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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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p. 132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불평등과 고통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한 인물에 녹여냈다.


문학적인 가치는 좀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문학 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작가는 픽션을 쓰는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픽션이 아님을 끊임없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서적처럼 계속해서 실제 자료가 제시되고, 자료의 출처가 각주로 붙는다. 


마지막에 김지영 씨의 모든 걸 이해한 상담사는 다시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갇힌다. 

작가는 마지막에 그것마저 제시하며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김지영이 겪어내는 코스(?)는 현실보다 좀 더 온건한 경우라는 점이 좀 의아했다. 뉴스나 트위터에서 보는 실제 사례들은 참담함에 차마 끝까지 읽어낼 수 없을 지경이다. 


현실임을 강조하려 했으면서 왜 온건한 사례들을 골라 담았을까.


부모님도 상당히 선량하고 말이 통하는 편이며, 과거에 만났던 남자나 현재의 남편, 상사도 괜찮은 편이다. 그 흔한(?) 성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다.

진짜 끔찍한 이야기들은 김지영이 직접 겪기보다는 그런 사람도 있더라, 하며 전해 듣는 방식으로만 표현된다. 


너무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 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백번 양보해서 다 좋다고 쳐도, 

현실에서 여성들의 삶은 불평등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이었을까.


어쩌면 독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란 이 정도라고 판단한 걸 수도 있다.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능가하기 마련이다.


남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함은 아닐까.

여성의 고통을 말한다고 해서 남자가 ‘절대 악’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끝내 화자가 남자로 귀결되는 것도 그렇고,

편을 갈라서 남자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좀 여자들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의문은, 여자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80~90년대라면, 사실 여자들도 상당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때다. (사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다.)

‘여적여’가 현실처럼 보이기도 했고, 수많은 남자 작가들이 말했듯이 여자들은 특유의 비논리 성과 히스테릭함에 휩싸여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신비로운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고, 

제멋대로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2010년대에 다시 조합한, 

훨씬 오늘날의 여자들을 닮아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래야만 했었다’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한 번도 롤모델로 삼을 만한 페미니스트가 주변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을 것이다. 

가부장을 내면화한 여자들만 등장한다면, 절대로 정확하게 그들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특유의 ‘비논리성’과 ‘히스테릭함’에 휩싸여 있으니까.



어찌 보면 작가가 여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 모든 김지영(곧 세상 모든 여자)을 위해서 작가는 산부인과의 할머니 의사로, 버스에서 만난 낯선 아줌마로, 딸들만은 다르게 살기를 원했던 진취적인 엄마로, 개념 있는 여자 상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를 돕고, 용기의 말을 건넨다.


김지영 씨가 모든 여자를 대변하고 있듯이,

작가 스스로도 모든 여자를 대변하는 또 다른 김지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픽션’의 영역이 커지면 이 소설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되어 버릴 위험에 빠진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픽션이지만, 픽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김지영 씨가 겪는 사례들은 모두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 자극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상담사의 태도를 통해, 

이 소설을 이야기로 소화하고 마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작가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남자에게 상처 주는 것도 피하고, 여자들에게 냉철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런 태도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해는 된다.


이 소설이 남자들을 단죄하고, 여자들의 해방적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한다면, 아마도 이 소설은 신뢰가 가지 않는, 균형이 깨어진, 그저 감정적이기만 한, 복수심에 불타거나 피해 의식에 절어 있는, 여자들의 감정 해소를 위한 소설로 치부될 거라는 걸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왜 온건한 사례 중심인가’ 하는 

앞선 의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심한 일을 겪지 않은 입장의 저자가 

마치 그것을 겪은 것처럼 말하는 것에 죄책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감히 당사자의 마음을 묘사하는 것을 미안해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거리를 두고 말하는 방식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시키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지만,

마치 그 피해 여성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잘난 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주 까다로운 픽션이 된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힘든 작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작가가 픽션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픽션이 지닌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가 주는 위력 때문이다.

그 방식이 이 책을 관통하는 전략이 된다.


같은 여자로서 김지영 돼 보기.

남자로서 여자의 입장에 서 보기.

남자 형제로서 여자 형제의 입장이 돼 보기.

작가로서 여자들의 고통에 감정이입해 보기.


김지영 씨가 종종 완벽하게 다른 여성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토록 온건하고 얌전한(!) 제안에 일부 남성들은 그렇게도 열을 냈다는 건가?

이게 그렇게 위험하고 도발적이고 발칙한 제안인가? 

이렇게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아주 잠깐 동안만 다른 입장에 서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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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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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지나치게 연동된 종교들은 신전이 건축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건축물을 구심점으로 모여야 하는데, 신전 건축에서 멀어질수록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물 없이 문자 같은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둔 유목 민족의 종교는 전파에 유리하고 건축물이 지어진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 그래서 세계적 규모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모두 각각 성경, 코란, 불경 같은 소프트웨어인 책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들이다. p. 195-196


하지만 건축가의 관점에서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한국 기독교가 부흥한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 건축 유형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상가 교회’다. (…) 한국의 ‘상가 교회’는 실리콘밸리의 ‘차고 창업’과 비슷하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몇 년간 전도사 수련 후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적은 보증금으로 상가에서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 실리콘밸리 IT 산업 생태계를 보면 차고 창업처럼 초기 투자비용은 적게 들지만 무한 경쟁 시스템을 통해 살아남은 기업만 공룡 기업으로 성장한다. 이와 동일한 시스템이 한국의 상가 교회 시스템이다. 창업의 문턱은 낮되 무한 경쟁을 통해 실력 있는 목회자가 살아남아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는 시스템이었다. p. 197-199



오늘날 한국 교회에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교회 건물의 대형화가 아니라, 

다시금 성경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집중해야 할 때다.


생각해 보면 중세 시대 기독교의 부패 뒤에도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축이 자리 잡고 있다.


솔로몬이 지은 이스라엘 성전은 지극히 화려했지만, 

이교도적인 면이 있었고, 결국 여러 차례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된다.


성전의 크기와 화려함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상가 교회의 등장이 한국 기독교의 부흥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실리콘 밸리처럼, 살아남기는 힘들지만, 우수한 교회만이 살아남는다.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고, 실패한다면 사라지겠지만 타격이 크지는 않다.


이런 자유로운 이동성이 한국교회가 닮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너무 무거운 교회 건물에 발이 묶여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유목성이 정체성이다. 

언제든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뒤를 쫓을 수 있어야 진정한 제자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길바닥도, 깊은 산속도 교회가 될 수 있다. 

아니, 신자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걸 잊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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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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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신화 이야기를 차용한 이야기 방식이 재밌다. (극 중에서는 프랑스어 발음 ‘외리디스’와 ‘오르페’로 나온다)

  

외리디스는 물의 님페이고 오르페의 아내이다. 오르페는 음유시인이자 리라의 명수라고 하는데, 어찌나 연주 솜씨가 좋았던지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죽은 아내 외리디스를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기까지 한다. 죽은 아내를 데려가기를 허락한 저승의 신들은 한 가지 조건을 단다. 외리디스가 오르페의 뒤를 따라서 이승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르페는 다 나가기 전까지 절대로 아내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는 이승을 코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고 만다. 외리디스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슬픔에 못 이겨 오르페도 죽고 만다.

  

앨리스 먼로는 이 아름다운 정절과 사랑의 이야기를 가져와 냉혹한 남녀 관계를 묘사한다. 브라이언의 아내 폴린은 외리디스를 다룬 연극의 외리디스 역으로 참여하고, 연출가인 제프리와 바람이 난다. 폴린은 외리디스다. 그녀의 결혼생활을 둘러싼 여건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두 아이의 육아, 자신을 공격하는 시아버지와 해맑기만 한 시어머니, 그런 부모님의 문제를 농담으로 때워 넘기려는 남편.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생활이 최악인 것은 아니다. 남편은 착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단지 그녀는 연극 참여를 계기로 자기 삶이 얼마나 답답한지를 깨달았을 뿐이다.

  

그녀는 텅 빈 거리를 걷는 이 짧은 시간을 즐겼다―자신이 도시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소중한 꿈의 눈부신 빛 속에서 살아가는 초연하고 고독한 누군가가. 브라이언은 집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연못에서 보트를 태워주려고 아이들을 댈러스 로드로 데려갔을지도 몰랐다―그 약속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삶은 여기 연습실에서 진행되는 일―몇 시간씩 연습하고 집중하고 비수 같은 말을 교환하고 땀을 흘리고 긴장하는 일―과 비교했을 때 초라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p. 23

  

그렇다면 오르페는 누구일까. 폴린과 바람이 난 제프리인가, 남편인 브라이언인가. 작가는 단언한다. 두 사람 모두 오르페라고. 

  

작가가 말하는 오르페는 신화 속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오르페는 절대로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저승까지 찾아오는 영웅이 아니다. 제프리는 사랑인지 정욕인지 모를 충동 때문에 폴린의 가족 휴양지까지 쫓아온다. 폴린은 따분한 가정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만, 그렇다고 제프리가 그 구원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브라이언은 어떤가. 그는 착한 남자이지만 폴린을 가정이란 숨 막히는 저승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그리고 한 번 죽은 폴린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오르페다. 가족을 떠나겠다는 폴린에게 ‘자식들은 안 보내’라는 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게 그다. 절대로 다시 한 번 그녀를 붙잡기 위해,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뻔히 죽을 걸 알고, 죽이기 위해 본 것이다. 그것은 복수였고, 결함 있는 아내의 존재를 세상에서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잘못은 오르페에게 있다고, 폴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외리디스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죽여 없애려고 고의로 외리디스를 쳐다본 것이다. 오르페 때문에 외리디스는 또다시 죽어야 한다.

  

작가가 말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그들은 절대로 여자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희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동등한 입장으로 여자 옆에 있어주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여자를 이용하고 그것으로 둘의 관계는 족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기적이다. 브라이언은 폴린 자체보다는 폴린과 자기 부모님의 관계가 중요했다. 아내에게 독박 육아와 대리 효도를 떠넘기고 혼자서 농담이나 해대는 작자다.

  

그에게는 아내와 그의 부모와 자식들이 이렇게 결속되는 것이, 그의 부모와 함께하는 그의 인생에 폴린이 참여하는 것이, 그의 부모가 폴린을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제프리는 전형적인 바람둥이 예술가 타입이다. 연출가라는 알량한 권력 위에 서서, 그럴듯한 뜬구름 잡는 얘기로 마음을 사로잡고, 예술의 일부인 양 여자의 몸을 탐닉한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계의 정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주류 예술계에 대항하는 반항아. 그게 그가 심취한 역할이다.

  

폴린은 그 희곡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제프리에게 말했었다.

그가 말했다. “정말로요?” 그녀의 말은 그를 기쁘게 하지도, 놀라게 하지도 않았다―그는 그 말을 뻔하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로 여기는 듯했다. 그라면 절대 희곡에 대해 그런 표현은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희곡을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처럼 말했다. 또한 여러 적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처럼 표현했다.

  

그럼 외리디스는 잘못이 없는 걸까? 아니다.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외리디스의 잘못과 그 여파에 대해 조목조목 묘사한다. 그녀는 분명히 도덕적으로 당당하지 않다. 그런데 작가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불륜을 저질렀건, 눈이 맞아 도망쳤건, 그녀 자신이 그것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책임져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불륜은, 안온한 가정을 박차고 나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녀 스스로 해낸 일이다. 그게 전부이고, 그녀 스스로도 그 이상으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전부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방에서 살지, 어떤 옷을 입을지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해 그런 것들에 기대지는 않을 것이었다. 자기 스스로에게 알려준다는 명목으로도 안 될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 한 행동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그게 전부가 될 테니까.

  

폴린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돌파구를 스스로 찾은 외리디스다. 그리고 돌파구로 향하는 그녀를 다시 죽인 브라이언이 있고, 돌파구라고 생각한 제프리도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 사람하고 한동안 같이 살았지.’ p. 63)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여자에게 남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주 온건한 어투지만, 작가는 단호하다. 가정에 갇히지 말라. 남자는 여자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다. 결혼이나 남자를 해결책으로 생각하지 마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져라, 여자들아. 사회적으로 이미 죽어있는 여자들을 확인사살(말 그대로 ‘죽인다’)하는 이 세상에서, 오르페우스 같은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은 그런 단호한 메시지다.

  

폴린이 말한다. “오르페가 아니었어.”

“오르페가 아니었다고요? 아빠는 그렇게 말했었는데요. ‘그때 너희 엄마는 오르페와 달아났어.’”

“그랬다면 아빠가 농담한 거야.” 폴린이 말한다.

“나는 그 사람이 늘 오르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이었단 말이네요.”

“그 연극과 관련된 다른 사람이었어. 그 사람하고 한동안 같이 살았지.”

“오르페가 아니고요.”

“아니야. 절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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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춤추고 싶다 - 좋은 리듬을 만드는 춤의 과학
장동선.줄리아 크리스텐슨 지음, 염정용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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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의하면 춤은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깝다. 

(제목처럼 뇌에 한정된 춤의 효과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 정신과 몸에 관련된 거의 모든 질환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춤을 추면 근육운동·자기 인식·기억력·자유와 창의력·정서·사회적 공동체가 단련된다. 춤을 추면 우리의 심장 순환계·면역 체계가 강화되며, 노령에 이르기까지 좋은 자세와 유연성을 유지하게 된다. 춤을 출 때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높아지고, 힘들지 않게 몸무게를 줄여 주며, 엉덩이를 탄탄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춤은 곧장 우리 뇌에 작용해 뇌세포들 사이의 연결을 향상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쉽게 배우고, 정신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어떤 운동이 이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춤은 만병통치약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그토록 춤을 추지 않는 것일까? p. 350-351

 

읽다 보면 춤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언어이자  

건강 관리법이자 본능임을 실감하게 된다. 

왜 당장 책을 집어던지고 춤추지 않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더불어 자신의 연인, 부모, 자녀에게 적극적으로 춤추기를 권하게 될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좋은 효과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제시되는데, 

가끔씩은 반드시 춤에 대한 연구 결과가 아닌 것도 있지만 

(간접적으로는 춤과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 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춤의 위력이 대단한 것은 분명하다 

 

단지 이 책만의 새로운 이론 같은 건 없고,  

춤과 관련된 기존의 연구결과들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다 보니 단조롭다. 

물론 지식 전달 차원의 대중교양서적으로서는 장점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진짜 목적은 도리어 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 있는 것 같다. 

춤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덮여있기 마련이다. 

부정적 생각과 더불어 사회적인 시각 때문에 춤은 일상생활과 거리가 멀다. 

춤을 사랑하는 두 저자는 계속해서 춤에 대한 옹호를 늘어놓고 있다. 

 

‘왜 춤을 추지 않아? 이래도 안 출 거야? 이래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끝까지 춤을 추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그 사람은 바보가 분명하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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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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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내용 자체가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이 정도 내용이라면 우리나라에도 많지 않나?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점이  

‘일본 아마존 에세이 부문 1위’에 오르게 만든 걸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책을 끝까지 읽어냈고, 

나는 ‘공감·위로 에세이’의 어떤 새로운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봤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독자의 편을 드는 위로나 

독자의 마음을 계산하는 공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독자는 그렇게까지 엎드려 절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상술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됐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기본에 충실하는 게 먼저다. 

우선은 작가가 솔직하게 자기 생각과 얘기를 풀어놓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나 위로를 불러일으키려 노력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단지 솔직하고 무심한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면 독자는 알아서 위로를 받고 공감을 얻는다. 

(마치 SNS나 유튜브에서 ‘진정성’을 중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적당히 속이는 건 모두가 알아챈다.)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말로만 남을 구할 수 있으니까. p. 197-198

 

이 책의 작가도 위로나 공감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글을 써 내려간다.  

글에는 솔직함이 묻어나고, 내보일만한 일관된 가치관이 보인다. 

그리고 그 글들은 듬성듬성 흩뿌려져 있다.  

문장들이 파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핵심적인 지점이다. 

모든 독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런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기 글을 늘어놓는 것뿐이다. 

독자는 그 파편화된 글을 읽어내려 가다가  

마음에 안 드는 문장은 무시하면 되는 거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다면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것은 좀 더 능동적인 ‘위로와 공감 얻기’라고 볼 수 있겠다. 

진정성 있는 문장들은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어디서부터 펼쳐 봐도 상관이 없다. 

정독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각자 꽂히는 문장이나 문단을 주섬주섬 주워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파편화가 계속되다 보면 일관성이 깨지는 일도 일어난다. 

책의 초반부에는 이런 남자는 이렇다, 이런 여자는 이렇다 하면서 

이성의 유형을 단정 짓는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수준을 저하시키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쌍팔년도’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 

그런데 후반부에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당신 앞으로 아무하고도 사귀지 마. 그 사람한테 실례야. 남의 가치관이나 뜬소문에 의존해서 연애하는 사람을 어느 누가 만나겠어? 그러면 당사자가 너무 불쌍하잖아.” p. 302

 

“(…)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죽어서라도 지켜야지. 남들한테 휘둘리면 안 돼. 

혼자서 연애해. 그리고 혼자서 실연해.” p. 303

 

책의 모순된 태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골라잡으면 그만이니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글을 늘어놓다 보니, 

어찌 보면 같은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이 표현이 마음에 안 든다면, 이 표현은 어때?’ 하고  

친절하게 인용하기 좋은 형태로,  

간직하기 좋은 형태로 계속해서 제안하는 느낌이다.  

같은 챕터 안에서도, 큰 주제 안에서도, 책 전체를 통해서도 

같은 말은 계속해서 다른 문장으로 변주된다. 

‘이 중에 하나라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겠지!’ 

그리고 읽다 보면 분명히 마음에 드는 문장이 하나쯤은 있다. 

 

책 전체의 일관된 주제나 기승전결이나  

점진적인 서술 따위는 상관이 없다. 

내가 꽂힌 문장이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그저 그 문장에 감탄하면서 몇 번이고 되뇌며 마음에 새기게 된다. 

‘미래형’ 공감·위로 에세이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작가는 모든 글을 핸드폰으로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글은 SNS에서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고도 한다. 

이 책의 특징인 ‘파편성’, ‘다양한 변주로 다시 제시하기’ 같은 것들이 

작가의 글을 SNS에 적합하게 만들어준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SNS처럼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서치>같은 영화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책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춰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식의 글쓰기나 책들은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인기를 얻을지 모르겠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독자의 자유도를 제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꽉 짜인 구성에, 

저자의 가르치려는 태도가 도드라지는 에세이라면, 

적어도 젊은이들이 열광하거나  

SNS에서 인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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