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대미지의 일기
벨린다 스탈링 지음, 한은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첫 작품다운 미숙함과 첫 작품답지 않은 능숙함이 모두 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2006년 작고한 탓에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더 많이 남는 작품입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남편의 병환으로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이 되자 위험을 무릎 쓰고 부인이 남편을 대신해 제본소를 이끈다.’ 

 

 19세기라는 시대와 제본사라는 독특한 소재에 ‘여성’이 만나면서 이 작품은 대단히 흥미로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여성해방의 방향이 느껴집니다. 첫 번째는 직업인으로서의 해방, 두 번째로는 지식에 대한 해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섹슈얼한 육체적 해방.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위해 주인공이 제본사로 나서면서 본의 아니게 직업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제본을 하려면 책을 읽어봐야 하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탐구도 가능해 집니다. 거기에 그 책들이 당시의 음란서적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탐구까지 수행하게 됩니다. 페미니즘 소설로서 아주 좋은 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 도라의 남편인 피터는 페미니즘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가부장의 끝판왕인 남자입니다. 그래서 남녀 간의 뒤집힌 역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생계를 위해 무기력한 상태이면서도 말입니다. 자존심이 셌기 때문에 더욱 불쾌했겠지요. 남편이 늘어놓는 불평불만들이 상당히 재밌습니다.  

 

“(…) ‘곧 결혼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잠시 일할 거야.’ 이런 태도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닌가? 심지어는 남편이 월급을 벌어다주는데도 일하기도 한다니까! 가족이 있어도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아이들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겠지. 반면 아이들이 몇이나 딸리고 충실한 아내가 있는 똑바른 남자는 자기 수입만으로 식구들을 모두 먹여 살리려고 고군분투하겠고!” p. 33

 

 그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우리사회의 여성관은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주 익숙한 논리들을 전개합니다.  

 

 제본사의 길로 들어선 도라의 작업실은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병들고 어린 딸, 남편에게 부당한 이유로 쫓겨난 여자, 동성애자, 흑인 노예, 일하는 여성... 페미니즘을 넓게 정의하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여자의 위치로 격하될 수 있고, 누구나 노예의 위치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그렇게 가장 소외되고 눈에 띄지 않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흑인 노예인 ‘딘’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미국의 흑인노예가 가부장제에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비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꿈꾸는 해방된 여성의 미래는 해방된 흑인들의 오늘날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생각했을 때 도무지 믿어지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을 정도의 야만으로 느껴지는 미래. 그들의 해방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미래. 누구도 그 시절을 옹호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미래.  

 

 딘이 옹호하는 노예들의 절망적 상태는 마치 가부장제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 여성들을 비유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부인, 노예제도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모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자유가 너무 먼 곳으로 사라져서 사람들은 자유를 두려워해요. 노예제도 때문에 사람들은 의존적으로 변한 겁니다. 그건 억지로 삼켜야 하는 약이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는 모든 권위를 빼앗깁니다. 권위가 없으면 투쟁할 대상도 없어져요. 전면적인 반란은 불가능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날 뿐이죠. 마약중독 진단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 마약을 버리게 하지는 못해요. 주변의 모든 아편을 없애고 중독자가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뿐이죠.” p. 376-377

 

 당시에 흑인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던 백인들은, 여성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렇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한 번도 권위를 잃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같은 취급을 받았다간 복수를 꿈꾸게 될 거라는 걸 알죠. 자신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일을 알아요. 그래서 우리가 얼마라도 힘을 얻으면 총을 들고 쫓아올까봐 두려워해요.” p. 486-487

 하지만 흑인들은 해방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차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투쟁도 계속돼야겠지요.  

 

 통쾌하고 유쾌한 페미니즘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이 생각만큼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의 변화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캐릭터의 능동성이 떨어지고, 동기가 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취적으로 위험을 무릎 쓰고 제본사의 길에 접어들고, 성공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후 번번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귀족에게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영 개운하지 않습니다.  

 

 주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끼워 넣다 보니까 정작 주인공인 도라의 의도가 불분명해지기도 합니다. 도라는 주변인물들에 치여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엉뚱한 소동으로 연결되고,  다른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해 의도가 불분명한 방문을 계속합니다. 


 딘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고, 공들여 두 사람 사이를 쌓아올리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를 미행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왜 이러는 걸까 의아하기도 합니다. 


 캐릭터들도 상당히 기능적으로 쓰이는 편입니다. 남편인 피터는 초반 이후로는 그냥 방치되다가 적절한 시기에 사라질 뿐이고, 딸과 도라의 관계도 평면적이며, 잭 같은 캐릭터는 반전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개성 없이 도라와 미소만 주고받습니다.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반전의 재미를 위해 많이 참고 읽어야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는 리얼리즘의 문제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때로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마치 19세기라는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업자의 조수인 ‘피지’에게 얻어맞고 겁박을 당할 때의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도라의 오해가 풀리면서 도리어 피지가 무안한 상황이 되자 도라가 반응합니다. 

 

피지는 모자를 고정하는 핀보다 더 똑바르게 양옆에 두 손을 붙이고 서 있었다. 그가 거의 불쌍할 지경이었다. 남자들은 잘못을 들키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특히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하다가 여자한테 들키는 경우에 그랬다. 이제 어떻게 해야 그를 달래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우리 여자들은 어머니들로부터 화해하는 기술을 완벽하게 훈련받았다. 또한 치부가 드러난 남자들이 느끼는 분노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화보다 훨씬 더 더럽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p. 340

 

 이게 방금 전까지 바닥에 쓰러져 남자에게 발로 차이던 여자가 할 생각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혹시 19세기라는 시대상을 의식한 것은 아닌가 고려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막판의 반전과 위기에 이르면 왜 그랬는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나(막판 반전을 위한 희생이겠죠),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의 대부분이 이런 식의 ‘고구마’로 흘러가는 건 답답한 일입니다. 페미니즘의 승리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기대했던 쾌감이 너무 늦게 옵니다. 

 

 음란서적의 제본을 의뢰하는 상류층 지식인들의 클럽이 중요한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낭독회를 연상시킵니다. 변태 같은 내용의 책을 비밀스럽게 돌려보면서 거기에 여자를 협박하듯 참여시키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그 더러운 노동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아가씨>의 마지막 정사 장면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의 해방이 남성적인 상상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에 걸립니다. 도라는 음란서적을 제본하면서 패러다임에 큰 타격을 받습니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고개를 들고 하늘의 구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이파리도 없는 자작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애통하고 심각했는데도 일에 찌든 나에게는 그 자작나무들이 거대한 회초리처럼 보였다. 회초리를 연상시키는 자작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구름은 채찍을 맞을수록 흥분하는 푹신한 엉덩이 같았다. 이 이미지는 넣어두었다가 다음 번에 채찍질과 관련해서 염소가죽을 제본할 때 자작나무 위에 솜털 같은 구름을 새기고, 그 위에 수채화를 덧붙여서 써먹어야겠다. 내 의식은 이런 식으로 움직였다. 울타리에서 자라는 쐐기풀을 보면 채찍질당하는 둔부가 떠오르고, 수녀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유 그릇인 양 서로를 핥는 고양이가 연상되었다. p. 394-395

 

 이것도 반전을 위한 희생인 것 같은데, 너무 출혈이 큰 희생이죠. 도라라는 캐릭터가 너무 망가져버리니까요. 

 

 도라는 노예 출신 흑인을 고용했다는 이유로 동네사람들과 귀족들로부터 부당한 오해를 받고 일종의 낙인이 찍힙니다. 흑인과 놀아났다는 것이죠. 그 억울함이 채 풀리기도 전에 도라는 그들의 상상력대로 흑인과 사랑을 나눕니다. 딘과의 사랑을 통해 성적 해방을 쟁취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족 남성들과 삐뚤어진 사회적 선입견과 일치한다는 것이 도라의 한계인 것처럼 그려져서 안타까웠습니다.  

 

 ‘고통이 소유욕에서 온다’는 깨달음도 조금 난데없습니다. 생존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성들은 해탈한 사람처럼 어떤 것도 욕망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딘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정당화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풀을 붙이는 동안 딘이 대답했다. “부인, 때로는 자신이 인간 이하라고 느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나를 인간 이상으로 느끼게도 해주죠. 내가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일깨워주니까요.” p. 454

 

 모두 지배 계층이 피지배 계층에게 내세우는 보수적인 가치관들입니다. 아마도 딘이라는 남성 캐릭터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왔기 때문에 더욱 거부감이 드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무지한 도라를 일깨우는 ‘맨스플레인’을 시전 합니다. 이것 또한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딘의 말은 작가의 그런 의도마저 의심하게 만듭니다.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는 19세기 여성에게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말입니까? 

 

“(…) 도라, 노예제도의 반대는 뭘까요?” 

“자유죠.”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면 통제? 자기통제 말이에요. 아니면 이 둘이 같은 얘기일까요?”  

자기통제. 우리 삶의 책에 대해, 성 바르톨로메오에 의해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 영혼에 제시된 선택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며, 우리는 우리의 책을 잘 써야 한다. p. 490-491

 

 치밀한 자료 조사나 야심 찬 시도들을 봤을 때는 작가의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능숙함이 보입니다. 아마도 제가 지적한 문제점들도 초보 작가에게는 너무 가혹한 질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이기에, 앞으로의 작품 세계를 지켜보며 첫 작품을 만회하는 모습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 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 글을 써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안의 페이지들처럼 텅 빈 표정으로 뭘 써야 하지, 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의 꿈을 써요. 당신의 생각. 당신의 공상.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목소리를 써요. 당신은 일스 씨나 매로우 씨, 비숍 씨, 네글리 씨 등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실체를 써요. 당신 자신을 위해 살아요.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어쨌거나 우리는 남들에게 전시되지 않던가요? 나는 종종 그렇던데요. p. 523

 

 그래도 그녀는 여성이 저항하고, 결국은 성공하는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써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오롯이 담아냈습니다. 그녀의 그 첫 번째 시도는 작품 속 도라의 그것처럼 어설프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여성들에게는 별로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결국은 응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는 34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다른 여성들이 그녀의 열정을 이어받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바톤이 넘겨졌습니다. 그들의 모든 질주를, 작품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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