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 책에 드러나는 신앙은 톨스토이의 경우에 가장 강한 설득력을 가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속에서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겠지요. 맥락은 다르지만 적절한 문구가 눈에 띕니다.


 

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제기했던 의문, 그리고 삶은 악이라고 했던 나의 대답도 지극히 옳은 것이었지만, 단 한 가지 잘못된 것은 오직 내 자신의 삶에만 해당되는 그 대답을 인간의 삶 전체로 확대해서 적용한 것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p. 87-88

 

 톨스토이는 노동 계급에 대한 지향을 끝까지 밀어붙이다 오히려 그들을 모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인 순종을 노동 계급의 순종으로 비유하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축처럼 여기는 단순하고 무식한 노동자들은 주인을 비난하지 않고 주인이 그들에게 시키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주인의 뜻을 이룹니다. 그러나 지혜롭다고 하는 우리는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주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함께 둘러앉아서 “우리가 왜 손잡이를 조작하고 이 쓸데없고 어리석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토론하고 숙고를 거듭한 후에, “주인은 어리석거나,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이 유일하게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인데, 우리가 알게 된 유일한 것은 우리의 삶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삶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p. 91

 

 앞서 제목에 비해 상당히 거창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했는데, 거창한 문제에 비해 결말이 시시한 편이어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종교에서 발견한 문제점과 의문들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고 끝을 맺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챕터의 맺음말입니다.

 

내게는 종교적 가르침들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었지만, 그 가르침들 속에는 거짓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조금도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밝혀내어서 둘을 구분해야 했습니다. (…) 어떠한 결론들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런 글이 가치가 있고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이 글의 후속편으로서 어딘가에서 출간될 것입니다. p. 120

 

 역시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모두 다루기에는 그의 고민의 폭과 깊이가 너무 넓고 깊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집요하게 인간 보편의 문제를 파고든 글을 우리에게 남겼다는 것만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의 고뇌의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떼어낼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학문이나 이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라는 것도요.


 고전의 역할은 그런 인간 보편의 고민의 과정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처음 밑바닥부터 다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전의 연장선상에서 고민해볼 수 있으니까요. 톨스토이가 고백록이라는 개인적인 글을 남긴 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미련한 절차를 다시 밟지 않게 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언제 어디서나 발견하는 그 유일한 해법은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아주 까마득하게 먼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해법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렵고 난해한 해법이어서, 우리가 그런 해법을 고안해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해법을 무심코 경솔하게 파괴해 버리고서는, 또다시 우리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그 의문을 제기하고 엉뚱한 곳에서 대답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합니다. 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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