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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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가 고백하는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나’.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에 대한 거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주제에 비해 제목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대문호답게 결론부터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겪어왔던 사고와 감정의 과정 전체를 처음부터 기승전결을 갖춰 설명합니다. 덕분에 그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독자도 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독자는 톨스토이가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느끼게 되거든요. 


 동어 반복이 많은 데도 워낙에 글을 잘 쓰다 보니까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게 잘 읽힙니다. 내용 자체도 결국에는 ‘돌아온 탕자’같은 단순한 이야기지만 막상 읽다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게 바로 ‘문학적인 힘’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책을 단순한 기독교 서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한 가지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톨스토이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고뇌이기 때문입니다.  

 

오십의 나이에 나를 자살 직전으로 몰고 갔던 나의 의문은 우매한 아이에서 지극히 지혜로운 나이 많은 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고,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람이라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지 않고는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의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이나 내일 하게 될 일의 결국은 무엇인가? 내 인생 전체의 결국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왜 나는 어떤 것을 원하거나 행하는 것인가?” 또한 이 질문은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 속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드시 내게 찾아올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p. 38-39


 물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지는 않죠. 하지만 톨스토이의 경우는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중차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의미를 잃은 삶을 끝내지도,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어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누구보다 진실한 실천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도무지 실재 삶과 이상의 괴리를 견딜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탐구하게 됩니다. 그는 오히려 이런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이상하게 여깁니다. 

 

다만 내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진리가 아주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을 것인데, 내가 그런 진리를 왜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질병과 죽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내게 닥쳐올 것이고(아니, 그런 것들은 이미 닥쳐왔다), 부패로 인한 악취와 구더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내가 한 일들은 그것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잊혀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분명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내게 정말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p. 31-32

 톨스토이는 먼저 학문에 매달립니다. 크게 실험 학문과 추상 학문으로 나눠서 파고들지만, 곧 전혀 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다음으로 매달린 것은 역사적으로 지혜롭다고 추앙받는 성현들.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솔로몬, 석가모니로 대표되는 이들에게서도 해답을 얻지 못한 톨스토이는 결국 (넓은 의미의) 기독교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해왔던 이성적 지식 외에도, 인류 전체가 소유해 온 또다른 종류의 지식, 곧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 삶의 의미를 알게 해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앙이라는 지식이었습니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 75


 하지만 신앙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시작에 가까웠죠. 왜 미신에 가까운 예식들이 있는 것인가, 현란한 교리는 또 어떤가. 왜 신자들은 비신자들보다 더 세속적인가. 이성을 버리고 시작한 신앙이었지만, 계속해서 이성적인 의문들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체를 통째로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신앙은 엄밀히 말하면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는 ‘톨스토이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지만, 그 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회의적인 기독교인. 

 

 그의 신앙에서 한 가지 도드라지는 것은 민중(혹은 노동계급)들에 대한 동경(?)입니다. 귀족 계층과 지식인층에 실망감이 컸던 그는 민중들을 상대적으로 순수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여깁니다. 확실히 무리가 있는 시각입니다. 귀족들 중에도 사이비 같은 종교인들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다수 민중들 중에도 사이비는 있을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비신도가 많을 수도 있고요. 톨스토이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그를 엘리트적이고 귀족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정도라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를 나태와 향락과 삶에 대한 불만족으로 허비하고 있었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갔지만 부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삶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보았습니다. p. 85


 제가 생각하는 신앙은 성도 각자의 성향에 맞춤형으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런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 책에 드러나는 신앙은 톨스토이의 경우에 가장 강한 설득력을 가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속에서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겠지요. 맥락은 다르지만 적절한 문구가 눈에 띕니다.


 

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제기했던 의문, 그리고 삶은 악이라고 했던 나의 대답도 지극히 옳은 것이었지만, 단 한 가지 잘못된 것은 오직 내 자신의 삶에만 해당되는 그 대답을 인간의 삶 전체로 확대해서 적용한 것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p. 87-88

 

 톨스토이는 노동 계급에 대한 지향을 끝까지 밀어붙이다 오히려 그들을 모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인 순종을 노동 계급의 순종으로 비유하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축처럼 여기는 단순하고 무식한 노동자들은 주인을 비난하지 않고 주인이 그들에게 시키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주인의 뜻을 이룹니다. 그러나 지혜롭다고 하는 우리는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주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함께 둘러앉아서 “우리가 왜 손잡이를 조작하고 이 쓸데없고 어리석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토론하고 숙고를 거듭한 후에, “주인은 어리석거나,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이 유일하게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인데, 우리가 알게 된 유일한 것은 우리의 삶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삶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p. 91

 

 앞서 제목에 비해 상당히 거창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했는데, 거창한 문제에 비해 결말이 시시한 편이어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종교에서 발견한 문제점과 의문들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고 끝을 맺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챕터의 맺음말입니다.

 

내게는 종교적 가르침들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었지만, 그 가르침들 속에는 거짓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조금도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밝혀내어서 둘을 구분해야 했습니다. (…) 어떠한 결론들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런 글이 가치가 있고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이 글의 후속편으로서 어딘가에서 출간될 것입니다. p. 120

 

 역시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모두 다루기에는 그의 고민의 폭과 깊이가 너무 넓고 깊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집요하게 인간 보편의 문제를 파고든 글을 우리에게 남겼다는 것만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의 고뇌의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떼어낼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학문이나 이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라는 것도요.


 고전의 역할은 그런 인간 보편의 고민의 과정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처음 밑바닥부터 다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전의 연장선상에서 고민해볼 수 있으니까요. 톨스토이가 고백록이라는 개인적인 글을 남긴 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미련한 절차를 다시 밟지 않게 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언제 어디서나 발견하는 그 유일한 해법은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아주 까마득하게 먼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해법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렵고 난해한 해법이어서, 우리가 그런 해법을 고안해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해법을 무심코 경솔하게 파괴해 버리고서는, 또다시 우리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그 의문을 제기하고 엉뚱한 곳에서 대답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합니다. 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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