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레볼루션 - 시간을 지배하는 압도적 플랫폼
로버트 킨슬.마니 페이반 지음, 신솔잎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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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튜브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늘어놓는 책은 아니다.  

유튜브가 산업 전반에 미치는 거시적인 효과들을 조망한다. 

그래서 오히려 유튜버가 되는 자잘한 팁들을 보기 전에 읽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유튜버의 수익 구조에 대한 챕터 ‘크리에이터의 수익은 어디서 오는가’) 

물론 유튜버에 관심이 없는 나 같은 독자들도 유튜브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일단 저자가 유튜브의 콘텐츠, 광고, 영업, 마케팅, 크리에이터 운영 전반에 걸친 사업을 책임지는 CBO(Chief Business Officer)라고 한다. 뭔가 대단히 중요한 직책인 것 같다. 어쨌거나 유튜브의 핵심에 있는 사람이 쓴 책이라 공신력이 있는 편이다. 물론 자기 회사(유튜브) 홍보나 감싸는 말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업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기에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관계자 인터뷰들의 생생함도 업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유튜브를 포함한 스트리밍 산업의 여파와 그 주인공들을 ‘스트림펑크Streampunks’라고 명명하고, 유튜브가 바꿔버린 세계적 산업, 문화, 언론의 변화를 조리 있게 설명하는데, 

처음에 유튜버 개개인에게 맞춰졌던 시점은 점점 넓어져 산업 전반을 거쳐 세대론에 이르고, 미래의 미디어와 다음 세대에 대한 전망으로 끝을 맺는다. 그 과정이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유튜브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느냐를 말하는 동시에 유튜브의 등장을 필요로 했던 새로운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점이 특히 재미있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 새로운 세대는 크게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와 지금의 10대로 나뉜다. (지금의 10대는 마지막에 ‘Z세대’라는 이름으로 따로 다룬다) 결국 현재의 10대, 20대, 30대를 말한다. 

 유튜브와 새로운 세대는 서로를 발전시켰고, 나머지 모든 것들을 변화시켰다. 사실상 유튜브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바로 이 세대다. 

 그들에게 유튜브는 정체성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모두 처음 들었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주간지 <버라이어티Variety>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설문조사 결과에 많이 놀랄 것 같다.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상위 6위까지가 모두 유튜버였다. 그 뒤를 이어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조니 뎁Johnny Depp, 레어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 등의 이름이 올랐다. (…)  

유튜브에서 10대와 밀레니얼 구독자를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유튜버가 친구나 가족보다 자신을 잘 이해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40퍼센트였다(두 딸을 둔 아버지로서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크리에이터가 자신의 삶 또는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놓았다고 답한 사람은 무려 60퍼센트에 달했다. p. 27

 

 우리는 유튜브가 익숙한 세상에 살고 있고, Z세대나 밀레니얼 세대와도 동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유튜브도 잘 알고 있고, 새로운 세대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튜브 세대는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포맷으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등장으로 개인이 동영상을 제작하는데 좋은 환경을 가지게 됐다. 이런 것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 ‘새로운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현실도피가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말은 어떤가. 아니면 다양한 인종의 영상이 고루 인기를 끄는 중에 유독 흑인 영상의 조회수가 낮다는 건 알고 있었는가. 유튜브의 조회수를 좌우하는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제가 트리니다드 출신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트리니다드 조회 수가 엄청나게 올라가요. 그저 그 나라 이름을 말한 것만으로요. 호주나 캐나다에서 트래픽 수가 늘어나면 영상에서 일종의 인사말을 건네요. ‘호주의 총리가 무슨무슨 얘기를 했는데’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호주의 팬들이 무척 좋아하거든요. 영상에서 아주 짧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이 커져요.” p. 119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쓰는 전략이 하나 있어요. 〔영상이 시작되고〕 처음 15초 안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거죠. 우린 다 인터넷 세대잖아요. 누구나 어느 정도의 주의력결핍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는 영상에 15초 이상 집중하질 않아요. 거기에 5초가량의 광고가 있잖아요? 그러니 15초에서 5초를 제하고 남은 10초 안에 시청자의 이목을 사로잡아야 해요.” p. 183

 

 ‘진짜 뉴스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열 번째 챕터에 이르면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먼저 ‘젊은 세대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잘못된 통념에 대해 일침을 가하더니, 그들은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류 미디어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러 가지 언론과 정부의 거짓말 스캔들을 목격한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얄팍한 눈속임에 속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굉장한 박탈감을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량 살상 무기의 시대였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미국 정부의 공모, 그리고 주류 매체에 대한 불만까지 가득한 시대였죠.” 

밀레니얼 세대가 주류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p. 242

 

그들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 

 

“(…) 베이비부머 세대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를 펼치거나 <60분>, <NBC 나이틀리 뉴스NBC Nightly News> 같은 시사 프로그램을 보거든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라고 듣고는 ‘그렇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군’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달라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그 나라에서 전해지는, 또는 대안 매체에서 게시하는 다양한 블로그를 읽고 영상을 봅니다. 그러면서 ‘아, 실상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죠. 그렇게 자란 세대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여기 있습니다’하며 무언가를 제시해서는 먹히지 않습니다.” p. 245

 

 주류 미디어의 뉴스에 속지 않으려는 새로운 세대의 태도는 반대로 광고가 노골적인 마케팅 전략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훌륭한 콘텐츠로서 만들어진 광고라면 기꺼이 그것을 광고 이상의 것으로 높이 평가해준다. 

 

“(…) 요즘 젊은 세대는 정말 똑똑합니다. ‘오, 나 스파이크 존즈 좋아하는데. 그 사람 영화를 걸다니,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마냥 ‘딩동댕동’만 들려주면서 인텔 고유의 무언가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p. 266

 

 이런 능동적인 시청자는 이전 세대에는 없던 새로운 세대의 특징이다. 이것이 유튜브와 결합되어 모든 걸 새롭게 바꿔버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대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밀레니얼 세대도 나이를 먹고, Z세대는 이미 소비력을 갖추고 있다. 곧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흐름 그 자체다. 확실히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했다. 지금 눈앞의 세대론에 갇혀서 큰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제아무리 유명한 유튜버라도 말이다. 

 

“이분들이 살아온 시대도 존중합니다.” 스쿠터가 말했다. “저도 언젠가 그 사람들처럼 될 거예요. 머지않았죠.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까요. 제가 60~70의 나이가 됐을 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과학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만큼 40~50대가 되면 벌써 신기술이나 트렌드를 놓치게 될 거예요. 당장 내년이 될지도 모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저를 얼빠진 사람이라고 말했던 그 기준과 방법들이 현재는 너무도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p. 300

 

 이제 권위 있는 미디어와 스타는 경계가 희미해지고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유튜브라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평등한 매체로 인해 누구나 CNN이 될 수 있고, MTV가 될 수 있고, 마이클 잭슨이 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대한 일화들은 정말 극적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될 것이다. 

 

“유튜브의 규모와 더해져 우리는 차세대 CNN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차세대 CNN보다 열 배는 더 대단해질 겁니다.” p. 256

 

유튜브는 차세대 HBO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차세대 MTV 자리를 노리는 것도 아니며, 차세대 타임워너라는 이름도 원치 않는다. 유튜브의 미래는 세상에 아직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그 무엇이다. p. 344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유튜브 레볼루션, 유튜브 ‘혁명’이다.  

변화의 흐름을 선도할 수는 없더라도, 당장 떼돈을 버는 유튜버는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변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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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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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p. 7 


 어머니의 칼은 어머니를 여자나 인간이 아닌 한 마리의 짐승으로 만드는 도구다. 필요에 의해 집었지만, 어느새 도구가 정체성이 된 인간. 칼은 맹수의 송곳니 같은 것이다. 


 짐승인 어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끼 입에 먹을 것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새끼가 먹는 것은 희생당한 어떤 생명체다. 식물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어머니의 칼은 가차 없이 그것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새끼가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를 꺼내 막 썰었을 때, 순하게 숨 죽은 배추 줄기 사이로 신선한 핏물처럼 흘러나오던 김칫국과 자그마한 기포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국수를 삶으면 나는 그 옆에 서서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어머니는 갓 익은 면발 한두 젓가락을 건져 주었다. 그런 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 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 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肉〕 맛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p. 15-16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송곳니는 어머니 자신을 물어뜯는다. 칼자국은 그렇게 어머니의 손을 가로지른다. 손을 베인 어머니의 피가 국수 그릇에 묻었을 때, 손님이었던 할머니는 놀라지도 나무라지도 않는다. 어미가 송곳니에 손을 베는 일은─그 또한 어미였던─할머니에게 놀랄 일도 나무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끼를 먹이다 보면 생기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머니가 속한 짐승의 세계는 누구나 바람을 피우는 육체의 공간이고, 그러면서도 부끄럼을 모르는 자연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어머니는 딸을 자랑하기 위한 공간으로 목욕탕을 선택한다.  


내 몸이 제법 어른 꼴을 갖추게 되고부터 어머니는 나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려 했다. 어머니가 특히 좋아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어머니는 발가벗겨진 내 육체를, 그러니까 그냥 자식이 아니라 다 큰 자식의 풍성한 육체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그걸 발견할 수 있었다. 봐라, 내 새끼다. 털도 나고 젖도 있고 엉덩이도 크다! p. 71-72 


 그 세계에서 아버지의 존재 이유는 양육이 아니라 번식에만 한정된 세계다. 양육은 온전히 어머니에게만 떠넘겨진다. 아버지는 칼을 쥐고 위협만 할 뿐, 제대로 쓸 수 없는 존재다. 그나마도 자식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 큰 자식에게 칼을 쥐여주면서도 끝까지 자기 칼은 내려놓지 않는 세계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동정하거나 나무라고,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성질을 낸 뒤 전화를 끊었다.  

“내가 니 새끼냐?” p. 58 


 그리고 그 짐승의 세계는 이제 몰락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 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사람들 중 더 작은 나라 사람들이 쓰는 그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벵골 호랑이에게는 벵골 호랑이의 말이,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말이 필요하듯. 나이 들어 문득 쳐다보게 되는 어머니의 말.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관광지처럼 곧 사라질 것 같다 예감한다. p. 9 


 화자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을 수가 없다. 평생 밥을 만들다 어미가 죽은 마당에 밥이 넘어가면 이상한 일이다.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가 어머니에게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한국에 밥하러 오셨어요?” 한국의 어머니들은 밥하러 이 땅에 온 것 같다) 


 밥을 거부하는 화자에게 남편을 비롯한 친척들은 먹기를 강요한다. 임신 3개월인 화자를 어미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화자는 짐승이 되기를 끝끝내 거부하고 어머니의 부엌으로 간다. 


 자신을 키워낸, 수많은 것들을 죽여 온 그 작업대에서 칼을 집어 든 화자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칼을 쓰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단지 사과하나를 깎아먹었을 뿐이지만 그것은 엄청난 도약이고, 여자에게 짐승이 되기를 강요하던 시대와의 작별을 의미한다.  


사과 조각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축축한 혀를 굴려 그 맛을 음미했다. 씹고 빨고 굴리다 나도 모르게 꿀꺽. 그런 뒤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아, 맛있다!” p. 79-80 


 하지만 저자는 어머니가 속한 짐승의 시대를 거부하면서도,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에 버려두고 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의 짐승성은 시대에 의한 강요였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접살림에 쓸 칼을 품에 안고 집으로 오는 어머니의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고 표현한 것이 못내 신경이 쓰인다. 마치 그것이 어머니의 꿈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어서다. 


그날, 마분지에 둘둘 말은 칼을 품고 산동네를 오르던 어머니의 가슴은, 흡사 연애편지를 안고 달리는 처녀처럼 마구 두근거렸더랬다. 그 후로 어머니는 손안의 반지의 반짝임이 아닌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았다. p. 27 


 칼 장수가 군인의 철모에 칼을 내리찍으며 칼을 파는 장면은 그 칼이 처음부터 지닌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칼을 ‘연애편지처럼’ 안고 달렸다는 것이 너무 지나친 상상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짐승이 된 이후의 시절을 연결하는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가 빠진 느낌이다. 단편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마땅히 납득될 어머니의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어머니 자신도 그랬지만, 작가는 도덕적으로 아무도 탓하지 않고 관조한다. 바람을 피우는 어른들, 도박하는 어머니, 무책임한 아버지. 짐승의 세계가 끝났다는 말에 그 세계를 향한 비난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연민의 시선과 묘한 향수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言〕이다” 


 그래도 익숙한 주제를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킨다는 면에서 훌륭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면이 ‘소설의 첫 만남’이라는 시리즈로도 손색없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방심하고 있을 때마다 신선한 표현과 생소하고 예쁜 단어가 튀어나와 시선을 붙들어 놓고 특유의 리듬감을 이룬다. 읽는 재미 하나는 확실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누구든 이 단편으로 김애란을 처음 만났다면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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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술 - 최고의 승부사 트럼프의 이기는 전략
스콧 애덤스 지음, 고유라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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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의 여지가 많은 책이다. 저자는 트럼프의 대선 당선을 예측해서 유명해진 인터넷 ‘정치 논객’이다. (본업은 만화가) 그런 저자가 트럼프의 당선 전략을 분석한 책을 냈다는 것은 흥미를 끄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거부감이 든다. 

 

 우선 ‘객관적인 이론’과 ‘주관적인 해석’이 뒤섞여 있어서 신뢰감이 상당히 떨어진다. 저자도 그것을 의식해서 초반에 자신에 대한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고, 본인이 상당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강조한다. 그런데 그 강조가 좀 지나쳐서 오히려 신뢰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거기에 최면사이기도 한 저자는 최면과 과학을 같은 선상에 두고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조금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냥 독자를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는 건가? 

 

 그리고 자기만의 이론과 도구를 가지고 분석을 하기 때문에 저자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저자만의 용어와 개념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모든 이론과 용어는 심리학과 과학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다시 재조합한 개념과 용어들을 익혀야 한다는 건 신뢰감의 문제와 함께 피로감을 동반한다. 이런 면들 때문에 초반에 읽기를 포기할 뻔도 했다. 

 

 하지만 논란이 될 부분은 따로 있다. 거부감이 드는 두 번째 이유는 저자의 인간에 대한 태도다.  

 

 저자는 인간이 세상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각자 자기만의 ‘필터’(이것도 저자의 용어 사전에 포함된다)로 세상을 파악하고, 그대로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그 필터는 무엇이 진리이고, 사실인지 판단하는 걸 돕지 않는다. 그저 복잡하고 파악하기 힘든 문제들을 알기 쉬운 단순한 상태로 만들어 줘서 마음의 평안을 주고, 미래를 예측하거나 즐거움을 주는데 유용할 뿐이다. 사람의 눈을 가려 실제 세계를 외면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왜곡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고 만족하는 것이다. 생존에는 그게 더 유리하기 때문에 인간의 두뇌는 그렇게 진화해 왔다고 한다. 

 

 모두들의 머릿속에는 각자 다른 필터가 적용되고,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모두의 머릿속에는 다른 영화가 상영 중이다. 그리고 그 세계관이 부서질 정도의 충격이 오지 않는다면 그 영화는 죽을 때까지 상영된다. 충격이 와서 더 이상 기존 영화를 상영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각본을 짜서 조금 변형된 영화가 상영되기를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바라게 된다. 어찌 됐건 객관적인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개념으로 시민사회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 대중은 거의 ‘개돼지’ 수준으로 전락한다. 적당히 조작하면 우르르 표가 몰리는 멍청한 집단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트럼프의 성공 전략은 바로 그런 ‘우매한 시민들’을 조작하고 선동하는 탁월한 ‘설득 방법’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시민 의식’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는 가운데 이런 책이 나왔다는 건 상당히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 있다. 시민들의 지적 무장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이 책의 존재는 용감해 보이기까지 한다. 출마를 선언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트럼프가 보여준 행보는 시민들에게 모욕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책을 읽어보면 생각보다 더 큰 모욕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트럼프의 전략을 파악해서 거기에 속지 않으려는 의도로 이 책을 읽을 수도 있겠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유명한 책 『프로파간다』가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이 책은 훌륭한 마케팅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시민 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양서일 수도 있다. 저자의 의도는 전자에 가깝다는 것도 비슷하다. 결국 이 책은 어떤 선택을 제시하고 있다. 트럼프의 전략을 배워서 나도 성공할 것인가, 트럼프의 전략을 파악해서 다시는 속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인가. 둘 다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겠지만, 시민 의식에 한정해서 생각해보면 양립은 불가능하다. 시민은 개, 돼지다. 시민은 개, 돼지가 아니다. 

 

 결국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과연 인간이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뭐라고 판단할 것인가. 세상 파악하기를 포기하고 머릿속에 영화를 상영하는 존재. 아니면 영화 따위 집어치우고 진실이 뭔지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존재.  

 

 얼마 전에 읽었던 『과학 같은 소리하네』라는 책이 떠오른다. 이 책은 정치인들이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적인 헛소리를 해대는 걸 과학적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지적한다. 『승리의 기술』과 정확하게 반대편에 서 있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신뢰한다. 지금은 모르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는 믿음 없이 과학 연구는 불가능하다.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사람을 움직여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기술에만 관심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지 트럼프의 설득 기술이 뛰어나서 감탄할 뿐이라고 말이다) 양쪽 저자에게 서로의 책을 권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최소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두 책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건 더 재밌는 사실이다. 출판사는 독자에게 두 책을 나란히 내놓으면서 어떤 맥락으로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걸까? 균형 잡힌 시각? 아니면 서로 다른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의 분석은 빛을 발한다. 아니면, 나 또한 저자의 설득에 넘어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트럼프가 좋은 지도자로 보이는 건 아니다. <고수가 스캔들을 이겨내는 법>이라는 챕터는 명백하게 궤변으로만 이뤄져 있다. 스캔들로 비화됐던 트럼프의 추악한 행동들을 승리의 기술로 포장해주고 있는데, 이쯤 되면 저자가 자기주장을 비호하려는 건지 트럼프를 비호하려는 건지 구분조차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자신이 주장하는 세계관을 완벽하게 체화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당선을 일관성 있게 예측해 내고도 자신이 정확하게 예측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서 예측에 맞는 결과를 얻어낸 건지, 아니면 자기 분석을 트럼프 선거 캠프가 참고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 세계관에 의하면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구미에 맞는 필터를 독자 마음대로 고르라고 제시하는 꼴이다. 세상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저자도 자기만의 필터에 맞춰서 확증편향을 겪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책 전체를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서두에 제시된 저자의 인상적인 구절이 어쩌면 대단한 통찰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된다.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나는 어떤 조짐을 봤다. 우리가 편한 대로만 현실을 이해하던 부분이 크게 변하려는 조짐이었다. 후보자 트럼프의 설득 기술은, 눈으로 본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소멸 직전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대중들은 자신이 합리적인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봤다. 대중들은 (‘저 광대가 대통령이 될 리 없어’라는 완전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포기하고 “안녕하세요, 트럼프 대통령”으로 가기 직전에 있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들은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영화를 다시 제작해야 했다.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틀렸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그리고 트럼프는 승리했다.  

이는 앞서 ‘현실에 구멍을 낸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이제껏 지켜온 세계관이 단숨에 무너지고, 그 잔해를 통해 다시 세계관을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숙련된 설득자인 나는 이 상황이 말할 수 없이 짜릿했다. p. 16

 

 저자는 지독하게 회의적일 뿐이지, 과학자들만큼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트럼프만큼 기인인 게 분명하지만, 그 또한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개념, 정의라는 개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열린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치는 그런 것과는 연관이 없는, 전혀 엉뚱한 논리와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본 이면은 기존(트럼프 이전)의 우리가 너무 한쪽 면을 확고하게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했다는 반성을 하게 만든다. 우리나라는 가까스로 그 진실을 유지했지만, 미국은 유지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라고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고 외치던 그때의 우리가 순진하게 느껴진다. 그때 우리는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지금, 우리는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우리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후로도 계속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박근혜를 당선 시킨 사람들과 끌어내린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발버둥 칠 것이다. 누군가는 원래부터 그랬다고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둘은 절대로 화해가 안 될 것 같다. 결국 각자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모든 정치적 논쟁을 보면 이미 그게 진행 중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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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 길들이기
리 앨런 듀가킨.류드밀라 트루트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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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은 어쩌다 가축이 되었을까?  

 개는 거의 최초로 가축이 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개는 늑대와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을 텐데, 개는 어떻게 늑대와 다르게 가축이 되었는가. 그 차이는 뭘까. 그 차이에 가축화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구(舊) 소련 전역에서 (모피 생산의 목적으로) 사육되던 은여우는 같은 갯과 동물로서 이 과정의 유전적 성질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은여우의 가축화를 시도하면서 동물 가축화의 비밀을 밝혀보자는 것이 이 실험의 목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과 몇 년 만에 가축으로의 가능성을 내보이더니 30년도 되지 않아 실질적인 가축화에 성공한다. 지금은 몇몇 가정에 분양까지 한 상태다. 

 

 유전학자인 드미트리 벨랴예프의 ‘대담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그의 지도하에 마찬가지로 유전학자인 류드밀라 트루트에 의해 실질적으로 실행된다. 냉전 시대 초반에 시작된 실험은 탈냉전을 거쳐 21세기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60여 년의 긴 시간이지만 유전학적으로는 찰나도 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이다. 

 

 술술 읽히는 편은 아니지만 대중 과학서적으로써 적당한 수준을 지키면서도 통찰력을 선사하는 좋은 책이다. 

 

 우선 실험의 아이디어 자체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처음부터 아주 복잡한 실험 방식을 실행하는 게 아니라,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시작을 해서 점점 어려운 방식들이 적용된다. 이는 이 실험이 과학기술(특히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실험이 계속될수록 유전학은 세계적으로 급격히 발전하고, 그것은 다시 여우 실험에 적용된다. 유전학의 발전 과정을 쭉 훑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실험 자체가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된다. 물론 연구자들과 작업자들의 오랜 인내와 시행착오가 있었겠지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확실한 결과가 나왔고, 거의 처음에 예상했던 방향대로 결과가 순조롭게 나오면서 차곡차곡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옛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가 크게 한몫했는데, 실험 초반에는 소련 과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사이비 과학자’ 트로핌 리센코 때문에 실험의 본래 목적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는 시작될 수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리센코의 몰락과 함께 대규모 물량이 투입된다. 


 여우를 키울 농장을 구하거나, 부지를 정해 아예 농장을 만들어 버린다던지, 실험용 집이 필요하면 새로 짓는다던지, 많은 수의 여우를 안정적으로 먹이고 키우는 일, 수많은 작업자를 고용하는 일, 그리고 이렇게 몇 십 년짜리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진행되게끔 뒷받침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냉전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미국과의 경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상상해 보게 된다. 하긴 그러니까 우주선까지 쏘아 올린 거겠지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이 끝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다) 

 

 실험 과정은 대단히 흥미롭다. 유달리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야생 여우들을 선별해서 짝짓기를 거듭하면, 불과 몇 대만에 아주 온순한 가축에 근접한 여우들이 탄생한다. 그들은 인간을 친근하게 대하며, 나중에 가서는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새끼 여우에 대한 묘사와 그 새끼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애정 때문에 실험 과정은 의외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무엇보다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판타지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동물을 좋아한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번쯤 동물의 새끼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새끼고 성체고를 떠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동물들의 외형에 매료되곤 한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고, 손으로 만지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야생의 동물들과 ‘화해하는’ 장면을 자주 꿈꾸곤 한다.  


 야생은 오랜 시간 동안 인간에게 극복의 대상이자, 정복해야 할 힘겨운 ‘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야생동물과 인간이 친근함을 유지하는 장면은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킨다. 각종 SNS에는 그런 야생 동물들과의 화해, 일종의 낙원을 재연하는 듯한 동영상으로 넘쳐난다. 

(알래스카 회색 곰과 공생하고자 했던 남자가 결국 그것에 실패하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 맨>(2005)이 떠오르기도 하고, 공룡과 교감하고자 하는 ‘공룡 판타지’ <쥬라기 공원> 시리즈도 떠오르는데, <쥬라기 월드>(2015)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랩터와 교감하고 훈련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야생 여우가 단계를 거듭할수록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과학적인 표현은 아니다) 조금씩 인간의 애정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런 본능적인 감동이,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더 이상 야생은 적이 아니고 친구다. 그리고 인간과 개의 첫 만남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면 괜히 뭉클해지는 것이다. 처음 무리를 이탈해서 인간에게 접근하는 유독 온순한 늑대와 동물을 유독 좋아하던 어떤 인간의 만남. 

 

약 2만 6천 년 전에 사자, 검은 표범, 곰 등의 사나운 포식자들이 그려진 정교한 벽화로 유명한 이 동굴에는 바닥에 열 살로 추정되는 한 소년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혔는데, 그 옆으로 줄곧 커다란 갯과 동물의 발자국이 따라다녔다. 발자국 모양을 보아 이 동물은 늑대보다 개에 더 가까웠다. 소년과 그 옆을 총총 걸음으로 충실하게 따라가는 원시 형태의 개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p. 154

 

 실험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실험을 주관하던 류드밀라는 여우와의 교감을 제외한 객관적 관찰만으로는 더 이상 정확한 실험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물의 가축화는 동물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적응한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동물에게 적응한 결과다. 가축화에서는 동물과 인간, 그 둘의 서로에 대한 애정을 빼고는 온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조언은 류드밀라가 잊지 않고 지침으로 삼는 구절이다. 

 

“길들인 것에는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인간과 가축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무리에서 온순함이 생존에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체 생활에 익숙한 늑대에게서 개라는 최초의 가축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험의 ‘대담한 아이디어’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인간 또한 가축화된 존재라는 가설을 세우기에 이른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가축화 시켰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계에 유리하다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가진 폭력성과 위협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인간은 더불어 살기 위해 온순함을 발달시켜온 대표적인 사회적인 동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온순함이 털 뭉치 같은 새끼 여우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게 만드는 우리의 본능 속에 숨어있다. 여기서 독자는 어떤 희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잊고 있던 본능을 가축, 반려동물들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왜 SNS에 동물 영상이 넘쳐나는지 알 것도 같다. 

 

 은여우 실험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험을 지도했던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병상에서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가 21세기 인류에 대해 그가 바라는 바를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 책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30여 년 후에야 나왔다) 

 

“친절해지십시오. 그리고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십시오. 모든 이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평화롭게 살고, 우리의 ‘형제들’─지구상에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전적으로 책임을 수행하십시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자연법칙을 연구하고 이 지식을 이용할 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p. 202

 

 너무도 당연하고 익히 들어온 이 말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은여우의 가축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길들여진 지 너무 오래됐기에 잊은 것들이 많아 보인다.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길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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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
스즈키 다이스케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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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 바쁜 일상에 위로를 주는 감상적인 에세이나, 성공한 인생을 뒤돌아보는 회한에 찬 회고록 정도로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결과적으로는 앞에서 얘기한 그런 책들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물론 주관적인 평가다) 기대치가 크지 않았는데 의외의 보물을 건진 느낌이었다.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투병기나 임상실험 보고서에 가까웠다. 물론 그렇게 딱딱하지만은 않다는 게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저자는 프리랜서 르포라이터로, 마흔한 살 되던 2015년 여름,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고차뇌기능장애’(高次腦機能障碍)를 겪는다. 고차뇌기능장애는 뇌경색 후유증의 하나로, 기억장애나 주의력결핍장애, 수행기능장애, 인지장애 등을 겪는 일종의 뇌기능 장애다. 뭔가 일본식 한자 조어 같은 느낌이 나서 검색해 보니 고차뇌기능장‘해’(高次腦機能障害)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는 것 같은데, 한 글자가 달랐다. 

 

 어쨌거나 저자는 르포라이터라는 직업 정신에 근거해서 자신의 질병을 최대한 정확한 묘사로 기록해 놓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전반부는 질병에 대한 묘사, 후반부는 질병을 야기한 저자의 생활습관과 태도에 대한 자아성찰, 마지막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상처들까지 파고들어간다. 밖에서 안으로 향해 들어가는 구조인데, 스스로도 자신을 취재하는 과정으로 임했음을 밝히고 있기도 하고, 내관법內觀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내관’이란 교도소 등에서 쓰는 치료법의 하나로 ‘가족과 배우자에게 받은 것’, ‘갚은 것’, ‘피해를 끼친 것’을 조용한 환경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가족에게 학대를 받아온 소년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내관법을 실시하듯 자신을 취재하면서 내 성격을 상세히 이해했고 결점을 찾아내 고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할 수 있었다. p. 179-180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의 태도는 정확하게 반대를 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사례를 통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취재해 오던 소외된 자들을 상기한다. 고차뇌기능장애 때문에 상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고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게 된 것을 설명하면서, 나중에 조직폭력배가 되는 어떤 불우한 소년의 대화 방식을 떠올리는 식이다.

 이렇게 병든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을 보고 있으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질병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감이 되어버린다. 심지어는 자신의 질병을 행운이고 기회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야 상대를 이해하게 되었으니, 이건 기자로서 행운이다.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뇌경색이라는 질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제 그들의 인식, 감각을 공유할 수 있고 글쓰기 능력도 잃지 않았으니 최고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p. 38

 

이어지는 말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사회에서 ‘성가신 존재’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으니 그들을 대신해 부자유스러운 감각과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사명이다! p. 38


 저자의 이런 태도는 그가 꾸준히 사회의 어두운 면을 취재해서 알리려고 노력한 기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책날개에 소개된 간략한 작가 이력만 봐도 알 수 있다. 


15년 넘게 빈곤층 어린이와 청소년, 성노동 여성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취재해왔다.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을 폭로한 논픽션 《최빈곤 여자》는 9만 부 넘게 팔렸고 추오코론신샤가 주최하는 신서 대상 5위에 올랐다. 그 외 쓴 책으로 《집 없는 소년들》, 《노인 잡아먹기》, 《뇌는 회복된다》가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는 이런 기록을 남기기 위해 ‘준비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병에 걸린 것 자체가 운명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 또한 저자가 만들어낸 운명이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그는 사명감을 갖추고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전반부를 차지하는 ‘증상에 대한 묘사’ 부분이 대단히 재미있는데, 띠지에 적힌 추천사에 보면 ‘심각한데도 웃음이 터진다’는 문구가 있다. 실상은 웃음이 터지는 정도를 넘어 흥미진진할 지경이다. 환자인 저자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저자 본인이 타고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고, 주변인들이 하나같이 재미있다. 특히 저자의 아내 치나쓰는 발상 자체가 대단히 특이하고 귀엽다. 심각해질 만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튀어나와서 시종일관 재밌게 독자를 이끈다. 

 

 흥미진진함은 저자가 자신의 증상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려 심각하게 고민하는 부분에서 최대치를 이룬다. 묘사가 절묘하다 보니까 어렴풋이 어떤 상태인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각 능력에 이상이 온 것을 설명하면서, 인공지능에 비유를 한다거나(시야에 들어온 것들 중에 우선순위 판단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똑같은 비중으로 받아들여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상태), 손가락 감각이 없다가 조금씩 돌아오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던 유명한 역사 인물의 이름이 번개 치듯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을 예로 든다. 공감을 안 할 수가 없는 절묘한 비유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저자는 감각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독자인 나도 거기 동참하는 기분이 든다. 일종의 체험에 가까울 정도. 저자의 묘사는 그 정도로 집요하다.  

 저자의 극단적인 역지사지 경험은 마치 ‘사회적 약자로 다시 태어나기’ 과정인 것 같다. 그걸 읽는 독자도 그 역지사지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묘사한 환자들이나 장애인들 외에 치매나 파킨슨병을 앓는 분들의 처지를 상상해 보게 되었다. 저자의 저작 의도도 정확하게 그 지점일 것이다. 그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걸 돕고, 사회적 관심과 복지의 필요성을 호소한다. 

 

 증상 묘사의 생생함에 비해서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인 느낌이나 추론에 의지한 부분이 많다. 때문에 저자의 판단과 과학적 사실을 구분 지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저자의 판단이 의사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디테일한 부분을 전달하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묘사된 기록이 흔치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전반부가 전문적 의료 지식과 비전문적인 분석이 뒤섞여 있다면, 후반부는 저자 자신을 향한 자기반성과 타인을 향한 따끔한 질책이 섞여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뿐이다. 하지만 전반부의 맥락 그대로 후반부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자기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지만, 자기 비난을 핑계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쓴소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의료시스템 같은 복지 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늘어놓았던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 절반은 그 시스템의 수혜자인 사회적 약자들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한 추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지나칠 수도 있지만, 나는 저자의 인류애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를 구하는 방법은 외부적인 도움에만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약자 스스로의 자기 혁신이 뒤따라야 진정한 구제가 가능해진다. 저자는 그 문제점 지적을 차마 당사자들을 향해 직접 할 수 없어서 자신에게 화살을 돌려 난도질을 해놓는다. 타인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난도질은 그만큼 동정의 여지없이 이뤄져야 했다. 그 자기비판이 과도하게 느껴진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이 느껴져서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단어로만 들어왔던 살신성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정도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벌거벗기고,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스스로를 욕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정도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살신성인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인간이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해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 평범함과 소박함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살신성인인 줄도 모른다. 저자는 그렇게 슬그머니 자신의 선의를 뒤로 숨긴다. 자기 성찰과 자기 위로인 척하면서 누구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타인의 도움에 호소한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타인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경우에 빗대어, 자신이 그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인간관계도 없을지 모를 약자들을 걱정한다. 

 

평상시라면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해주면 오지랖 넓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은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내가 도와줄 거 있어?”라는 질문 따위는 하지 말고 그냥 도와주다 보면 상대는 정말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말없는 행동이야말로 무엇보다 따뜻하고 고마운 것이다. p. 192

 

 나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선량한 사람들, 진심으로 타인을 걱정하고 불쌍해하는 사람들, 기꺼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는 사람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요즘은 비슷비슷한 에세이들이 많이 나온다. 모두들 자기 자신을 챙기자고 말하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자기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자고 말한다. 그런 책들 속에서 이 책은 소박하지만 특별한 빛을 발한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 글 처음에 했던 말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책이 진짜 위로를 준다. ‘위로’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말이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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