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할 거예요, 어디서든
멍작가(강지명) 지음 / 북스토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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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역시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이다.  

5년 차 회사 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오랫동안 미뤄온 자아실현에 대한 열망.  

그리고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 약간.  

20대 후반, 전체적으로 검토가 필요한 시간이 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작가는 저질러버린다. 

 

언젠가 한 외국인 친구가 불쑥 나에게 던진 말이 기억난다. 


“그거 알아? 한국 유학생들은 

이십 대 후반이랑 삼십 대 학생이 유독 많은 거.  

내 생각인데 말이야. 한국에서는 어렸을 땐 명문대 입학, 

이십 대 때는 대기업 취업 같은  

똑같은 목표만 보고 공부하다가  

막상 회사에 들어가면 그제야 뒤늦게 

사춘기를 겪게 되는 거 아닐까?” p. 18

 

그렇게 시작된 외국생활. 새로운 장소에 대한 흥분은 분명 달콤하고 짜릿하지만 그것은 또한 쉽게 익숙함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던 두근대는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순간마다 벅차오르던 감정들을 비워내기 시작하고 서서히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연애 초기에 그렇게도 뜨겁던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게 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p. 97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곳을 바라보게 되면서, 멍작가는 반대로 자기 모습을 보게 된다. 

회사 다닐 때는 잘 모르던 자기 자신을 일을 그만두고야 발견하듯이, 

해외에 나가고 나서야 그때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한국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특히나 외국에서 회상하는 한국 회사의 모습은 촌철살인이 빛난다. 불합리한 근무형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과 벌이는 신경전. 그중에서도 최고는 역시 회사를 그만두기 2주 전 벌어진 송별회 장면이다. 예기치 못하게 머리를 다친 멍작가에게 다음 날 팀장이 한 말은 회사 생활을 접기에 충분했다고 멍작가는 말한다. 

 

설마… 

이제 회사도 관두는 마당에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p. 63

 

외국이 더 이상 새롭지 않고, 한국 사회를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나자,  

작가의 결론은 의외의 종착지로 향한다. 어느 곳에도 나에게 완벽한 낙원이 없다는 것. 

 

외국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한국의 장점과 단점 모두가 나란히 같은 선상에 올라간다.  

작가는 한국 회사에서의 회식문화를 그리워하다가도, 독일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을 마음에 들어 한다. 한국에 들어오면 밤 문화와 익숙한 음식들, 배달 문화에 만족하면서도,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에 누워있을 때 중년 아저씨들의 시선에 불편해 한다. 

 

이 평등해진 외국과 국내의 조건들 속에서, 작가는 모든 곳에서 자국인처럼 살 수도 있고, 국내라고 해도 이방인처럼 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단절시킨다면 여기가 어디든지 간에 나는 영원한 이방인일 테니까. p. 247

 

그래서 책 전체에 걸친 저자의 가치 판단은 언제나 중립적이고 양립적이다. 오래 된 인간관계만이 결속력이 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오래 된 관계에 대한 미련까지 버리지는 못한다. (p. 196)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단점으로 꼽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성향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균형을 잡는다. (p. 225) 

 

외국 생활 중에 작가는 국내 회사에 있을 적 알았던 직장 선배를 떠올린다. 항상 예의 바르고 상대를 배려했던 사람. 너무 지나치다고 치부했던 그 사람의 가치가 해외에 나와서 보니 재평가 된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얼마 전 무슨 서류를 찾다가 한 편지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선배가 선물이라며 준 책 사이에 있던 하늘을 닮은 색상의 편지지. 

길지는 않지만 정성스레 한 자씩 꾹꾹 눌러쓴 그 선배의 편지였다. 


‘잘 할 거예요, 어디서든…….’ 


군더더기 없이 짧은 그 말 한마디가 

한 번씩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는지 

아마 그 선배는 모를 것이다. 

그 선배의 유난히 예의 바른 존댓말과 따뜻한 마음씨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p. 181

 

선배의 편지는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면을 드러낸다.  

 

‘잘 할 거예요, 어디서든…….’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 말은 자기에게 맞는 환경과 생활을 찾아 떠난 멍작가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저 편지의 말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좋은 사람과 환경만 있다면 말이죠’ 선배는 ‘나쁜 환경’ 속에서 선한 배려를 실천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 선배와 같았다면, 멍작가는 해외로 떠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꼭 해외에 나가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내에 사는 사람이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음 안 맞는 사람들과 마음에 들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데, 그나마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도 부족한 편이다. 이것이 20대 후반의 청년들을 계속해서 다른 환경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핵심적인 이유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자신의 저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일본의 불경기 속에서도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에 대해서 친한 친구들과 지내는 자기만의 작은 우주가 유지만 된다면 어찌됐든 젊은이들은 행복해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그마저도 용납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도 그것을 깨달았기에 외국으로 나갔던 것이고, 거기서 한국도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와 해외의 장단점을 오가던 작가는 결국 양자택일의 선택을 유예한다.  

 

외국에서 한국을 그리워하는 것과 한국에서 다시금 외국 생활을 동경하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p. 2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국내에 마련되어 있는 인프라(가족, 고향, 국적 등)는 그것대로 가치가 있고 유리한 면이 있다. 하지만 독일이라는 또 다른 삶의 터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그만큼 많다. 그래서 둘을 오가면서 장점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칙이다. 일종의 편법이고 나쁘게 말하면 꼼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될 건 또 뭔가? 어디에도 나를 위한 완벽한 장소가 없다면 모든 장소의 장점만을 취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택지 아닌가. 우리 모두가 항상 꿈꾸는 게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을 우리는 질투에 못 이겨 손가락질 하고 욕하지 않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재촉하면서. 

 

작가가 해외로 나선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미뤄뒀던 꿈을 위해서’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내와 해외 사이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그 장점들만을 취하려고 했듯이, 작가는 자기만의 신념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은 절대적이다. 때로는 숨통을 막히게 하고 심하게는 자살로 내몰 정도다. 하지만 해외에서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크나 큰 이득이다. 그렇다. 진정한 자유다.  

 

“사람들이 너한테 뭐 하냐고 물어보면 처음엔 적응이 안 될 수도 있어. 아마도 너도 모르게 넌 전에 일하던 데가 어디고 거기서 뭘 했는지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을지도 몰라. 첨엔 나도 그랬으니까.”  p. 258

 

“근데 있잖아, 그렇게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지금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어쩌면 내 인생에서 다시 못 올지도 모를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자고.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을 옛날얘기 따윈 나중에 이력서에나 다시 늘어놓고 지금은 그 대신 한 번 더 마주한 사람의 눈을 마주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자고.” p. 259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황하는 존재, 이쪽과 저쪽 사이를 오가는 어리석은 존재로 그리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봤을 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기만을 위한 틈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발버둥치는 투사에 가깝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욕하고 그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자기 불안감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거창한 속뜻은 없다는 듯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놨을 뿐이지만, 그 장난스러운 그림과 글 속에서 그의 처절한 투쟁이 느껴진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위해, 자기만의 작은 틈을 위해 투쟁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것이 꼭 회사를 때려치우고, 해외로 넘어가서 외국어를 배우고, 예술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멍작가는 자기가 시도했던 자기의 방법을 풀어놓았다. 당신만의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듣고 싶다.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다.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반드시 꼭 뭔가 이뤄야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이야기를 온전히 했다면,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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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대미지의 일기
벨린다 스탈링 지음, 한은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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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작품다운 미숙함과 첫 작품답지 않은 능숙함이 모두 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2006년 작고한 탓에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더 많이 남는 작품입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남편의 병환으로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이 되자 위험을 무릎 쓰고 부인이 남편을 대신해 제본소를 이끈다.’ 

 

 19세기라는 시대와 제본사라는 독특한 소재에 ‘여성’이 만나면서 이 작품은 대단히 흥미로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여성해방의 방향이 느껴집니다. 첫 번째는 직업인으로서의 해방, 두 번째로는 지식에 대한 해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섹슈얼한 육체적 해방.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위해 주인공이 제본사로 나서면서 본의 아니게 직업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제본을 하려면 책을 읽어봐야 하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탐구도 가능해 집니다. 거기에 그 책들이 당시의 음란서적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탐구까지 수행하게 됩니다. 페미니즘 소설로서 아주 좋은 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 도라의 남편인 피터는 페미니즘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가부장의 끝판왕인 남자입니다. 그래서 남녀 간의 뒤집힌 역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생계를 위해 무기력한 상태이면서도 말입니다. 자존심이 셌기 때문에 더욱 불쾌했겠지요. 남편이 늘어놓는 불평불만들이 상당히 재밌습니다.  

 

“(…) ‘곧 결혼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잠시 일할 거야.’ 이런 태도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닌가? 심지어는 남편이 월급을 벌어다주는데도 일하기도 한다니까! 가족이 있어도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아이들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겠지. 반면 아이들이 몇이나 딸리고 충실한 아내가 있는 똑바른 남자는 자기 수입만으로 식구들을 모두 먹여 살리려고 고군분투하겠고!” p. 33

 

 그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우리사회의 여성관은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주 익숙한 논리들을 전개합니다.  

 

 제본사의 길로 들어선 도라의 작업실은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병들고 어린 딸, 남편에게 부당한 이유로 쫓겨난 여자, 동성애자, 흑인 노예, 일하는 여성... 페미니즘을 넓게 정의하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여자의 위치로 격하될 수 있고, 누구나 노예의 위치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그렇게 가장 소외되고 눈에 띄지 않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흑인 노예인 ‘딘’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미국의 흑인노예가 가부장제에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비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꿈꾸는 해방된 여성의 미래는 해방된 흑인들의 오늘날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생각했을 때 도무지 믿어지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을 정도의 야만으로 느껴지는 미래. 그들의 해방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미래. 누구도 그 시절을 옹호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미래.  

 

 딘이 옹호하는 노예들의 절망적 상태는 마치 가부장제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 여성들을 비유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부인, 노예제도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모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자유가 너무 먼 곳으로 사라져서 사람들은 자유를 두려워해요. 노예제도 때문에 사람들은 의존적으로 변한 겁니다. 그건 억지로 삼켜야 하는 약이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는 모든 권위를 빼앗깁니다. 권위가 없으면 투쟁할 대상도 없어져요. 전면적인 반란은 불가능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날 뿐이죠. 마약중독 진단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 마약을 버리게 하지는 못해요. 주변의 모든 아편을 없애고 중독자가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뿐이죠.” p. 376-377

 

 당시에 흑인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던 백인들은, 여성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렇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한 번도 권위를 잃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같은 취급을 받았다간 복수를 꿈꾸게 될 거라는 걸 알죠. 자신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일을 알아요. 그래서 우리가 얼마라도 힘을 얻으면 총을 들고 쫓아올까봐 두려워해요.” p. 486-487

 하지만 흑인들은 해방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차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투쟁도 계속돼야겠지요.  

 

 통쾌하고 유쾌한 페미니즘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이 생각만큼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의 변화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캐릭터의 능동성이 떨어지고, 동기가 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취적으로 위험을 무릎 쓰고 제본사의 길에 접어들고, 성공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후 번번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귀족에게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영 개운하지 않습니다.  

 

 주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끼워 넣다 보니까 정작 주인공인 도라의 의도가 불분명해지기도 합니다. 도라는 주변인물들에 치여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엉뚱한 소동으로 연결되고,  다른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해 의도가 불분명한 방문을 계속합니다. 


 딘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고, 공들여 두 사람 사이를 쌓아올리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를 미행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왜 이러는 걸까 의아하기도 합니다. 


 캐릭터들도 상당히 기능적으로 쓰이는 편입니다. 남편인 피터는 초반 이후로는 그냥 방치되다가 적절한 시기에 사라질 뿐이고, 딸과 도라의 관계도 평면적이며, 잭 같은 캐릭터는 반전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개성 없이 도라와 미소만 주고받습니다.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반전의 재미를 위해 많이 참고 읽어야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는 리얼리즘의 문제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때로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마치 19세기라는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업자의 조수인 ‘피지’에게 얻어맞고 겁박을 당할 때의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도라의 오해가 풀리면서 도리어 피지가 무안한 상황이 되자 도라가 반응합니다. 

 

피지는 모자를 고정하는 핀보다 더 똑바르게 양옆에 두 손을 붙이고 서 있었다. 그가 거의 불쌍할 지경이었다. 남자들은 잘못을 들키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특히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하다가 여자한테 들키는 경우에 그랬다. 이제 어떻게 해야 그를 달래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우리 여자들은 어머니들로부터 화해하는 기술을 완벽하게 훈련받았다. 또한 치부가 드러난 남자들이 느끼는 분노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화보다 훨씬 더 더럽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p. 340

 

 이게 방금 전까지 바닥에 쓰러져 남자에게 발로 차이던 여자가 할 생각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혹시 19세기라는 시대상을 의식한 것은 아닌가 고려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막판의 반전과 위기에 이르면 왜 그랬는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나(막판 반전을 위한 희생이겠죠),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의 대부분이 이런 식의 ‘고구마’로 흘러가는 건 답답한 일입니다. 페미니즘의 승리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기대했던 쾌감이 너무 늦게 옵니다. 

 

 음란서적의 제본을 의뢰하는 상류층 지식인들의 클럽이 중요한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낭독회를 연상시킵니다. 변태 같은 내용의 책을 비밀스럽게 돌려보면서 거기에 여자를 협박하듯 참여시키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그 더러운 노동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아가씨>의 마지막 정사 장면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의 해방이 남성적인 상상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에 걸립니다. 도라는 음란서적을 제본하면서 패러다임에 큰 타격을 받습니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고개를 들고 하늘의 구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이파리도 없는 자작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애통하고 심각했는데도 일에 찌든 나에게는 그 자작나무들이 거대한 회초리처럼 보였다. 회초리를 연상시키는 자작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구름은 채찍을 맞을수록 흥분하는 푹신한 엉덩이 같았다. 이 이미지는 넣어두었다가 다음 번에 채찍질과 관련해서 염소가죽을 제본할 때 자작나무 위에 솜털 같은 구름을 새기고, 그 위에 수채화를 덧붙여서 써먹어야겠다. 내 의식은 이런 식으로 움직였다. 울타리에서 자라는 쐐기풀을 보면 채찍질당하는 둔부가 떠오르고, 수녀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유 그릇인 양 서로를 핥는 고양이가 연상되었다. p. 394-395

 

 이것도 반전을 위한 희생인 것 같은데, 너무 출혈이 큰 희생이죠. 도라라는 캐릭터가 너무 망가져버리니까요. 

 

 도라는 노예 출신 흑인을 고용했다는 이유로 동네사람들과 귀족들로부터 부당한 오해를 받고 일종의 낙인이 찍힙니다. 흑인과 놀아났다는 것이죠. 그 억울함이 채 풀리기도 전에 도라는 그들의 상상력대로 흑인과 사랑을 나눕니다. 딘과의 사랑을 통해 성적 해방을 쟁취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족 남성들과 삐뚤어진 사회적 선입견과 일치한다는 것이 도라의 한계인 것처럼 그려져서 안타까웠습니다.  

 

 ‘고통이 소유욕에서 온다’는 깨달음도 조금 난데없습니다. 생존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성들은 해탈한 사람처럼 어떤 것도 욕망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딘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정당화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풀을 붙이는 동안 딘이 대답했다. “부인, 때로는 자신이 인간 이하라고 느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나를 인간 이상으로 느끼게도 해주죠. 내가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일깨워주니까요.” p. 454

 

 모두 지배 계층이 피지배 계층에게 내세우는 보수적인 가치관들입니다. 아마도 딘이라는 남성 캐릭터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왔기 때문에 더욱 거부감이 드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무지한 도라를 일깨우는 ‘맨스플레인’을 시전 합니다. 이것 또한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딘의 말은 작가의 그런 의도마저 의심하게 만듭니다.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는 19세기 여성에게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말입니까? 

 

“(…) 도라, 노예제도의 반대는 뭘까요?” 

“자유죠.”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면 통제? 자기통제 말이에요. 아니면 이 둘이 같은 얘기일까요?”  

자기통제. 우리 삶의 책에 대해, 성 바르톨로메오에 의해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 영혼에 제시된 선택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며, 우리는 우리의 책을 잘 써야 한다. p. 490-491

 

 치밀한 자료 조사나 야심 찬 시도들을 봤을 때는 작가의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능숙함이 보입니다. 아마도 제가 지적한 문제점들도 초보 작가에게는 너무 가혹한 질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이기에, 앞으로의 작품 세계를 지켜보며 첫 작품을 만회하는 모습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 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 글을 써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안의 페이지들처럼 텅 빈 표정으로 뭘 써야 하지, 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의 꿈을 써요. 당신의 생각. 당신의 공상.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목소리를 써요. 당신은 일스 씨나 매로우 씨, 비숍 씨, 네글리 씨 등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실체를 써요. 당신 자신을 위해 살아요.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어쨌거나 우리는 남들에게 전시되지 않던가요? 나는 종종 그렇던데요. p. 523

 

 그래도 그녀는 여성이 저항하고, 결국은 성공하는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써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오롯이 담아냈습니다. 그녀의 그 첫 번째 시도는 작품 속 도라의 그것처럼 어설프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여성들에게는 별로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결국은 응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는 34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다른 여성들이 그녀의 열정을 이어받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바톤이 넘겨졌습니다. 그들의 모든 질주를, 작품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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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고양이 1~2 세트- 전2권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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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 소통을 꿈꾸는 암고양이 바스테트와 지적인 수고양이 피타고라스가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고 공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갑게 읽을 것 같다. 단지 고양이의 뛰어남을 강조하다 보니까 개를 폄하하는 장면이 많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개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고양이는 악당으로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개들은 왜 저렇게 생겨 먹었을까?」

포효하는 개들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피타고라스에게 묻는다.

「인간 주인의 의식이 스며들어서 그래. 난폭한 주인을 만나면 똑같이 난폭해지고 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주인을 만나면 또 그렇게 되는 거야. 개들이 스스로 성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런 개들과 달리 우리는 주체적이잖아. 우리 기질을 스스로 결정하니까. 안 그래?」 2권 p. 51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설정들이 엉성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약간 적당히 편의적으로 버무려놓은 느낌이 있다. 이것은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라기보다는 능숙함에서 오는 느낌 같다. 소품 같은 느낌도 있어서 작가가 힘을 빼고 쉽게 접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를 주제로 한다면 쥐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쥐가 권력을 잡아 인류를 위협한다면 그 힘의 원천은 페스트인 것이 자연스럽다. 역사 속 고양이는 숭배의 대상인 적이 많고 영적인 세계와 많이 엮였으니 그런 면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캐릭터에 입혀진다. 그리고 고양이가 다른 동물과 싸운다면, 고양이의 왕격인 사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충 이런 식의 예측 가능한 발상 자체가 적당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주제적으로도 맥을 같이 하기에 더 분명해 진다. 작품의 논조는 전체적으로 ‘역지사지’와 ‘계몽’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두 가지가 동화에서나 쓰이는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같은 독자를 상정하고 아주 단순하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목표로 삼는 것도 아주 심플하다. 독자가 고양이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체험한다. 역시나 동화나 우화 수준의 장치 사용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파트리샤, 우리 입장이 한번 돼 봐요. 당신들은 우리한테 음식다운 음식을 못 먹게 하죠, 성생활의 기쁨도 못 누리게 하죠, 게다가 멋대로 주인을 정해 주고 우리 이름을 정해 주고 살 곳까지 정해 주죠. 그런데 우리더러 <거만>하다고요? 우리 시중을 들어야 할 인간들한테 고양이들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게 내 눈엔 이상하게 보여요.」 2권 p. 156

     

추신 6. 마지막으로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보다 덩치가 다섯 배는 크고 소통도 불가능한 존재가 여러분을 마음대로 다룬다면, 문손잡이가 닿지 않는 방에 여러분을 가두고 재료를 알 수도 없는 음식을 기분 내키는 대로 준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이들 처지도 이와 비슷한데, 기간이 짧아요. 그렇죠?) 2권 p. 236-237, <작가의 말>

     

 그렇게 독자가 주인공인 암고양이 바스테트에게 감정이입을 한 상태에서, 본능과 직관만 알고 있던 무지한 그에게 피타고라스가 인간의 지식을 설명해준다. 이는 결론적으로 유식한 저자가 무지몽매한 독자들에게 이것저것 교양 상식 같은 걸 가르쳐주고 있는 모양새를 만든다. 

 이런 관계는 독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뭔가 잘난 척 하면서 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 독자들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식을 얻기 위한 책도 아니고 소설을 읽으면서 노골적인 강의를 듣고 싶은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사지처럼 마치 아이에게 가르치듯이(실제로는 고양이에게 가르치지만) 독자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모두를 계몽시켜야 해요. 그러려면 우선 우리의 정신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지식이 주입되면 왜곡해서 이해하게 되니까요. 지식의 도구를 건설이 아닌 파괴에 사용할 테니까요. 실재적 정보를 거짓말로 둔갑시켜 동시대인들을 억압하는 데 쓸 테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프랑스 인본주의자 라블레는 <의식의 뒷받침이 없는 과학은 영혼의 파괴를 부를 뿐이다>라고 말했죠.」2권 p. 197

     

 작가의 선량한 의도는 알겠지만 상당히 위험한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더군다나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의 구도가 어쩔 수 없이 남녀 주인공의 구도가 되면서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느낌마저 준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남녀 주인공을 ‘시골’과 ‘도시’로 나눈 것을 떠올린다. 

     

 암컷인 바스테트는 자연에 더 가깝다. 본능에 충실하고, 직관과 영적 능력이 충만하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하다. 반대로 수컷인 피타고라스는 금욕적이고 이성적이다. 거의 수도승같은 분위기에 로봇이나 컴퓨터처럼 사고하고 움직인다. 절대로 흥분하는 때가 없고 자기 감정을,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그런 성역할에서 벗어난 캐릭터도 있지만(대표적으로 펠릭스라는 수컷 고양이) 남녀 주인공이 이런 구도다 보니까 성적 고정관념이 투사된 것 같아서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암튼 두 캐릭터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종국에는 같은 깨달음 속으로 합치된다. 바스테트는 직관과 영적 능력에 기댄 소통으로, 피타고라스는 이성과 논리, 지식으로 소통의 방식을 찾아낸다. 

     

 하지만 항상 우위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던 피타고라스보다 바스테트의 마지막 깨달음이 훨씬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려지면서, 작가는 여성이 지닌 특유의 성질(?)이 미래에 더 중요한 자질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캐릭터에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해 놓고 여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손을 들어주는, 병주고 약주고 식의 태도를 드러낸다.

     

 바스테트의 깨달음이 작가의 미래관과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인데,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들은 모두 형태만 다를 뿐 사실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혹은 원래 하나인 존재다. 각자의 생각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고, 심지어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란 무의미하고 타인이나 적으로 간주하는 것도 오해에 불과하다. 불행한 삶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자신의 욕망이 선택한 것이고,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발전을 돕는다.

     

 상당히 평화적인 사고방식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안일하고 보수적인 생각 같기도 하다. 작품 내내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끝내는 종교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것도 재밌다. 물론 그 종교는 특정 신과 교리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신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당히 신비주의적이기도 하고, 엘리트적인 느낌도 든다. 설득력이나 논리를 떠나서 일단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서 얘기했듯이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처럼 역지사지와 계몽적·교조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사실 아이들 동화에서도 이런 점이 두드러지면 좋은 작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보수적이고 현학적인 종교철학을 해결책으로 내놓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작가를 상당히 오만하게 보이게 만든다.

     

내일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에 안주하고 몸의 안위만 추구하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2권 p. 176

     

 작가는 무슨 기준으로 계몽시킬 사람을 정하는 걸까. 지식은 어느 정도까지 쌓아야 작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본능대로 생각없이 사는 것은 과연 죄일까. 마음 편히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펠릭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매사에 무덤덤하던 펠릭스를 떠올린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도대체 야망이라곤 없던 펠릭스. 그가 삶에 거는 기대가 없었던 만큼 삶도 그에게 되돌려 주는 게 없었지. 2권 p. 171

     

 어찌 보면 인간이 소설 속 모습처럼 전쟁과 환경파괴의 결과에 시달리는 건 본능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원래 본능대로 살던 고양이들이 다시 계몽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이 틀렸다기 보다는, 고양이의 입장에 충실하다 보니 인간의 입장은 좀 더 소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고양이가 보는 것만큼 인간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고양이가 생각하듯이 그 문제의 해결책이 그리 단순하지도 않다. 


 고양이는 오만하다.(혹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고양이를 그린 작품이어서 오만함은 필수적인 요소였는지도 모르겠다. 서두에 소개되는 글이 생각난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을 해 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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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거짓말을 한다 - 구글 트렌트로 밝혀낸 충격적인 인간의 욕망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엄청나게 재밌다는 사실을 밝히고 들어가야겠다. 

책 속에서 소개하는 조사 사례들을 조금만 뽑아보면,

     

남성이 포르노를 검색할 때 연령별로 가장 많이 찾는 여성 직업은 무엇일까?

가난한 가정 출신과 중산층 가정 출신 중 NBA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슈퍼볼 광고는 진짜로 매출을 늘릴까?

명문고에 간발의 차이로 붙은 사람과 떨어진 사람은 이후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까?

     

이런 이야기들을 도대체 어디 가서 들어볼 수 있겠는가. 

이런 사례들은 저자가 제시한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 중 극히 일부다.

     

설문조사를 비롯한 기존의 조사 방식에서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검색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솔직해진다. 빅데이터 속에는 사람들의 진짜 마음이 들어있다.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에 대한 중요한 근거다.


(작가는 원래 제목을 《내 음경은 얼마나 큰가요? 구글 검색은 인간 본성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로 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편집자가 극구 반대했는데, 서점에서 그런 제목의 책을 쑥스러워서 누가 사겠냐는 이유였다. 우리는 책을 사면서도 완전히 솔직해지긴 힘들다. 전자책 소설 부문 1위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던 해를 아직도 기억한다)

     

‘솔직한 조사 자료’로서의 장점을 어필하려다 보니 조사 사례 중에 섹스와 포르노에 대한 부분이 많다. (저자의 차기작은 ‘섹스’에 집중될 예정이라고 한다) 


검색 결과는 익명일 뿐 아니라 정확한 결과를 얻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솔직해진다. 이익을 보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솔직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네이버 영화 별점의 추락한 신뢰도와 영화 평점 사이트 ‘왓챠’가 내세우는 ‘클린한’ 영화 별점의 이유이기도 하다. 왓챠는 자신의 별점 평가를 토대로 취향에 맞는 영화를 추천해 준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하게 흥미로운 사례를 늘어놓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저자도 그것을 강조한다.

     

이 책에 특이한 사실이나 일회적인 연구가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들을 모아놓은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방법론은 대단히 새롭고 앞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해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 방법론이 어떻게 작용하고 무엇이 이를 그렇게나 획기적이게 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를 소개할 것이다. p. 34

     

물론 사례는 중요하다. 사소한 포르노 검색에서부터 계층 간 이동이라던지, 어떤 광고 방식이 소비자에게 더 먹히는가, 아니면 선거에서 누가 이길 것인지, 어떻게 해야 이길 것인지 같은 굉장히 심각한 이슈들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주제들도 빠짐없이 재미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1. 단순한 사례 모음. 혹은 

2. 그것을 통한 새로운 개념의 제시.

정확하게 말하면 저자의 아이디어는 그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사례들과 함께 두루뭉술한 큰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빅데이터 분석의 힘’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1. 새로운 유형의 데이터 제공

2. 솔직한 데이터 제공

3. 작은 집단도 클로즈업해서 볼 수 있는 것

4. 인과적 실험의 실행 가능성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기대한 구체적 방법론은 아니다. 

저자는 마지막까지 어떤 분명한 법칙이나 방식을 제시하지 못한다.

뭔가 그럴듯한 목표를 계속해서 장황하게 약속하긴 하는데, 끝까지 딱히 뭔가를 내놓는 건 아니다. 


엔딩에서도 계속 결론 내리기를 망설이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을 끝까지 읽을까’인데, 경제학 분야 책은 보통 완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면서 은근히 독자들 탓으로 돌린다. 마지막 문장이 참 걸작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적절한 방법으로 끝맺을 것이다. 데이터에 따라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에 따라서 말이다. 나는 친구들과 맥주를 한잔하고 이 망할 결론을 그만 쓸 것이다. 빅데이터가 말하길 여기까지 읽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니까. p. 324

     

저자는 뭔가 대단한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만을 내보이다가 결국 도망쳐 버린다. 책의 완성도를 낮추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정말 아쉽다. 왜냐하면 이 책이 정말 재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법칙’이나 ‘개념’, 혹은 ‘방법론’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만 벗어나면 긍정적인 결말도 쉽게 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터에는 이야기가 있다’(p. 236)라는 챕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빅데이터 분석이 인간 본성, 사회적 현상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표들을 제시한다는 건 위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왜 그런 지표들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파고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저 그렇다는 것만 알고 그것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예측을 할 때는 어떤 것이 효과가 있는지만 알면 되고 그 이유까지 알 필요는 없다. p. 92

     

그게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상상력이 자극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게 바로 내가 ‘데이터에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챕터에 주목하는 이유다.

     

조사대상인 개개인의 사람들은 모두 데이터 속으로 사라진다. 더 정확한 내 느낌은 데이터 속으로 ‘숨는다’. 모든 적나라한 욕망들이 숫자로만 드러난다. 그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혹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여기가 바로 상상력이 자극되는 부분이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그 부분.

     

그렇게 상상을 하다 보면 나조차도 데이터 앞에서 숨는 셈이 된다. 우리는 숨어서 남의 속마음 지켜보는 걸 즐긴다. 영화관에 앉아서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키득거린다. 어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다. 작가도 분명 이 장점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여타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데이터와 수치를 기반으로 한다. 생동감 있고 광범위하다. 데이터가 너무도 풍성해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시각화 할 수 있을 정도다. 에드먼턴의 물 소비를 분단위로 확대하면 피리어드가 끝날 때 소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마이애미로 이주해서 탈세를 시작한 사람들을 확대하면, 나는 이 사람들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금을 덜 내는 방법을 배우는 장면을 그릴 수 있다. 연령별로 야구팬을 확대하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내 남동생의 어린 시절, 여덟 살 때 자신들을 끌어들인 팀을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성인 남성 수백만 명을 그릴 수 있다. p. 237

     

절대적인 다수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어렵다. 그 다수를 구성하는 개개인을 상상하는 건 더 어렵다. 일반인들이 가진 알량한 경험과 지식으로는 그 전체의 단 10퍼센트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더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빅데이터의 활용 방안은 훨씬 더 광범위해질 것이고, 전문화될 테지만, 바로 이런 상상력 자극의 매체로서, 인간과 사회를 상상하는 아주 좋은 단서로서의 가치도 크다고 생각한다. 빅데이터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 솔직한 속 얘기다.

     

모두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뽑혔는가. 작가의 연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보고 박근혜가 당선됐을 당시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국내 언론들이 생각났다. 


오바마를 뽑았던 사람과 트럼프를 뽑았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 박근혜를 끌어내린 사람들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내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사용자는 딱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더 솔직하다. 겉으로 표방하는 정치적 입장과는 다르게 온라인에서는 그 높은 벽을 쉽게 넘나든다.


미국 내에 해결되지 않은 증오와 편견이 많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자주, 좀 더 구체적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에게 빅데이터가 주는 가능성은 희망적이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그 거짓말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가장 놀라운 부분이자, 가장 재밌고 흥미로운 부분이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아쉬운 부분(실은 저자가 가장 아쉬워하고 있는)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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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촛불이다 - 광장에서 함께한 1700만의 목소리
장윤선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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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촛불집회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애당초 박근혜 정부에 대한 울분이 터져 나온 사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촛불집회를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잊고 있던 진기록들을 다시 접하니 말문이 막힌다. 대통령 지지율 20대 ‘0%’. 스무 차례나 연속으로 계속된 촛불집회. 전국 1700만 명의 촛불집회 참가자. 등등. 이런 나라를 잘 살아냈구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해진다.

  

“(…) 우리 사회 기득권세력이 이렇게 부도덕하고 이렇게 천박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상상 그 이상이군요.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우리가 살아낸 세월이 참 억울해요. (…)” p. 166-167, 배우 문성근

  

요즘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벌써 격세지감이 느껴지고, 촛불 국면 당시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잊고 있던 한탄이 떠오른다. ‘이게 나라냐?’ 

남북정상회담이 너무 쉽게 이뤄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쉽게 서로의 경계를 넘는 남북 정상의 모습을 보면서, 진작 이러면 될 것을 이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헛웃음만 나온다. 그렇다. 지금, 이게 나라다.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촛불집회는 이 나라가 아직 나라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자원봉사가 넘쳐 났고, 비폭력을 그렇게도 외쳤고, 친절하려고 노력했고 웃으며 즐거우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적폐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 음흉하고 악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숨이 막히도록 꽉 조여드는 상황에도 화내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대개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군가 먼저 꼭 신경질을 내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만원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한둘은 꼭 짜증을 낸다. 짜증은 바이러스처럼 퍼져 전염이 되고 급기야 싸움으로 불붙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화문광장 촛불 주변에는 미소뿐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 아빠를 먼저 배려하고, 내 아이 남의 아이 구분하지 않고 애들을 먼저 살폈다. “괜찮으세요?” “미안합니다.” 배려도 많았다. 불의한 권력,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정치집회였지만 현장은 거칠지 않았고 정치적이지도 않았으며 소박하고 매우 따뜻했다. p. 52-53

  

“제가요,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제 일흔셋입니다. 그런데 왜 꼭 여기를 왔느냐, 이유가 있지요. 역사의 이 현장에서 그들과 같은 공범이 되지 않으려고 왔습니다. 그러려면 이 광장에 나와 함께 외쳐야만 공범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p. 158

  

이 나라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무능하고 국민들이 나서서 일을 해결한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억울함을, 우리의 결백함을 거듭 증명해 보여야 했다. 정말 피곤한 나라다.

  

돌이켜보건대, 촛불집회가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외쳤던 것은 ‘국민이 곧 국가권력’이라는 아주 당연하고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 청사 건물 외벽에 레이저로 구호를 쏘는 것이었고,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행진할 수 있는 것이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한 출판사에서 헌법 책을 무료로 나눠줬고, 10분 만에 동이 났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살벌한 ‘갑의 나라’에서, 갑질의 극단인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앞에서, 그 당연한 사실, 국민이 곧 국가라는 사실을 되찾는 것은 중요했다.

그래서 의외로 시민들의 인터뷰 중에는 적폐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부분이 많았다. 국민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줬다는 것이다.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할 때에도 시민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때가 5000명 정도 돼요. 그러니 이번에 그 4배가 더 나온 겁니다. 2만 춘천 시민들이 김진태 의원 사무실 앞 6차선 도로에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하여간에 이렇게 많은 춘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한 건 김진태 의원 공이 커요. 김진태 의원이 춘천 시민을 촛불로 단결하게 해줬어요.” p. 158

  

(김진태 의원은 당시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말로 촛불집회에 기름을 부었다)


확실히 대한민국은 촛불집회 이후로 더 용기 있어졌다. 적폐를 적폐라 말하고, 부정을 부정이라 말하며 여기저기서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촛불집회 때도 그랬다. 적폐들은 박근혜와 최순실만이 아니었다. 재벌 문제, 노동문제, 위안부 문제 모든 약자들이 입을 열었고, 모든 폐부가 터져 나왔다. 촛불이 끝났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적폐 청산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계속해서 촛불을 들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제는 걷잡을 수 없다. 시대는 변했고 국민도 변했다.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는 촛불집회 연설의 마지막을 ‘모두 조심하십시오.’라는 말로 맺었다. 우리가 촛불을 잊고 지낸다면 적폐는 다시 우리를 옥죄어올 것이다. 2016년의 촛불은 미래의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한다. 모두 조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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