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병자호란 - 하 - 격변하는 동아시아, 길 잃은 조선 만화 병자호란
정재홍 지음, 한명기 원작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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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필자가 병자호란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원작인 한명기의 책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는 사실을 밝혀둬야 할 것 같다.) 

 

하권부터 읽었지만 병자호란의 전체 개요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쟁의 조짐부터 전쟁의 시작과 전쟁의 의미 정리까지 모두 하권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권의 목차를 보니 인조반정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작하고 있었다. 인조 정권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역시 상하권 모두 읽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만화다 보니까 술술 잘 읽히고, 이해도 쉽게 표현이 친절하다. 책의 기획에 부합하는 면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병자호란은 일어날 만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당대 조선은 정말 개판인 나라였다. 전쟁의 발단, 전개, 절정, 결말 모두 하나같이 암 유발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고, 고구마의 연속이었다.  

 왕과 조정 대신들이라는 사람들의 상황 대처가 굉장히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문제가 뭘까 골몰하던 중에 ‘환향녀’ 부분에 이르러서 뭔가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이른바 ‘환향녀’로 불리는,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성들이 있었는데, 문제는 기혼녀인 환향녀들이 이혼을 당하고 쫓겨날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진 여자에게 조상의 제사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다. (물론 미혼 여성들은 결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그야말로 병자호란이 야기한 부조리 중 최고의 부조리라고 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책에서는 계속 ‘여인’이라는 멸칭을 쓴다)  

 

 많은 속환녀들이 그 때문에 어렵게 고향에 돌아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당시 이혼을 죄악시했던 조선이기에, 이혼을 허락해 달라, 혹은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환향녀의 가족들 입장)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이에 최명길(등장인물 중에 거의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보이는 사람)이 환향녀를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왕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그 기록과 함께 실록은 다음과 같은 비평을 남겼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포로가 된 부녀자들은 비록 본의 아니게 끌려가긴 했으나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p. 266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한 유교 사상이 모든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대하는 조선인의 태도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유교적 관계 원리가 모든 인간관계를 비롯해 국가 간의 관계에까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명과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후에 청이 되는 후금은 조선과 '형과 아우'의 관계로 묶여 있었다. 군자가 임금을 배신하고, 형을 임금으로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보면 정말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위험천만한 생각이지만, 당시에 그런 사상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면, 청의 부상과 병자호란 자체는 세계관을 깨부수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인 것이다.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가 썩어 있었던 것은 맞다. 특히 인재 등용 부문에서 그걸 가장 실감할 수 있었다. 척화파는 세계관의 한계 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온갖 부정부패, 우스꽝스러운 영웅심, 이기주의, 임무 태만, 그냥 (관리가 될 수 없을 정도의) 어리석음 등, 어떻게 하나같이 그런 자들이 조정의 대신이고, 관리가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직과 등용제도가 하나같이 썩어 있지 않으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전쟁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당시에는 당시의 세계관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오늘날의 독자는 그것이 이해가 잘 안되어 오해할 수는 있다. 물론 그걸 이 책의 미흡한 설명 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상권을 읽어보지 않은 상황이라 지나친 감이 있다. 

 


(할줄 아는 게 우는 것 밖에 없는 인조)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책에는 유독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부분이 많다. 인조의 우는 것에 감정이입을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거나, 왕의 비참함에 비극적인 연민을 부여한다거나. 그런데 내용의 맥락 상, 그것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인조가 전쟁을 대비해 최선을 다하고,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그런 비극적 결말에 다다랐다면 충분히 그 감정에 동참할 수도 있겠다. 영화 <300>의 비장함 같은 것. 


 하지만 인조가 전쟁을 위해 한 일이 뭔가. 우유부단하게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시간만 끌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군사적 방비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도망을 부지런히 빨리 간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다가 도망갈 타이밍마저 놓쳐서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에 갇힌 것 아닌가. 갇혀서도 무능함이 빛을 발해서 제대로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이런 플롯이라면 오히려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과 탐관오리들이 벌을 받아서 통쾌해져야 할 판이다. 물론 역사서에서 그런 식의 감정은 개입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억지 연민과 감정이입은 개입해도 된다는 말인가. 왜 저자는 당대 실록의 저자라도 된 것 같은 포지션을 잡고 있는 것일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식의 괴상한 감정이입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전황이 나빠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관리들의 모습을 비장하게 그리는 것도 그런 것 중 하나다. 친절하게 마지막으로 지은 비장한 시구를 같이 실어준다. 역사서에서 자결을 미화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다. 

 

 척화파의 대표로 청에 포로로 끌려간 홍익한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가관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존망을 걸고 끝까지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한,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할 인물임에도 저자는 그를 심하게 미화시킨다. 끌려가는 내내 같은 조선인에게 박해를 당하고, 청의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청의 관계자도 감탄하는 것처럼 묘사해 놨다. 그렇게 거의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그리며 본문은 말한다.  

 

의롭고 강직한 사내 홍익한은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p. 209

 

 도대체 어디가 의롭고 강직하다고 봐야 하는 건가.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상은 전근대 조선의 유교 사상인 건가. 역사를 냉엄하게 해석하는 것은 책 후반부의 마지막 챕터, 그 얇은 부분에 맡겨 버리고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당대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 이런 걸 ‘만화화’라고 한다면 그건 만화에 대한 모욕이다. 만화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옛날 것을 그대로 전달해도 되는 핑계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병자호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해서 내용이 허약해도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감상주의, 싸구려 민족주의를 주입한 만화로 된 역사서. 어렸을 때 분명히 많이 본 스타일이다. 2018년에도 이런 책이 나온다는 게 정말 놀랍다. 마치 청이 중화를 지배했다고 깜짝 놀라는 조선 선비들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끝까지 명과의 의리를 지킨다고 관직에도 나가지 않고 연호도 청이 아닌 명의 것을 사용했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태도가 병자호란에서 조선의 무능함을 만들어 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책의 결론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책은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는, 본론과 결론이 정반대인 기괴한 역사만화다. 그 기괴함을 통해 병자호란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80~90년대 학습만화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건 척화파의 무능함과 다를 바가 없다. 부디 시대착오적인 만화 역사서는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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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같은 소리 하네 - 과학의 탈을 쓴 정치인들의 헛소리와 거짓말
데이브 레비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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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치인들이 자기의 발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적 헛소리를 하곤 하는데, 명쾌한 과학적 사실로 그 헛소리를 조목조목 따지는 통쾌한 책이다. 미국 사례뿐이어서 아쉽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사례로 나왔으면 훨씬 더 통쾌했을 것 같다.  

 

 총 열두 가지 유형으로 헛소리를 분석하고, 각 유형마다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짚어 헛소리의 정체를 밝혀낸다. 미국인들이 이 책을 통해 얼마나 속 시원했을지 짐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은 덤이다. 

 

 우리나라 사례가 아니다 보니까 확 와닿는 사례는 별로 없다. 대신에 기후 온난화에 대한 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온난화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가 보다 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은 완전히 깨졌다. 지구 온난화가 ‘과학적인 논쟁 중에 있다’는 주장 자체가 헛소리였다. 온난화는 엄연한 증거가 있는 사실이다. 점점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수준이 아주 심각한 상태다.  

 책에서 이 부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자주, 자세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굉장히 많이 언급되는 이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 과학자들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말이다.  

 

2009년 후반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첫 10년 동안 미국의 최고 기온 기록은 최저 기록을 2.04:1의 비율로 앞질렀다. 최저 기온이 한 번 경신될 때마다(예를 들어 특정 해의 11월 12일이 이 지역 관측 사상 가장 추운 11월 12일인 경우) 최고 기온 기록이 두 번 깨졌다는 뜻이다. 이 비율은 1990년대(1.36:1)와 1980년대(1.14:1)보다 높다. 

좀 더 최근 데이터를 봐도 이런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2010~2015년까지 최고 기온 기록은 여전히 최저 기온 기록을 2:1 정도로 앞서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율은 곧 급등할 가능성이 높다. p. 49

 

 우리나라는 온난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확실히 구체적으로 뭔가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것 같다. (‘북극곰이 살 곳이 없어요’ 라거나 ‘지구가 아파요’ 정도의 인정주의적 수준에 머문다.) 

 특히나 정치인들이 뭔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정치인과 과학은 잘 맞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진다. 정치인들은 대부분 법조인 출신이 많다. 아니면 인문학 계열의 학자 출신이거나. 아무래도 문인들을 중요하게 인용하던 과거 시대의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고 미국 정치인들이 과학적 소양이 높다는 말은 아니다. 책을 읽어보면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다만 미국 정치인들은 과학적 근거를 자기 논거로 자주 사용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과학적인 언급 자체가 거의 없다. 

 책에서 지적하는 미국 정치인들의 나쁜 입버릇은 ‘내가 과학자는 아니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이다. 과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나중에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무책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정치인들이 과학과 과학자, 전문가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은근히 분노를 나타낸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유시민 작가가 비트코인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논란이 됐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것은 과학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존경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소리다. 혹은 토론 문화가 어느 정도 익숙한 문화권에서나 하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아예 그것조차 없는데, 나는 그 이유가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한 존중과 존경심이 없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토론과 연설 자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예 언급조차 안 하는 것은 이 책에 소개된 열두 가지 유형 외에 ‘고의적인 침묵’이라는 유형에 속한다. 저자가 마지막에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유형이다.  

 

중요한 사안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 사안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꼴이 된다.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문제를 왜 국민이 걱정해야 하는가? p. 249

 

 우리나라는 도리어 정치인들이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 과학적 논쟁이 더 빈번히 일어난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수많은 ‘팩트’들을 우리는 모두 보지 않았던가. 세월호 때는 심지어 비밀을 모두 파헤쳤다는 아마추어 영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인터넷에는 자칭 전문가들이 넘쳐나고 우리는 가짜·조작 뉴스와 음모론의 범람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내는 걸 쉽게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개인은 과학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면 바로 그런 점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열두 번째 유형인 ‘순수한 날조’에 대해 맺는말을 살펴보자. 

 

(…) 터무니 없는 얘기가 들리면 일단은 의심해봐야 한다. 그리고 백신 같은 쟁점을 둘러싼 꽤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들리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출처를 찾아 스스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그걸 바라지 않겠지만,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도록 노력하자. p. 247

 

 책날개의 저자 소개에서도 그렇고, 서두에 저자가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과학적으로 검증을 하되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가능한가 싶기도 했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과학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그 주장이 옳은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어쩌면 우리가 과학적 사고를 잘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인 지도 모르겠다. 진영 논리 앞에서 과학은 필요에 의해 언제든 가져다 끼워 맞춰진다. 저자가 가장 경계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국민이 정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 끊임없는 감시에 필요한 덕목 중에 과학이 추가된 기분이다. 국민은 정말 피곤한 위치다. 탄핵시키랴, 부패하지 못하게 감시하랴, 거짓말인지 아닌지 과학 공부하랴. 어쩌겠는가.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저자는 서두에 트럼프의 언사들을 사례에서 제외한 이유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트럼프가 과학적 쟁점과 관련해 내놓은 발언들은 너무 뻔뻔하고 조잡한 데다 물리학·생물학·화학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하기 때문에,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쉽게 뒤집을 수 있다. p. 8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은 다양한 유형의 실수와 왜곡을 만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중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다. 과학에 대한 그의 실책은 치밀하지 않다. 그러니 그가 ‘물대포 쏘기’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자. 실책이 한꺼번에 수십, 수백, 수천 개씩 쏟아지면 하나하나 거짓말이나 오류를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다. 그게 설령 ‘지구는 평평하다’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p. 9

 

 한 마디로 ‘클라스가 다르다’는 말인데, 거기에 비해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얼마나 더 나은지 자신할 수가 없다. 미국은 그나마 나사(NASA)에 호감을 갖고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국민이 과반 수 이상이다. 우리는 ‘4대강 개발’이라는 최악의 개발을 밀어붙인 전력이 있는 나라 아니겠는가.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는 식의 헛소리가 먹히던 시절은 지났다. 과학적이지 않은 논거는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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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할 거예요, 어디서든
멍작가(강지명) 지음 / 북스토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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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역시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이다.  

5년 차 회사 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오랫동안 미뤄온 자아실현에 대한 열망.  

그리고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 약간.  

20대 후반, 전체적으로 검토가 필요한 시간이 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작가는 저질러버린다. 

 

언젠가 한 외국인 친구가 불쑥 나에게 던진 말이 기억난다. 


“그거 알아? 한국 유학생들은 

이십 대 후반이랑 삼십 대 학생이 유독 많은 거.  

내 생각인데 말이야. 한국에서는 어렸을 땐 명문대 입학, 

이십 대 때는 대기업 취업 같은  

똑같은 목표만 보고 공부하다가  

막상 회사에 들어가면 그제야 뒤늦게 

사춘기를 겪게 되는 거 아닐까?” p. 18

 

그렇게 시작된 외국생활. 새로운 장소에 대한 흥분은 분명 달콤하고 짜릿하지만 그것은 또한 쉽게 익숙함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던 두근대는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순간마다 벅차오르던 감정들을 비워내기 시작하고 서서히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연애 초기에 그렇게도 뜨겁던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게 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p. 97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곳을 바라보게 되면서, 멍작가는 반대로 자기 모습을 보게 된다. 

회사 다닐 때는 잘 모르던 자기 자신을 일을 그만두고야 발견하듯이, 

해외에 나가고 나서야 그때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한국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특히나 외국에서 회상하는 한국 회사의 모습은 촌철살인이 빛난다. 불합리한 근무형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과 벌이는 신경전. 그중에서도 최고는 역시 회사를 그만두기 2주 전 벌어진 송별회 장면이다. 예기치 못하게 머리를 다친 멍작가에게 다음 날 팀장이 한 말은 회사 생활을 접기에 충분했다고 멍작가는 말한다. 

 

설마… 

이제 회사도 관두는 마당에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p. 63

 

외국이 더 이상 새롭지 않고, 한국 사회를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나자,  

작가의 결론은 의외의 종착지로 향한다. 어느 곳에도 나에게 완벽한 낙원이 없다는 것. 

 

외국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한국의 장점과 단점 모두가 나란히 같은 선상에 올라간다.  

작가는 한국 회사에서의 회식문화를 그리워하다가도, 독일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을 마음에 들어 한다. 한국에 들어오면 밤 문화와 익숙한 음식들, 배달 문화에 만족하면서도,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에 누워있을 때 중년 아저씨들의 시선에 불편해 한다. 

 

이 평등해진 외국과 국내의 조건들 속에서, 작가는 모든 곳에서 자국인처럼 살 수도 있고, 국내라고 해도 이방인처럼 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단절시킨다면 여기가 어디든지 간에 나는 영원한 이방인일 테니까. p. 247

 

그래서 책 전체에 걸친 저자의 가치 판단은 언제나 중립적이고 양립적이다. 오래 된 인간관계만이 결속력이 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오래 된 관계에 대한 미련까지 버리지는 못한다. (p. 196)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단점으로 꼽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성향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균형을 잡는다. (p. 225) 

 

외국 생활 중에 작가는 국내 회사에 있을 적 알았던 직장 선배를 떠올린다. 항상 예의 바르고 상대를 배려했던 사람. 너무 지나치다고 치부했던 그 사람의 가치가 해외에 나와서 보니 재평가 된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얼마 전 무슨 서류를 찾다가 한 편지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선배가 선물이라며 준 책 사이에 있던 하늘을 닮은 색상의 편지지. 

길지는 않지만 정성스레 한 자씩 꾹꾹 눌러쓴 그 선배의 편지였다. 


‘잘 할 거예요, 어디서든…….’ 


군더더기 없이 짧은 그 말 한마디가 

한 번씩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는지 

아마 그 선배는 모를 것이다. 

그 선배의 유난히 예의 바른 존댓말과 따뜻한 마음씨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p. 181

 

선배의 편지는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면을 드러낸다.  

 

‘잘 할 거예요, 어디서든…….’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 말은 자기에게 맞는 환경과 생활을 찾아 떠난 멍작가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저 편지의 말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좋은 사람과 환경만 있다면 말이죠’ 선배는 ‘나쁜 환경’ 속에서 선한 배려를 실천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 선배와 같았다면, 멍작가는 해외로 떠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꼭 해외에 나가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내에 사는 사람이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음 안 맞는 사람들과 마음에 들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데, 그나마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도 부족한 편이다. 이것이 20대 후반의 청년들을 계속해서 다른 환경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핵심적인 이유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자신의 저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일본의 불경기 속에서도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에 대해서 친한 친구들과 지내는 자기만의 작은 우주가 유지만 된다면 어찌됐든 젊은이들은 행복해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그마저도 용납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도 그것을 깨달았기에 외국으로 나갔던 것이고, 거기서 한국도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와 해외의 장단점을 오가던 작가는 결국 양자택일의 선택을 유예한다.  

 

외국에서 한국을 그리워하는 것과 한국에서 다시금 외국 생활을 동경하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p. 2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국내에 마련되어 있는 인프라(가족, 고향, 국적 등)는 그것대로 가치가 있고 유리한 면이 있다. 하지만 독일이라는 또 다른 삶의 터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그만큼 많다. 그래서 둘을 오가면서 장점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칙이다. 일종의 편법이고 나쁘게 말하면 꼼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될 건 또 뭔가? 어디에도 나를 위한 완벽한 장소가 없다면 모든 장소의 장점만을 취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택지 아닌가. 우리 모두가 항상 꿈꾸는 게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을 우리는 질투에 못 이겨 손가락질 하고 욕하지 않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재촉하면서. 

 

작가가 해외로 나선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미뤄뒀던 꿈을 위해서’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내와 해외 사이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그 장점들만을 취하려고 했듯이, 작가는 자기만의 신념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은 절대적이다. 때로는 숨통을 막히게 하고 심하게는 자살로 내몰 정도다. 하지만 해외에서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크나 큰 이득이다. 그렇다. 진정한 자유다.  

 

“사람들이 너한테 뭐 하냐고 물어보면 처음엔 적응이 안 될 수도 있어. 아마도 너도 모르게 넌 전에 일하던 데가 어디고 거기서 뭘 했는지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을지도 몰라. 첨엔 나도 그랬으니까.”  p. 258

 

“근데 있잖아, 그렇게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지금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어쩌면 내 인생에서 다시 못 올지도 모를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자고.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을 옛날얘기 따윈 나중에 이력서에나 다시 늘어놓고 지금은 그 대신 한 번 더 마주한 사람의 눈을 마주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자고.” p. 259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황하는 존재, 이쪽과 저쪽 사이를 오가는 어리석은 존재로 그리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봤을 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기만을 위한 틈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발버둥치는 투사에 가깝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욕하고 그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자기 불안감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거창한 속뜻은 없다는 듯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놨을 뿐이지만, 그 장난스러운 그림과 글 속에서 그의 처절한 투쟁이 느껴진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위해, 자기만의 작은 틈을 위해 투쟁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것이 꼭 회사를 때려치우고, 해외로 넘어가서 외국어를 배우고, 예술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멍작가는 자기가 시도했던 자기의 방법을 풀어놓았다. 당신만의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듣고 싶다.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다.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반드시 꼭 뭔가 이뤄야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이야기를 온전히 했다면,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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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대미지의 일기
벨린다 스탈링 지음, 한은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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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작품다운 미숙함과 첫 작품답지 않은 능숙함이 모두 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2006년 작고한 탓에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더 많이 남는 작품입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남편의 병환으로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이 되자 위험을 무릎 쓰고 부인이 남편을 대신해 제본소를 이끈다.’ 

 

 19세기라는 시대와 제본사라는 독특한 소재에 ‘여성’이 만나면서 이 작품은 대단히 흥미로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여성해방의 방향이 느껴집니다. 첫 번째는 직업인으로서의 해방, 두 번째로는 지식에 대한 해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섹슈얼한 육체적 해방.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위해 주인공이 제본사로 나서면서 본의 아니게 직업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제본을 하려면 책을 읽어봐야 하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탐구도 가능해 집니다. 거기에 그 책들이 당시의 음란서적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탐구까지 수행하게 됩니다. 페미니즘 소설로서 아주 좋은 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 도라의 남편인 피터는 페미니즘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가부장의 끝판왕인 남자입니다. 그래서 남녀 간의 뒤집힌 역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생계를 위해 무기력한 상태이면서도 말입니다. 자존심이 셌기 때문에 더욱 불쾌했겠지요. 남편이 늘어놓는 불평불만들이 상당히 재밌습니다.  

 

“(…) ‘곧 결혼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잠시 일할 거야.’ 이런 태도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닌가? 심지어는 남편이 월급을 벌어다주는데도 일하기도 한다니까! 가족이 있어도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아이들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겠지. 반면 아이들이 몇이나 딸리고 충실한 아내가 있는 똑바른 남자는 자기 수입만으로 식구들을 모두 먹여 살리려고 고군분투하겠고!” p. 33

 

 그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우리사회의 여성관은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주 익숙한 논리들을 전개합니다.  

 

 제본사의 길로 들어선 도라의 작업실은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병들고 어린 딸, 남편에게 부당한 이유로 쫓겨난 여자, 동성애자, 흑인 노예, 일하는 여성... 페미니즘을 넓게 정의하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여자의 위치로 격하될 수 있고, 누구나 노예의 위치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그렇게 가장 소외되고 눈에 띄지 않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흑인 노예인 ‘딘’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미국의 흑인노예가 가부장제에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비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꿈꾸는 해방된 여성의 미래는 해방된 흑인들의 오늘날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생각했을 때 도무지 믿어지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을 정도의 야만으로 느껴지는 미래. 그들의 해방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미래. 누구도 그 시절을 옹호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미래.  

 

 딘이 옹호하는 노예들의 절망적 상태는 마치 가부장제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 여성들을 비유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부인, 노예제도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모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자유가 너무 먼 곳으로 사라져서 사람들은 자유를 두려워해요. 노예제도 때문에 사람들은 의존적으로 변한 겁니다. 그건 억지로 삼켜야 하는 약이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는 모든 권위를 빼앗깁니다. 권위가 없으면 투쟁할 대상도 없어져요. 전면적인 반란은 불가능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날 뿐이죠. 마약중독 진단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 마약을 버리게 하지는 못해요. 주변의 모든 아편을 없애고 중독자가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뿐이죠.” p. 376-377

 

 당시에 흑인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던 백인들은, 여성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렇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한 번도 권위를 잃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같은 취급을 받았다간 복수를 꿈꾸게 될 거라는 걸 알죠. 자신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일을 알아요. 그래서 우리가 얼마라도 힘을 얻으면 총을 들고 쫓아올까봐 두려워해요.” p. 486-487

 하지만 흑인들은 해방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차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투쟁도 계속돼야겠지요.  

 

 통쾌하고 유쾌한 페미니즘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이 생각만큼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의 변화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캐릭터의 능동성이 떨어지고, 동기가 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취적으로 위험을 무릎 쓰고 제본사의 길에 접어들고, 성공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후 번번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귀족에게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영 개운하지 않습니다.  

 

 주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끼워 넣다 보니까 정작 주인공인 도라의 의도가 불분명해지기도 합니다. 도라는 주변인물들에 치여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엉뚱한 소동으로 연결되고,  다른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해 의도가 불분명한 방문을 계속합니다. 


 딘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고, 공들여 두 사람 사이를 쌓아올리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를 미행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왜 이러는 걸까 의아하기도 합니다. 


 캐릭터들도 상당히 기능적으로 쓰이는 편입니다. 남편인 피터는 초반 이후로는 그냥 방치되다가 적절한 시기에 사라질 뿐이고, 딸과 도라의 관계도 평면적이며, 잭 같은 캐릭터는 반전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개성 없이 도라와 미소만 주고받습니다.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반전의 재미를 위해 많이 참고 읽어야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는 리얼리즘의 문제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때로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마치 19세기라는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업자의 조수인 ‘피지’에게 얻어맞고 겁박을 당할 때의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도라의 오해가 풀리면서 도리어 피지가 무안한 상황이 되자 도라가 반응합니다. 

 

피지는 모자를 고정하는 핀보다 더 똑바르게 양옆에 두 손을 붙이고 서 있었다. 그가 거의 불쌍할 지경이었다. 남자들은 잘못을 들키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특히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하다가 여자한테 들키는 경우에 그랬다. 이제 어떻게 해야 그를 달래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우리 여자들은 어머니들로부터 화해하는 기술을 완벽하게 훈련받았다. 또한 치부가 드러난 남자들이 느끼는 분노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화보다 훨씬 더 더럽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p. 340

 

 이게 방금 전까지 바닥에 쓰러져 남자에게 발로 차이던 여자가 할 생각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혹시 19세기라는 시대상을 의식한 것은 아닌가 고려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막판의 반전과 위기에 이르면 왜 그랬는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나(막판 반전을 위한 희생이겠죠),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의 대부분이 이런 식의 ‘고구마’로 흘러가는 건 답답한 일입니다. 페미니즘의 승리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기대했던 쾌감이 너무 늦게 옵니다. 

 

 음란서적의 제본을 의뢰하는 상류층 지식인들의 클럽이 중요한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낭독회를 연상시킵니다. 변태 같은 내용의 책을 비밀스럽게 돌려보면서 거기에 여자를 협박하듯 참여시키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그 더러운 노동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아가씨>의 마지막 정사 장면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의 해방이 남성적인 상상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에 걸립니다. 도라는 음란서적을 제본하면서 패러다임에 큰 타격을 받습니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고개를 들고 하늘의 구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이파리도 없는 자작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애통하고 심각했는데도 일에 찌든 나에게는 그 자작나무들이 거대한 회초리처럼 보였다. 회초리를 연상시키는 자작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구름은 채찍을 맞을수록 흥분하는 푹신한 엉덩이 같았다. 이 이미지는 넣어두었다가 다음 번에 채찍질과 관련해서 염소가죽을 제본할 때 자작나무 위에 솜털 같은 구름을 새기고, 그 위에 수채화를 덧붙여서 써먹어야겠다. 내 의식은 이런 식으로 움직였다. 울타리에서 자라는 쐐기풀을 보면 채찍질당하는 둔부가 떠오르고, 수녀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유 그릇인 양 서로를 핥는 고양이가 연상되었다. p. 394-395

 

 이것도 반전을 위한 희생인 것 같은데, 너무 출혈이 큰 희생이죠. 도라라는 캐릭터가 너무 망가져버리니까요. 

 

 도라는 노예 출신 흑인을 고용했다는 이유로 동네사람들과 귀족들로부터 부당한 오해를 받고 일종의 낙인이 찍힙니다. 흑인과 놀아났다는 것이죠. 그 억울함이 채 풀리기도 전에 도라는 그들의 상상력대로 흑인과 사랑을 나눕니다. 딘과의 사랑을 통해 성적 해방을 쟁취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족 남성들과 삐뚤어진 사회적 선입견과 일치한다는 것이 도라의 한계인 것처럼 그려져서 안타까웠습니다.  

 

 ‘고통이 소유욕에서 온다’는 깨달음도 조금 난데없습니다. 생존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성들은 해탈한 사람처럼 어떤 것도 욕망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딘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정당화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풀을 붙이는 동안 딘이 대답했다. “부인, 때로는 자신이 인간 이하라고 느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나를 인간 이상으로 느끼게도 해주죠. 내가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일깨워주니까요.” p. 454

 

 모두 지배 계층이 피지배 계층에게 내세우는 보수적인 가치관들입니다. 아마도 딘이라는 남성 캐릭터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왔기 때문에 더욱 거부감이 드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무지한 도라를 일깨우는 ‘맨스플레인’을 시전 합니다. 이것 또한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딘의 말은 작가의 그런 의도마저 의심하게 만듭니다.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는 19세기 여성에게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말입니까? 

 

“(…) 도라, 노예제도의 반대는 뭘까요?” 

“자유죠.”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면 통제? 자기통제 말이에요. 아니면 이 둘이 같은 얘기일까요?”  

자기통제. 우리 삶의 책에 대해, 성 바르톨로메오에 의해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 영혼에 제시된 선택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며, 우리는 우리의 책을 잘 써야 한다. p. 490-491

 

 치밀한 자료 조사나 야심 찬 시도들을 봤을 때는 작가의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능숙함이 보입니다. 아마도 제가 지적한 문제점들도 초보 작가에게는 너무 가혹한 질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이기에, 앞으로의 작품 세계를 지켜보며 첫 작품을 만회하는 모습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 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 글을 써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안의 페이지들처럼 텅 빈 표정으로 뭘 써야 하지, 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의 꿈을 써요. 당신의 생각. 당신의 공상.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목소리를 써요. 당신은 일스 씨나 매로우 씨, 비숍 씨, 네글리 씨 등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실체를 써요. 당신 자신을 위해 살아요.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어쨌거나 우리는 남들에게 전시되지 않던가요? 나는 종종 그렇던데요. p. 523

 

 그래도 그녀는 여성이 저항하고, 결국은 성공하는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써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오롯이 담아냈습니다. 그녀의 그 첫 번째 시도는 작품 속 도라의 그것처럼 어설프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여성들에게는 별로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결국은 응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는 34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다른 여성들이 그녀의 열정을 이어받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바톤이 넘겨졌습니다. 그들의 모든 질주를, 작품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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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고양이 1~2 세트- 전2권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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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 소통을 꿈꾸는 암고양이 바스테트와 지적인 수고양이 피타고라스가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고 공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갑게 읽을 것 같다. 단지 고양이의 뛰어남을 강조하다 보니까 개를 폄하하는 장면이 많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개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고양이는 악당으로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개들은 왜 저렇게 생겨 먹었을까?」

포효하는 개들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피타고라스에게 묻는다.

「인간 주인의 의식이 스며들어서 그래. 난폭한 주인을 만나면 똑같이 난폭해지고 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주인을 만나면 또 그렇게 되는 거야. 개들이 스스로 성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런 개들과 달리 우리는 주체적이잖아. 우리 기질을 스스로 결정하니까. 안 그래?」 2권 p. 51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설정들이 엉성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약간 적당히 편의적으로 버무려놓은 느낌이 있다. 이것은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라기보다는 능숙함에서 오는 느낌 같다. 소품 같은 느낌도 있어서 작가가 힘을 빼고 쉽게 접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를 주제로 한다면 쥐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쥐가 권력을 잡아 인류를 위협한다면 그 힘의 원천은 페스트인 것이 자연스럽다. 역사 속 고양이는 숭배의 대상인 적이 많고 영적인 세계와 많이 엮였으니 그런 면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캐릭터에 입혀진다. 그리고 고양이가 다른 동물과 싸운다면, 고양이의 왕격인 사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충 이런 식의 예측 가능한 발상 자체가 적당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주제적으로도 맥을 같이 하기에 더 분명해 진다. 작품의 논조는 전체적으로 ‘역지사지’와 ‘계몽’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두 가지가 동화에서나 쓰이는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같은 독자를 상정하고 아주 단순하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목표로 삼는 것도 아주 심플하다. 독자가 고양이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체험한다. 역시나 동화나 우화 수준의 장치 사용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파트리샤, 우리 입장이 한번 돼 봐요. 당신들은 우리한테 음식다운 음식을 못 먹게 하죠, 성생활의 기쁨도 못 누리게 하죠, 게다가 멋대로 주인을 정해 주고 우리 이름을 정해 주고 살 곳까지 정해 주죠. 그런데 우리더러 <거만>하다고요? 우리 시중을 들어야 할 인간들한테 고양이들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게 내 눈엔 이상하게 보여요.」 2권 p. 156

     

추신 6. 마지막으로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보다 덩치가 다섯 배는 크고 소통도 불가능한 존재가 여러분을 마음대로 다룬다면, 문손잡이가 닿지 않는 방에 여러분을 가두고 재료를 알 수도 없는 음식을 기분 내키는 대로 준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이들 처지도 이와 비슷한데, 기간이 짧아요. 그렇죠?) 2권 p. 236-237, <작가의 말>

     

 그렇게 독자가 주인공인 암고양이 바스테트에게 감정이입을 한 상태에서, 본능과 직관만 알고 있던 무지한 그에게 피타고라스가 인간의 지식을 설명해준다. 이는 결론적으로 유식한 저자가 무지몽매한 독자들에게 이것저것 교양 상식 같은 걸 가르쳐주고 있는 모양새를 만든다. 

 이런 관계는 독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뭔가 잘난 척 하면서 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 독자들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식을 얻기 위한 책도 아니고 소설을 읽으면서 노골적인 강의를 듣고 싶은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사지처럼 마치 아이에게 가르치듯이(실제로는 고양이에게 가르치지만) 독자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모두를 계몽시켜야 해요. 그러려면 우선 우리의 정신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지식이 주입되면 왜곡해서 이해하게 되니까요. 지식의 도구를 건설이 아닌 파괴에 사용할 테니까요. 실재적 정보를 거짓말로 둔갑시켜 동시대인들을 억압하는 데 쓸 테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프랑스 인본주의자 라블레는 <의식의 뒷받침이 없는 과학은 영혼의 파괴를 부를 뿐이다>라고 말했죠.」2권 p. 197

     

 작가의 선량한 의도는 알겠지만 상당히 위험한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더군다나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의 구도가 어쩔 수 없이 남녀 주인공의 구도가 되면서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느낌마저 준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남녀 주인공을 ‘시골’과 ‘도시’로 나눈 것을 떠올린다. 

     

 암컷인 바스테트는 자연에 더 가깝다. 본능에 충실하고, 직관과 영적 능력이 충만하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하다. 반대로 수컷인 피타고라스는 금욕적이고 이성적이다. 거의 수도승같은 분위기에 로봇이나 컴퓨터처럼 사고하고 움직인다. 절대로 흥분하는 때가 없고 자기 감정을,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그런 성역할에서 벗어난 캐릭터도 있지만(대표적으로 펠릭스라는 수컷 고양이) 남녀 주인공이 이런 구도다 보니까 성적 고정관념이 투사된 것 같아서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암튼 두 캐릭터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종국에는 같은 깨달음 속으로 합치된다. 바스테트는 직관과 영적 능력에 기댄 소통으로, 피타고라스는 이성과 논리, 지식으로 소통의 방식을 찾아낸다. 

     

 하지만 항상 우위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던 피타고라스보다 바스테트의 마지막 깨달음이 훨씬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려지면서, 작가는 여성이 지닌 특유의 성질(?)이 미래에 더 중요한 자질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캐릭터에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해 놓고 여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손을 들어주는, 병주고 약주고 식의 태도를 드러낸다.

     

 바스테트의 깨달음이 작가의 미래관과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인데,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들은 모두 형태만 다를 뿐 사실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혹은 원래 하나인 존재다. 각자의 생각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고, 심지어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란 무의미하고 타인이나 적으로 간주하는 것도 오해에 불과하다. 불행한 삶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자신의 욕망이 선택한 것이고,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발전을 돕는다.

     

 상당히 평화적인 사고방식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안일하고 보수적인 생각 같기도 하다. 작품 내내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끝내는 종교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것도 재밌다. 물론 그 종교는 특정 신과 교리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신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당히 신비주의적이기도 하고, 엘리트적인 느낌도 든다. 설득력이나 논리를 떠나서 일단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서 얘기했듯이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처럼 역지사지와 계몽적·교조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사실 아이들 동화에서도 이런 점이 두드러지면 좋은 작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보수적이고 현학적인 종교철학을 해결책으로 내놓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작가를 상당히 오만하게 보이게 만든다.

     

내일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에 안주하고 몸의 안위만 추구하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2권 p. 176

     

 작가는 무슨 기준으로 계몽시킬 사람을 정하는 걸까. 지식은 어느 정도까지 쌓아야 작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본능대로 생각없이 사는 것은 과연 죄일까. 마음 편히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펠릭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매사에 무덤덤하던 펠릭스를 떠올린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도대체 야망이라곤 없던 펠릭스. 그가 삶에 거는 기대가 없었던 만큼 삶도 그에게 되돌려 주는 게 없었지. 2권 p. 171

     

 어찌 보면 인간이 소설 속 모습처럼 전쟁과 환경파괴의 결과에 시달리는 건 본능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원래 본능대로 살던 고양이들이 다시 계몽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이 틀렸다기 보다는, 고양이의 입장에 충실하다 보니 인간의 입장은 좀 더 소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고양이가 보는 것만큼 인간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고양이가 생각하듯이 그 문제의 해결책이 그리 단순하지도 않다. 


 고양이는 오만하다.(혹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고양이를 그린 작품이어서 오만함은 필수적인 요소였는지도 모르겠다. 서두에 소개되는 글이 생각난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을 해 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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