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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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p. 7 


 어머니의 칼은 어머니를 여자나 인간이 아닌 한 마리의 짐승으로 만드는 도구다. 필요에 의해 집었지만, 어느새 도구가 정체성이 된 인간. 칼은 맹수의 송곳니 같은 것이다. 


 짐승인 어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끼 입에 먹을 것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새끼가 먹는 것은 희생당한 어떤 생명체다. 식물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어머니의 칼은 가차 없이 그것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새끼가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를 꺼내 막 썰었을 때, 순하게 숨 죽은 배추 줄기 사이로 신선한 핏물처럼 흘러나오던 김칫국과 자그마한 기포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국수를 삶으면 나는 그 옆에 서서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어머니는 갓 익은 면발 한두 젓가락을 건져 주었다. 그런 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 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 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肉〕 맛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p. 15-16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송곳니는 어머니 자신을 물어뜯는다. 칼자국은 그렇게 어머니의 손을 가로지른다. 손을 베인 어머니의 피가 국수 그릇에 묻었을 때, 손님이었던 할머니는 놀라지도 나무라지도 않는다. 어미가 송곳니에 손을 베는 일은─그 또한 어미였던─할머니에게 놀랄 일도 나무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끼를 먹이다 보면 생기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머니가 속한 짐승의 세계는 누구나 바람을 피우는 육체의 공간이고, 그러면서도 부끄럼을 모르는 자연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어머니는 딸을 자랑하기 위한 공간으로 목욕탕을 선택한다.  


내 몸이 제법 어른 꼴을 갖추게 되고부터 어머니는 나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려 했다. 어머니가 특히 좋아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어머니는 발가벗겨진 내 육체를, 그러니까 그냥 자식이 아니라 다 큰 자식의 풍성한 육체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그걸 발견할 수 있었다. 봐라, 내 새끼다. 털도 나고 젖도 있고 엉덩이도 크다! p. 71-72 


 그 세계에서 아버지의 존재 이유는 양육이 아니라 번식에만 한정된 세계다. 양육은 온전히 어머니에게만 떠넘겨진다. 아버지는 칼을 쥐고 위협만 할 뿐, 제대로 쓸 수 없는 존재다. 그나마도 자식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 큰 자식에게 칼을 쥐여주면서도 끝까지 자기 칼은 내려놓지 않는 세계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동정하거나 나무라고,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성질을 낸 뒤 전화를 끊었다.  

“내가 니 새끼냐?” p. 58 


 그리고 그 짐승의 세계는 이제 몰락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 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사람들 중 더 작은 나라 사람들이 쓰는 그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벵골 호랑이에게는 벵골 호랑이의 말이,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말이 필요하듯. 나이 들어 문득 쳐다보게 되는 어머니의 말.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관광지처럼 곧 사라질 것 같다 예감한다. p. 9 


 화자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을 수가 없다. 평생 밥을 만들다 어미가 죽은 마당에 밥이 넘어가면 이상한 일이다.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가 어머니에게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한국에 밥하러 오셨어요?” 한국의 어머니들은 밥하러 이 땅에 온 것 같다) 


 밥을 거부하는 화자에게 남편을 비롯한 친척들은 먹기를 강요한다. 임신 3개월인 화자를 어미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화자는 짐승이 되기를 끝끝내 거부하고 어머니의 부엌으로 간다. 


 자신을 키워낸, 수많은 것들을 죽여 온 그 작업대에서 칼을 집어 든 화자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칼을 쓰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단지 사과하나를 깎아먹었을 뿐이지만 그것은 엄청난 도약이고, 여자에게 짐승이 되기를 강요하던 시대와의 작별을 의미한다.  


사과 조각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축축한 혀를 굴려 그 맛을 음미했다. 씹고 빨고 굴리다 나도 모르게 꿀꺽. 그런 뒤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아, 맛있다!” p. 79-80 


 하지만 저자는 어머니가 속한 짐승의 시대를 거부하면서도,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에 버려두고 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의 짐승성은 시대에 의한 강요였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접살림에 쓸 칼을 품에 안고 집으로 오는 어머니의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고 표현한 것이 못내 신경이 쓰인다. 마치 그것이 어머니의 꿈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어서다. 


그날, 마분지에 둘둘 말은 칼을 품고 산동네를 오르던 어머니의 가슴은, 흡사 연애편지를 안고 달리는 처녀처럼 마구 두근거렸더랬다. 그 후로 어머니는 손안의 반지의 반짝임이 아닌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았다. p. 27 


 칼 장수가 군인의 철모에 칼을 내리찍으며 칼을 파는 장면은 그 칼이 처음부터 지닌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칼을 ‘연애편지처럼’ 안고 달렸다는 것이 너무 지나친 상상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짐승이 된 이후의 시절을 연결하는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가 빠진 느낌이다. 단편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마땅히 납득될 어머니의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어머니 자신도 그랬지만, 작가는 도덕적으로 아무도 탓하지 않고 관조한다. 바람을 피우는 어른들, 도박하는 어머니, 무책임한 아버지. 짐승의 세계가 끝났다는 말에 그 세계를 향한 비난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연민의 시선과 묘한 향수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言〕이다” 


 그래도 익숙한 주제를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킨다는 면에서 훌륭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면이 ‘소설의 첫 만남’이라는 시리즈로도 손색없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방심하고 있을 때마다 신선한 표현과 생소하고 예쁜 단어가 튀어나와 시선을 붙들어 놓고 특유의 리듬감을 이룬다. 읽는 재미 하나는 확실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누구든 이 단편으로 김애란을 처음 만났다면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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