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고양이 1~2 세트-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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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 소통을 꿈꾸는 암고양이 바스테트와 지적인 수고양이 피타고라스가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고 공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갑게 읽을 것 같다. 단지 고양이의 뛰어남을 강조하다 보니까 개를 폄하하는 장면이 많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개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고양이는 악당으로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개들은 왜 저렇게 생겨 먹었을까?」

포효하는 개들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피타고라스에게 묻는다.

「인간 주인의 의식이 스며들어서 그래. 난폭한 주인을 만나면 똑같이 난폭해지고 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주인을 만나면 또 그렇게 되는 거야. 개들이 스스로 성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런 개들과 달리 우리는 주체적이잖아. 우리 기질을 스스로 결정하니까. 안 그래?」 2권 p. 51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설정들이 엉성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약간 적당히 편의적으로 버무려놓은 느낌이 있다. 이것은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라기보다는 능숙함에서 오는 느낌 같다. 소품 같은 느낌도 있어서 작가가 힘을 빼고 쉽게 접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를 주제로 한다면 쥐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쥐가 권력을 잡아 인류를 위협한다면 그 힘의 원천은 페스트인 것이 자연스럽다. 역사 속 고양이는 숭배의 대상인 적이 많고 영적인 세계와 많이 엮였으니 그런 면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캐릭터에 입혀진다. 그리고 고양이가 다른 동물과 싸운다면, 고양이의 왕격인 사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충 이런 식의 예측 가능한 발상 자체가 적당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주제적으로도 맥을 같이 하기에 더 분명해 진다. 작품의 논조는 전체적으로 ‘역지사지’와 ‘계몽’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두 가지가 동화에서나 쓰이는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같은 독자를 상정하고 아주 단순하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목표로 삼는 것도 아주 심플하다. 독자가 고양이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체험한다. 역시나 동화나 우화 수준의 장치 사용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파트리샤, 우리 입장이 한번 돼 봐요. 당신들은 우리한테 음식다운 음식을 못 먹게 하죠, 성생활의 기쁨도 못 누리게 하죠, 게다가 멋대로 주인을 정해 주고 우리 이름을 정해 주고 살 곳까지 정해 주죠. 그런데 우리더러 <거만>하다고요? 우리 시중을 들어야 할 인간들한테 고양이들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게 내 눈엔 이상하게 보여요.」 2권 p. 156

     

추신 6. 마지막으로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보다 덩치가 다섯 배는 크고 소통도 불가능한 존재가 여러분을 마음대로 다룬다면, 문손잡이가 닿지 않는 방에 여러분을 가두고 재료를 알 수도 없는 음식을 기분 내키는 대로 준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이들 처지도 이와 비슷한데, 기간이 짧아요. 그렇죠?) 2권 p. 236-237, <작가의 말>

     

 그렇게 독자가 주인공인 암고양이 바스테트에게 감정이입을 한 상태에서, 본능과 직관만 알고 있던 무지한 그에게 피타고라스가 인간의 지식을 설명해준다. 이는 결론적으로 유식한 저자가 무지몽매한 독자들에게 이것저것 교양 상식 같은 걸 가르쳐주고 있는 모양새를 만든다. 

 이런 관계는 독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뭔가 잘난 척 하면서 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 독자들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식을 얻기 위한 책도 아니고 소설을 읽으면서 노골적인 강의를 듣고 싶은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사지처럼 마치 아이에게 가르치듯이(실제로는 고양이에게 가르치지만) 독자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모두를 계몽시켜야 해요. 그러려면 우선 우리의 정신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지식이 주입되면 왜곡해서 이해하게 되니까요. 지식의 도구를 건설이 아닌 파괴에 사용할 테니까요. 실재적 정보를 거짓말로 둔갑시켜 동시대인들을 억압하는 데 쓸 테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프랑스 인본주의자 라블레는 <의식의 뒷받침이 없는 과학은 영혼의 파괴를 부를 뿐이다>라고 말했죠.」2권 p. 197

     

 작가의 선량한 의도는 알겠지만 상당히 위험한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더군다나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의 구도가 어쩔 수 없이 남녀 주인공의 구도가 되면서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느낌마저 준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남녀 주인공을 ‘시골’과 ‘도시’로 나눈 것을 떠올린다. 

     

 암컷인 바스테트는 자연에 더 가깝다. 본능에 충실하고, 직관과 영적 능력이 충만하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하다. 반대로 수컷인 피타고라스는 금욕적이고 이성적이다. 거의 수도승같은 분위기에 로봇이나 컴퓨터처럼 사고하고 움직인다. 절대로 흥분하는 때가 없고 자기 감정을,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그런 성역할에서 벗어난 캐릭터도 있지만(대표적으로 펠릭스라는 수컷 고양이) 남녀 주인공이 이런 구도다 보니까 성적 고정관념이 투사된 것 같아서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암튼 두 캐릭터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종국에는 같은 깨달음 속으로 합치된다. 바스테트는 직관과 영적 능력에 기댄 소통으로, 피타고라스는 이성과 논리, 지식으로 소통의 방식을 찾아낸다. 

     

 하지만 항상 우위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던 피타고라스보다 바스테트의 마지막 깨달음이 훨씬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려지면서, 작가는 여성이 지닌 특유의 성질(?)이 미래에 더 중요한 자질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캐릭터에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해 놓고 여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손을 들어주는, 병주고 약주고 식의 태도를 드러낸다.

     

 바스테트의 깨달음이 작가의 미래관과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인데,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들은 모두 형태만 다를 뿐 사실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혹은 원래 하나인 존재다. 각자의 생각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고, 심지어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란 무의미하고 타인이나 적으로 간주하는 것도 오해에 불과하다. 불행한 삶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자신의 욕망이 선택한 것이고,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발전을 돕는다.

     

 상당히 평화적인 사고방식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안일하고 보수적인 생각 같기도 하다. 작품 내내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끝내는 종교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것도 재밌다. 물론 그 종교는 특정 신과 교리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신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당히 신비주의적이기도 하고, 엘리트적인 느낌도 든다. 설득력이나 논리를 떠나서 일단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서 얘기했듯이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처럼 역지사지와 계몽적·교조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사실 아이들 동화에서도 이런 점이 두드러지면 좋은 작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보수적이고 현학적인 종교철학을 해결책으로 내놓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작가를 상당히 오만하게 보이게 만든다.

     

내일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에 안주하고 몸의 안위만 추구하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2권 p. 176

     

 작가는 무슨 기준으로 계몽시킬 사람을 정하는 걸까. 지식은 어느 정도까지 쌓아야 작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본능대로 생각없이 사는 것은 과연 죄일까. 마음 편히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펠릭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매사에 무덤덤하던 펠릭스를 떠올린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도대체 야망이라곤 없던 펠릭스. 그가 삶에 거는 기대가 없었던 만큼 삶도 그에게 되돌려 주는 게 없었지. 2권 p. 171

     

 어찌 보면 인간이 소설 속 모습처럼 전쟁과 환경파괴의 결과에 시달리는 건 본능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원래 본능대로 살던 고양이들이 다시 계몽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이 틀렸다기 보다는, 고양이의 입장에 충실하다 보니 인간의 입장은 좀 더 소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고양이가 보는 것만큼 인간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고양이가 생각하듯이 그 문제의 해결책이 그리 단순하지도 않다. 


 고양이는 오만하다.(혹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고양이를 그린 작품이어서 오만함은 필수적인 요소였는지도 모르겠다. 서두에 소개되는 글이 생각난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을 해 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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