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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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p. 132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불평등과 고통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한 인물에 녹여냈다.


문학적인 가치는 좀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문학 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작가는 픽션을 쓰는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픽션이 아님을 끊임없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서적처럼 계속해서 실제 자료가 제시되고, 자료의 출처가 각주로 붙는다. 


마지막에 김지영 씨의 모든 걸 이해한 상담사는 다시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갇힌다. 

작가는 마지막에 그것마저 제시하며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김지영이 겪어내는 코스(?)는 현실보다 좀 더 온건한 경우라는 점이 좀 의아했다. 뉴스나 트위터에서 보는 실제 사례들은 참담함에 차마 끝까지 읽어낼 수 없을 지경이다. 


현실임을 강조하려 했으면서 왜 온건한 사례들을 골라 담았을까.


부모님도 상당히 선량하고 말이 통하는 편이며, 과거에 만났던 남자나 현재의 남편, 상사도 괜찮은 편이다. 그 흔한(?) 성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다.

진짜 끔찍한 이야기들은 김지영이 직접 겪기보다는 그런 사람도 있더라, 하며 전해 듣는 방식으로만 표현된다. 


너무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 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백번 양보해서 다 좋다고 쳐도, 

현실에서 여성들의 삶은 불평등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이었을까.


어쩌면 독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란 이 정도라고 판단한 걸 수도 있다.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능가하기 마련이다.


남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함은 아닐까.

여성의 고통을 말한다고 해서 남자가 ‘절대 악’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끝내 화자가 남자로 귀결되는 것도 그렇고,

편을 갈라서 남자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좀 여자들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의문은, 여자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80~90년대라면, 사실 여자들도 상당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때다. (사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다.)

‘여적여’가 현실처럼 보이기도 했고, 수많은 남자 작가들이 말했듯이 여자들은 특유의 비논리 성과 히스테릭함에 휩싸여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신비로운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고, 

제멋대로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2010년대에 다시 조합한, 

훨씬 오늘날의 여자들을 닮아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래야만 했었다’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한 번도 롤모델로 삼을 만한 페미니스트가 주변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을 것이다. 

가부장을 내면화한 여자들만 등장한다면, 절대로 정확하게 그들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특유의 ‘비논리성’과 ‘히스테릭함’에 휩싸여 있으니까.



어찌 보면 작가가 여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 모든 김지영(곧 세상 모든 여자)을 위해서 작가는 산부인과의 할머니 의사로, 버스에서 만난 낯선 아줌마로, 딸들만은 다르게 살기를 원했던 진취적인 엄마로, 개념 있는 여자 상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를 돕고, 용기의 말을 건넨다.


김지영 씨가 모든 여자를 대변하고 있듯이,

작가 스스로도 모든 여자를 대변하는 또 다른 김지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픽션’의 영역이 커지면 이 소설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되어 버릴 위험에 빠진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픽션이지만, 픽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김지영 씨가 겪는 사례들은 모두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 자극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상담사의 태도를 통해, 

이 소설을 이야기로 소화하고 마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작가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남자에게 상처 주는 것도 피하고, 여자들에게 냉철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런 태도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해는 된다.


이 소설이 남자들을 단죄하고, 여자들의 해방적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한다면, 아마도 이 소설은 신뢰가 가지 않는, 균형이 깨어진, 그저 감정적이기만 한, 복수심에 불타거나 피해 의식에 절어 있는, 여자들의 감정 해소를 위한 소설로 치부될 거라는 걸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왜 온건한 사례 중심인가’ 하는 

앞선 의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심한 일을 겪지 않은 입장의 저자가 

마치 그것을 겪은 것처럼 말하는 것에 죄책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감히 당사자의 마음을 묘사하는 것을 미안해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거리를 두고 말하는 방식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시키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지만,

마치 그 피해 여성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잘난 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주 까다로운 픽션이 된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힘든 작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작가가 픽션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픽션이 지닌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가 주는 위력 때문이다.

그 방식이 이 책을 관통하는 전략이 된다.


같은 여자로서 김지영 돼 보기.

남자로서 여자의 입장에 서 보기.

남자 형제로서 여자 형제의 입장이 돼 보기.

작가로서 여자들의 고통에 감정이입해 보기.


김지영 씨가 종종 완벽하게 다른 여성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토록 온건하고 얌전한(!) 제안에 일부 남성들은 그렇게도 열을 냈다는 건가?

이게 그렇게 위험하고 도발적이고 발칙한 제안인가? 

이렇게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아주 잠깐 동안만 다른 입장에 서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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