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은 자기 앞에 먼저 왔던 사람들의 어깨를 딛고 선다. 그들이 그 사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무조건 그렇다. 춤을 추는 사람이건, 축구를 하는 사람이건, 책을 쓰는 사람이건 우리는 누구나 선구자들의 작업 위에서 창조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유달리 넓은 어깨가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선 사람들이 그곳에 섰다고 해서 다들 같은 높이에 이르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여기 이 셰발과 발뢰의 어깨는 오늘날의 모든 범죄소설가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위에 서 있다. 셰발과 발뢰의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이라도, 그래서 자신은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p. 7-8, 서문, 요 네스뵈
김주현은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가 발표되고 채만식이 소설 『소년은 자란다』(1948년)를 집필하던 그 사이의 시간대에, 민족의 운명을 떠받칠 미래의 기둥으로서의 ‘소년’에 비해 “소녀는 소년의 의미론적 짝이되 소년에 가려진 기호”였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경우 일본과 달리 ‘소녀 소설’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 없고 소녀 교육을 따로 논할 만큼 여성 교육의 역사가 두텁지 못해 소녀 표상의 사회학적 의미를 분석한 연구도 미비”한 상황이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김주현, 「불우 소녀들의 가출과 월경」, 《여성문학연구》28호, 2012년, 450~451쪽. p. 135, 각주 3
이 글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아이티 공화국의 법전은 냉정한 활자를 빌려, 표현하기도 힘든 가증스럽고도 추상적인 마법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아이티의 형법 249조는 다음과 같다.실제적 사망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무력한 혼수상태를 야기하여 상당 기간 지속시키는 물질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그의 의지에 반해 고용하는 행위는 살인 미수에 준한다. 그런 물질을 주입한 사람을 매장할 경우, 그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위는 살인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죽은 사람을 매장했다가 나중에 그 시체를 무덤에서 다시 꺼내 되살리는 행위는 그로 인해 초래된 결과와 상관없이 살인죄에 해당한다. 형법에 이런 조항이 포함된 것은, 아이티의 흑인들이 불가사의한 마법으로 무덤에서 시체를 되살려내 지능도 영혼도 없는 노예로 부린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살아 있는 시체를 일컬어 좀비라 한다. 이들은 유령이나 생령이 아니라 피와 살을 지닌 죽은 육체로, 움직이고 걷고 일하며 심지어 이따금 말까지 할 수 있다. 정부 당국은 이들이 약에 취한 상태에서 매장되었다가 다시 꺼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비를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p. 217-218, 이네즈 월리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다락방을 떠올려보자. 그곳의 분위기 자체가 바로 ‘시간’이다. 그곳에는 지금과 다른 세월이 있고 다른 시대의 누에고치와 번데기가 있다. 옷장 서랍은 칸칸이 수천 날의 어제가 안치된 작은 관이다. 아아, 다락방은 시간으로 가득 찬 어둡고 친근한 곳이라서 그 한가운데 우뚝 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것저것 떠올리며 과거의 냄새를 맡고 손을 내밀어 옛것을 만져보려 한다면, 아아, 그렇게만 한다면…. p. 141-142
그녀는 혼자 있을 때에만, 그것도 아주 가벼운 비속어를 중얼거린다─젠장! 제기랄. 빌어먹을……아주 화가 났을 때에만, 몹시 속이 상할 때에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가장 상스럽고 가장 잔혹한 말을 웃으며 내뱉는 것이야말로 남자들의 특권이니까. p.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