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나에게 친절하기로 했다 - 나를 아끼고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크리스토퍼 거머 지음, 서광 스님 외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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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표지를 보면 현대인, 특히 자존감 낮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문구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책을 펼쳐보면 일종의 불교적 명상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처음의 당혹감을 추스르고 내용에 집중하다 보면, 이해가 잘 안 가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라도 내가 이해를 제대로 했더라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은 마음이 든다. 

 

 책의 핵심은 자기연민과 마음챙김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자기연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나온다.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네이버 국어사전)

 

 하지만 이 책에서는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부정적 태도로 자신을 더 힘들게 하기보다, 자신의 상처와 상황에 대해 먼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와 일맥상통하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간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자기연민이란 수용의 한 형태다. 수용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을 가리킨다면, 자기연민은 그런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연민이란 고통스러워하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p. 56

 

 마음챙김이란 개념도 자기연민과 비슷한데, 좀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챙김이란 힘겨운 일을 겪을 때 우리를 몸에 안심하고 계속 머무르게 해주는 특별한 자각 상태다. 마음챙김은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생활방식이 될 수 있다. 마음챙김 상태에서는 불쾌한 경험으로부터 굳이 도망칠 필요가 없다. 불쾌한 경험 주위에 숨통을 틔워주는 작은 공간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p. 61

 

 얼핏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저자는 독자가 계속된 뜬구름 잡는 소리로 혹시라도 흥미를 잃고 포기할까봐 계속해서 다음 단원에 나오는 내용을 미리 예고한다. 자기연민이라는 원래 있던 개념을 먼저 내세우고, 그 이후에 마음챙김이란 낯선 용어를 내보이는 것도 비슷한 목적으로 생각된다. 워낙에 이해하기 쉽지 않고, 흥미를 잃어버리기 쉬운 탓이다. 

 

 내용과 관련된 과학적 실험 결과를 박스 안에 넣어서 사이사이에 배치하기도 한다.(과학의 권위를 빌려오는 느낌. 큰 도움은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 개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보다는 ‘무엇이 아닌지’를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개념들이 애초에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고 느껴졌다. 

 

 ‘마음챙김이 아닌 것’이라는 제목의 박스(p. 86)에는 6가지의 마음챙김이 ‘아닌 것의 예’가 등장한다. 

 마음챙김은, 느긋해지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아니다, 평범한 생활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비워내는 것이 아니다, 어렵지 않다,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6가지에 더해서 마음챙김은 현실도피도 아니고, 자포자기도 아니고, 맹목적 수용도 아니고, 체념이나 침체도 아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아닌 것’들이 마음챙김을 설명해주는 단서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가장 가까운 개념이 현실도피일 것 같은데,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는 점이 어렵다. 

 명상 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마치 외부에서 자신을 바라보듯’한 시점을 요구할 때가 많다. 마음챙김은 거의 그 정도 수준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서 일체의 집착 없이 객관적으로 그것을 ‘관조’하는 것 말이다. (이것조차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일반적으로 자기연민은,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태도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현대인이라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기 위해 자기연민부터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반대로 자기연민을 통해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그 목적성 자체에는 수긍이 간다. 객관성을 잃어버리면 문제를 파악조차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거기에 더해 자기를 몰아붙여서는 문제가 더욱 커질 뿐이라고 한다. 저자가 내세우는 공식은 이렇다. 

 

 아픔 × 저항 = 고통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보수적인 집권층이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태도 같아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아픔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원래 인생은 아픔이니까, 그것을 받아들이고 관조해라. 그러기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 

 

 모든 문제는 개인 수준의 정신승리로 해결 가능하다. 모든 것은 ‘오해’의 문제일 뿐, 객관적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될 수가 없다. 너무 순진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런 정신승리가 필요하려면 모든 방법을 다 강구했지만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하지만 도무지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가장 비슷한 개념이 ‘현실도피’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아픔에 대한 저항 없이 생명체는 생존할 수 있을까, 시민사회는 발전할 수 있을까. 

 

 가만히 보다 보면 이런 식의 치료법이 시행되는 곳은 미국의 대도시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도 힘든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고학력으로 단련된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거기에 생계의 문제가 아닌 마음속을 괴롭히는 문제 해결에 이런 고급(?) 치료를 받는다는 건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전통적인 정신과 치료나 종교 활동이 아니라 대안적인 명상을 치료법으로 선택하려면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정도의 잘난 사람들이라면 마음챙김의 태도를 불쾌한 집권층의 프로파간다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문제될 건 없다. 

 

 저자는 이것이 종교가 아니라고 했지만, 유사성을 들어 불교로 분류해 본다면, 대승불교 보다는 소승불교에 가까운 것 같다. 개인적인 수행이 좀 더 강조되는. 그래서 책은 개념 정의보다는 체험 자체를 요구하고 있다. 명상을 함께 하면서 읽어 내려가야 하는 일종의 가이드북인 것이다.  

 

마음챙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체험해봐야 한다. 말로는 마음챙김을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 마음챙김의 순간이란, 말보다 앞서 경험하게 되는 일종의 자각이다. p. 61-62

 

 종교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 정도라면 거의 신흥종교에 필적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종교라고 말하지 않는 종교라고나 할까. 

 

 하지만 확실히 소승불교는 책으로 배우기 힘들 수밖에 없다. 명상 방법을 글로 읽으면서 감정이입을 하다보면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다. 아마 절이었다면 죽비로 한 대 맞았을 것이다.  

 

 불교적인 배경지식이 있고, 명상을 적극적으로 삶에 적용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추천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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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ta 2019-02-21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비판적인 도서 평가이네요. 혹시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책은 현실도피, 경제력, 신흥종교 등과는 전혀 무관한 책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한번 꼬이고, 그렇게 번역된 글을 독자가 읽는 과정에서 다시 곡해가 일어난 듯합니다. 저자와 역자, 독자가 직접 만나 오해를 풀었으면 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어렵겠지요. 번역의 문제라고 해서 원서로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하여튼 제가 아는 한에서는, 이 책은 명확하지 않은 개념을 공연히 어렵게 꼬아서 만든 책은 결코 아닙니다(그럴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경제력 있는 지식 계급의 한가한 치료 활동도 절대 아니고요. 적절한 번역과 올바른 독해는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국내 저자라면 모셔다 놓고 오해를 풀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서광 스님을 위주로 하는, 거머 박사의 Mindful Self-compassion(MSC) 모임에 실제 나가보시면 이러한 오해는 어느 정도 풀리실 거라 생각합니다. 주저리 주저리 제가 아는 말만 늘어놓았네요, 죄송합니다.

Bookbuff 2019-02-22 00:47   좋아요 0 | URL
안타까움이 담뿍 묻어나는 댓글 잘 봤습니다 ㅎㅎ 그런데 ‘모임에 실제 나가보시면’ 오해가 풀릴 거라는 말씀은 다시 포교용이라는 생각이.. ㅠㅠ 어떤 종류의 종교이든 그 종교의 ‘도’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죠 책 한 권으로 이해하기를 바란 저의 욕심이 문제라면 문제 같습니다^^
 
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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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가 고백하는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나’.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에 대한 거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주제에 비해 제목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대문호답게 결론부터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겪어왔던 사고와 감정의 과정 전체를 처음부터 기승전결을 갖춰 설명합니다. 덕분에 그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독자도 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독자는 톨스토이가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느끼게 되거든요. 


 동어 반복이 많은 데도 워낙에 글을 잘 쓰다 보니까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게 잘 읽힙니다. 내용 자체도 결국에는 ‘돌아온 탕자’같은 단순한 이야기지만 막상 읽다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게 바로 ‘문학적인 힘’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책을 단순한 기독교 서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한 가지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톨스토이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고뇌이기 때문입니다.  

 

오십의 나이에 나를 자살 직전으로 몰고 갔던 나의 의문은 우매한 아이에서 지극히 지혜로운 나이 많은 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고,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람이라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지 않고는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의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이나 내일 하게 될 일의 결국은 무엇인가? 내 인생 전체의 결국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왜 나는 어떤 것을 원하거나 행하는 것인가?” 또한 이 질문은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 속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드시 내게 찾아올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p. 38-39


 물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지는 않죠. 하지만 톨스토이의 경우는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중차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의미를 잃은 삶을 끝내지도,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어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누구보다 진실한 실천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도무지 실재 삶과 이상의 괴리를 견딜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탐구하게 됩니다. 그는 오히려 이런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이상하게 여깁니다. 

 

다만 내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진리가 아주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을 것인데, 내가 그런 진리를 왜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질병과 죽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내게 닥쳐올 것이고(아니, 그런 것들은 이미 닥쳐왔다), 부패로 인한 악취와 구더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내가 한 일들은 그것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잊혀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분명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내게 정말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p. 31-32

 톨스토이는 먼저 학문에 매달립니다. 크게 실험 학문과 추상 학문으로 나눠서 파고들지만, 곧 전혀 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다음으로 매달린 것은 역사적으로 지혜롭다고 추앙받는 성현들.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솔로몬, 석가모니로 대표되는 이들에게서도 해답을 얻지 못한 톨스토이는 결국 (넓은 의미의) 기독교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해왔던 이성적 지식 외에도, 인류 전체가 소유해 온 또다른 종류의 지식, 곧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 삶의 의미를 알게 해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앙이라는 지식이었습니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 75


 하지만 신앙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시작에 가까웠죠. 왜 미신에 가까운 예식들이 있는 것인가, 현란한 교리는 또 어떤가. 왜 신자들은 비신자들보다 더 세속적인가. 이성을 버리고 시작한 신앙이었지만, 계속해서 이성적인 의문들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체를 통째로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신앙은 엄밀히 말하면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는 ‘톨스토이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지만, 그 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회의적인 기독교인. 

 

 그의 신앙에서 한 가지 도드라지는 것은 민중(혹은 노동계급)들에 대한 동경(?)입니다. 귀족 계층과 지식인층에 실망감이 컸던 그는 민중들을 상대적으로 순수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여깁니다. 확실히 무리가 있는 시각입니다. 귀족들 중에도 사이비 같은 종교인들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다수 민중들 중에도 사이비는 있을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비신도가 많을 수도 있고요. 톨스토이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그를 엘리트적이고 귀족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정도라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를 나태와 향락과 삶에 대한 불만족으로 허비하고 있었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갔지만 부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삶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보았습니다. p. 85


 제가 생각하는 신앙은 성도 각자의 성향에 맞춤형으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런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 책에 드러나는 신앙은 톨스토이의 경우에 가장 강한 설득력을 가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속에서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겠지요. 맥락은 다르지만 적절한 문구가 눈에 띕니다.


 

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제기했던 의문, 그리고 삶은 악이라고 했던 나의 대답도 지극히 옳은 것이었지만, 단 한 가지 잘못된 것은 오직 내 자신의 삶에만 해당되는 그 대답을 인간의 삶 전체로 확대해서 적용한 것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p. 87-88

 

 톨스토이는 노동 계급에 대한 지향을 끝까지 밀어붙이다 오히려 그들을 모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인 순종을 노동 계급의 순종으로 비유하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축처럼 여기는 단순하고 무식한 노동자들은 주인을 비난하지 않고 주인이 그들에게 시키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주인의 뜻을 이룹니다. 그러나 지혜롭다고 하는 우리는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주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함께 둘러앉아서 “우리가 왜 손잡이를 조작하고 이 쓸데없고 어리석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토론하고 숙고를 거듭한 후에, “주인은 어리석거나,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이 유일하게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인데, 우리가 알게 된 유일한 것은 우리의 삶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삶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p. 91

 

 앞서 제목에 비해 상당히 거창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했는데, 거창한 문제에 비해 결말이 시시한 편이어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종교에서 발견한 문제점과 의문들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고 끝을 맺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챕터의 맺음말입니다.

 

내게는 종교적 가르침들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었지만, 그 가르침들 속에는 거짓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조금도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밝혀내어서 둘을 구분해야 했습니다. (…) 어떠한 결론들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런 글이 가치가 있고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이 글의 후속편으로서 어딘가에서 출간될 것입니다. p. 120

 

 역시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모두 다루기에는 그의 고민의 폭과 깊이가 너무 넓고 깊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집요하게 인간 보편의 문제를 파고든 글을 우리에게 남겼다는 것만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의 고뇌의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떼어낼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학문이나 이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라는 것도요.


 고전의 역할은 그런 인간 보편의 고민의 과정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처음 밑바닥부터 다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전의 연장선상에서 고민해볼 수 있으니까요. 톨스토이가 고백록이라는 개인적인 글을 남긴 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미련한 절차를 다시 밟지 않게 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언제 어디서나 발견하는 그 유일한 해법은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아주 까마득하게 먼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해법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렵고 난해한 해법이어서, 우리가 그런 해법을 고안해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해법을 무심코 경솔하게 파괴해 버리고서는, 또다시 우리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그 의문을 제기하고 엉뚱한 곳에서 대답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합니다. 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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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강의 삶과 죽음 - 금강요정 4대강 취재기
김종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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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학교에서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이 의식주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 밑에 더 기본적인 조건이 충족됐을 때의 말이다. 즉, 공기와 물이 깨끗하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지금 우리는 의식주 문제가 뒤로 밀려나는 역행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공기는 미세먼지와 황사로 오염됐고, 4대강 사업으로 식수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옷, 더 좋은 먹을 것을 추구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삶의 질이 떨어지는 중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김종술 기자는 이런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책 한 권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도 반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말이다. 저자는 4대강 사업의 폐해를 10년 동안 추적했고, 4대강에서 먹고 자며 ‘큰빗이끼벌레’의 등장 등 수많은 특종을 세상에 알린 일명 ‘금강 요정’이다. 이 책은 기자의 10년 동안의 취재 기록이다.  

 

 4대강 사업 10년의 기록은 부조리와 난장판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과연 이 난장판의 원인이 뭘까,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세 가지 정도의 원인이 느껴진다.  

 

 첫 번째로는 자연과 과학에 대한 무지, 혹은 무시다(결국 둘 다이겠지만).  

 자연에 함부로 손을 대면 우리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고, 그것을 함부로 수습하려다 보면 일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4대강 사업처럼 대규모로 자연을 조작하는 일은 면밀한 조사와 전문가와 과학자들의 조언을 수렴해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은 한 번 망가지면 돌이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치와 행정은 과학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 같다. 과학자들을 물정 모르는 뜬구름 잡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국민적인 과학 교육이 부재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책에 소개된 4대강 사업의 여파를 보면 무식이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도 그렇지만 공무원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두 번째는 ‘행정 편의적 일처리’를 들 수 있겠다. 물론 여기에는 윗선의 압력도 포함된다. 일명 ‘가카’로 불렸던 제왕적 대통령의 시대에는 더욱 상명하달이 중요해질 것이다. 일개 시민 기자에 불과한 저자에게는 견고한 바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지난 10년간 강에서 살면서 물고기 떼죽음과 녹조, 큰빗이끼벌레, 실지렁이와 붉은깔따구 등이 발생할 때마다 환경부의 입장을 들으려고 수없이 전화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늘 이랬다.  


“(물고기 떼죽음) 조사중입니다.” 

“(녹조) 확인해보겠습니다.” 

“(큰빗이끼벌레) 확인하고 있습니다.” 

“(실지렁이·붉은깔따구) 연구용역중입니다.” p. 305-306

 

그리고 그런 태도는 정권이 바뀐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뀌고 수문이 조금 열렸으나 공직사회는 그대로다. 현장이 아니라 책상이 일터다. 환경부가 내놓은 수문개방 뒤 현장조사 결과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오늘도 책상 앞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보고’만 받고 있다. 환경부는 4대강 수문개방에 따른 결과를 모니터링하려고 상황실을 운영한다. 하지만 현장조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이다. p. 304

 

 앞에서 말한 과학에 대한 무지에 더해,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공무원들이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정말 코미디다. 근시안적인 대책은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자연은 한번 망가지면 여파가 어디까지 향할지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렵다. 황토를 뿌리고, 배를 띄워 녹조를 흩어놓고, 수차를 돌린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언제까지 해결하고 있다는 퍼포먼스만 보여줄 것인가.  

 

 현장을 모르는 공무원에 대한 질책은 저자의 자신감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공무원들이 김종술 기자보다 4대강을 더 많이 돌아봤다고 할 수 있을까.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행정 편의적 일처리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돈은 계속 들어가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공무원들은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역시 ‘지도자의 오만함’이다. 대통령 본인이 제왕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 그것은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과 과학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오만함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오만함이 아니라면 다시 ‘무지’뿐이다. 무책임한 무지) 청계천 복원을 비롯해 건축적인 성과로 대통령까지 오른 ‘그’의 눈에 자연 그대로인 4대강은 ‘미개척지’나 ‘전근대’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구시대적 발상이다. 

 

죽어가는 금강을 지켜보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의 얼굴. 그는 자기가 저지른 짓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회고록에 담긴 내용을 그는 정말로 믿었을까, 아니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오만과 탐욕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일까? p. 209

 

“(…) 하지만 지금은 댐을 짓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댐을 지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드물어요.(…)” p. 271, 캘리포니아 아메리칸 워터의 로버트 제임스 감독관

 

 이 사태의 밑바닥에는 자연을 향한 인간의 오만이 있었다. 이 책을 쓴 김종술 기자와 추천사를 쓴 이외수 작가는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고발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진리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만물의 영장 자격이 없는 인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p. 5, 이외수 작가의 추천의 글 중

 

 하지만 강은 ‘역습’(‘강의 역습’ p. 110)해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막아낼 능력이 없다. 자연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한 존재다. 우리는 누구도 신이 아니다.  

 

 지도자의 제왕적 오만함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국가와 국민, 다른 하나는 자연과 과학. 자연과 과학에 있어서 저자는 ‘자연 스스로 갖는 법적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가는 미래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자연에도 스스로 방어할 권리를 줘야 한다. p. 319

 

여기에 더 구체적으로 더해, 우리는 좀 더 과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위협받지 않아야 한다. 저자인 김종술 기자는 말한다.  

 

돈은 어디선가 융통하면 된다고 쳐도, 연구기관들은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조사를 하지 않으려 했다. 단 한 번도 신뢰할 수 있는 수질분석을 해주는 곳이 없었다. p. 179-180

 

 국가와 국민에 대한 지도자의 오만에 대해서는 시스템에 대한 지적을 한다.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었지만, 언제 한번 제대로 고쳐진 적이 없는 바로 그 문제다. 미국 사례를 취재하러 갔을 때 현장 감독관은 말한다.  

 

“한국의 4대강 사업과 같은 일은 미국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전에 여러 전문가들이 긴밀하게 협의해 문제를 해결하니까요. 여러 기관과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돼 있습니다. 아메리칸 워터는 21개 주에서 영업중인 큰 회사여서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습니다.” p. 273

 

저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휘둘러 강행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어렵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거절하면 끝입니다. 한국의 4대강 사업은 여기서 결코 벌어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p. 274

 

 이 책에서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을 제외하면, 수도승의 고행과도 같은 저자의 취재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라도 새끼가 여기까지 굴러와서 반대만 하는 거야?” 

“오늘부터 우리 광고 끊어주세요…” 

“너무 강하면 부러집니다.” 

“청와대와 국정원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요즘 당신 얘기만 하던데 조심해요. 기사 좀 그만 쓰라고.” 

“요즘 중국 사람들한테 돈 300만 원만 주면 사람 하나 묻어버린다고 하던데….”

 

 모두 저자가 실제로 들은 욕설과 협박들이다. 현장에서 삽과 곡괭이로 위협 당하고, 쫓겨나는 과정을 보다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러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개고생하며, 취재를 계속해야 하나?” 어느 날 울컥해서 눈물을 쏟았다. 홀로 빗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물고기 주검들 사이에서 노숙을 했다. 뱀에 물리고 공사 인부한테 두드려 맞았다. 물길이 막히니 상식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건,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들이 사라진다는 거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끝날 때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대강 사업은 현재형이다.  (책날개 내용 중)

 

 강에서 노숙을 하고, 신발과 옷은 모두 헤지고, 큰빗이끼벌레를 먹고, 녹조 강물을 마시는 장면들은,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나 세례 요한 같은 선지자를 떠오르게 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집착하며 문제가 심각하다고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환경과 자연을 위해서 저자와 같은 기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눈에 불을 켜고 강과 정부를 감시해줄 감시자가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해진다. 우리는 그들의 고행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고행의 현장에 한 수녀님이 찾아와 동참했다는 것은 그래서 뭔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녀님이 끝내 수녀복을 벗고 사회운동에 참여했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우리 삶을 이루는 기본 조건인 의식주를 생각해 봤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의식주를 위해서 김종술 기자의 의식주를 희생시킨 건지도 모르겠다. 집이 없는 것처럼 강변에서 노숙을 하고, 옷이 없는 사람처럼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처럼 큰빗이끼벌레를 먹고, 녹조 강물을 마시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런 지킴이들을 지지하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 우리 일을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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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레볼루션 - 시간을 지배하는 압도적 플랫폼
로버트 킨슬.마니 페이반 지음, 신솔잎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유튜브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늘어놓는 책은 아니다.  

유튜브가 산업 전반에 미치는 거시적인 효과들을 조망한다. 

그래서 오히려 유튜버가 되는 자잘한 팁들을 보기 전에 읽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유튜버의 수익 구조에 대한 챕터 ‘크리에이터의 수익은 어디서 오는가’) 

물론 유튜버에 관심이 없는 나 같은 독자들도 유튜브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일단 저자가 유튜브의 콘텐츠, 광고, 영업, 마케팅, 크리에이터 운영 전반에 걸친 사업을 책임지는 CBO(Chief Business Officer)라고 한다. 뭔가 대단히 중요한 직책인 것 같다. 어쨌거나 유튜브의 핵심에 있는 사람이 쓴 책이라 공신력이 있는 편이다. 물론 자기 회사(유튜브) 홍보나 감싸는 말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업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기에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관계자 인터뷰들의 생생함도 업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유튜브를 포함한 스트리밍 산업의 여파와 그 주인공들을 ‘스트림펑크Streampunks’라고 명명하고, 유튜브가 바꿔버린 세계적 산업, 문화, 언론의 변화를 조리 있게 설명하는데, 

처음에 유튜버 개개인에게 맞춰졌던 시점은 점점 넓어져 산업 전반을 거쳐 세대론에 이르고, 미래의 미디어와 다음 세대에 대한 전망으로 끝을 맺는다. 그 과정이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유튜브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느냐를 말하는 동시에 유튜브의 등장을 필요로 했던 새로운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점이 특히 재미있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 새로운 세대는 크게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와 지금의 10대로 나뉜다. (지금의 10대는 마지막에 ‘Z세대’라는 이름으로 따로 다룬다) 결국 현재의 10대, 20대, 30대를 말한다. 

 유튜브와 새로운 세대는 서로를 발전시켰고, 나머지 모든 것들을 변화시켰다. 사실상 유튜브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바로 이 세대다. 

 그들에게 유튜브는 정체성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모두 처음 들었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주간지 <버라이어티Variety>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설문조사 결과에 많이 놀랄 것 같다.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상위 6위까지가 모두 유튜버였다. 그 뒤를 이어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조니 뎁Johnny Depp, 레어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 등의 이름이 올랐다. (…)  

유튜브에서 10대와 밀레니얼 구독자를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유튜버가 친구나 가족보다 자신을 잘 이해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40퍼센트였다(두 딸을 둔 아버지로서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크리에이터가 자신의 삶 또는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놓았다고 답한 사람은 무려 60퍼센트에 달했다. p. 27

 

 우리는 유튜브가 익숙한 세상에 살고 있고, Z세대나 밀레니얼 세대와도 동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유튜브도 잘 알고 있고, 새로운 세대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튜브 세대는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포맷으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등장으로 개인이 동영상을 제작하는데 좋은 환경을 가지게 됐다. 이런 것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 ‘새로운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현실도피가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말은 어떤가. 아니면 다양한 인종의 영상이 고루 인기를 끄는 중에 유독 흑인 영상의 조회수가 낮다는 건 알고 있었는가. 유튜브의 조회수를 좌우하는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제가 트리니다드 출신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트리니다드 조회 수가 엄청나게 올라가요. 그저 그 나라 이름을 말한 것만으로요. 호주나 캐나다에서 트래픽 수가 늘어나면 영상에서 일종의 인사말을 건네요. ‘호주의 총리가 무슨무슨 얘기를 했는데’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호주의 팬들이 무척 좋아하거든요. 영상에서 아주 짧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이 커져요.” p. 119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쓰는 전략이 하나 있어요. 〔영상이 시작되고〕 처음 15초 안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거죠. 우린 다 인터넷 세대잖아요. 누구나 어느 정도의 주의력결핍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는 영상에 15초 이상 집중하질 않아요. 거기에 5초가량의 광고가 있잖아요? 그러니 15초에서 5초를 제하고 남은 10초 안에 시청자의 이목을 사로잡아야 해요.” p. 183

 

 ‘진짜 뉴스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열 번째 챕터에 이르면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먼저 ‘젊은 세대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잘못된 통념에 대해 일침을 가하더니, 그들은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류 미디어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러 가지 언론과 정부의 거짓말 스캔들을 목격한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얄팍한 눈속임에 속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굉장한 박탈감을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량 살상 무기의 시대였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미국 정부의 공모, 그리고 주류 매체에 대한 불만까지 가득한 시대였죠.” 

밀레니얼 세대가 주류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p. 242

 

그들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 

 

“(…) 베이비부머 세대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를 펼치거나 <60분>, <NBC 나이틀리 뉴스NBC Nightly News> 같은 시사 프로그램을 보거든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라고 듣고는 ‘그렇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군’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달라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그 나라에서 전해지는, 또는 대안 매체에서 게시하는 다양한 블로그를 읽고 영상을 봅니다. 그러면서 ‘아, 실상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죠. 그렇게 자란 세대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여기 있습니다’하며 무언가를 제시해서는 먹히지 않습니다.” p. 245

 

 주류 미디어의 뉴스에 속지 않으려는 새로운 세대의 태도는 반대로 광고가 노골적인 마케팅 전략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훌륭한 콘텐츠로서 만들어진 광고라면 기꺼이 그것을 광고 이상의 것으로 높이 평가해준다. 

 

“(…) 요즘 젊은 세대는 정말 똑똑합니다. ‘오, 나 스파이크 존즈 좋아하는데. 그 사람 영화를 걸다니,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마냥 ‘딩동댕동’만 들려주면서 인텔 고유의 무언가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p. 266

 

 이런 능동적인 시청자는 이전 세대에는 없던 새로운 세대의 특징이다. 이것이 유튜브와 결합되어 모든 걸 새롭게 바꿔버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대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밀레니얼 세대도 나이를 먹고, Z세대는 이미 소비력을 갖추고 있다. 곧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흐름 그 자체다. 확실히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했다. 지금 눈앞의 세대론에 갇혀서 큰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제아무리 유명한 유튜버라도 말이다. 

 

“이분들이 살아온 시대도 존중합니다.” 스쿠터가 말했다. “저도 언젠가 그 사람들처럼 될 거예요. 머지않았죠.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까요. 제가 60~70의 나이가 됐을 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과학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만큼 40~50대가 되면 벌써 신기술이나 트렌드를 놓치게 될 거예요. 당장 내년이 될지도 모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저를 얼빠진 사람이라고 말했던 그 기준과 방법들이 현재는 너무도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p. 300

 

 이제 권위 있는 미디어와 스타는 경계가 희미해지고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유튜브라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평등한 매체로 인해 누구나 CNN이 될 수 있고, MTV가 될 수 있고, 마이클 잭슨이 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대한 일화들은 정말 극적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될 것이다. 

 

“유튜브의 규모와 더해져 우리는 차세대 CNN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차세대 CNN보다 열 배는 더 대단해질 겁니다.” p. 256

 

유튜브는 차세대 HBO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차세대 MTV 자리를 노리는 것도 아니며, 차세대 타임워너라는 이름도 원치 않는다. 유튜브의 미래는 세상에 아직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그 무엇이다. p. 344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유튜브 레볼루션, 유튜브 ‘혁명’이다.  

변화의 흐름을 선도할 수는 없더라도, 당장 떼돈을 버는 유튜버는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변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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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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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p. 7 


 어머니의 칼은 어머니를 여자나 인간이 아닌 한 마리의 짐승으로 만드는 도구다. 필요에 의해 집었지만, 어느새 도구가 정체성이 된 인간. 칼은 맹수의 송곳니 같은 것이다. 


 짐승인 어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끼 입에 먹을 것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새끼가 먹는 것은 희생당한 어떤 생명체다. 식물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어머니의 칼은 가차 없이 그것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새끼가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를 꺼내 막 썰었을 때, 순하게 숨 죽은 배추 줄기 사이로 신선한 핏물처럼 흘러나오던 김칫국과 자그마한 기포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국수를 삶으면 나는 그 옆에 서서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어머니는 갓 익은 면발 한두 젓가락을 건져 주었다. 그런 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 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 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肉〕 맛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p. 15-16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송곳니는 어머니 자신을 물어뜯는다. 칼자국은 그렇게 어머니의 손을 가로지른다. 손을 베인 어머니의 피가 국수 그릇에 묻었을 때, 손님이었던 할머니는 놀라지도 나무라지도 않는다. 어미가 송곳니에 손을 베는 일은─그 또한 어미였던─할머니에게 놀랄 일도 나무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끼를 먹이다 보면 생기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머니가 속한 짐승의 세계는 누구나 바람을 피우는 육체의 공간이고, 그러면서도 부끄럼을 모르는 자연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어머니는 딸을 자랑하기 위한 공간으로 목욕탕을 선택한다.  


내 몸이 제법 어른 꼴을 갖추게 되고부터 어머니는 나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려 했다. 어머니가 특히 좋아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어머니는 발가벗겨진 내 육체를, 그러니까 그냥 자식이 아니라 다 큰 자식의 풍성한 육체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그걸 발견할 수 있었다. 봐라, 내 새끼다. 털도 나고 젖도 있고 엉덩이도 크다! p. 71-72 


 그 세계에서 아버지의 존재 이유는 양육이 아니라 번식에만 한정된 세계다. 양육은 온전히 어머니에게만 떠넘겨진다. 아버지는 칼을 쥐고 위협만 할 뿐, 제대로 쓸 수 없는 존재다. 그나마도 자식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 큰 자식에게 칼을 쥐여주면서도 끝까지 자기 칼은 내려놓지 않는 세계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동정하거나 나무라고,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성질을 낸 뒤 전화를 끊었다.  

“내가 니 새끼냐?” p. 58 


 그리고 그 짐승의 세계는 이제 몰락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 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사람들 중 더 작은 나라 사람들이 쓰는 그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벵골 호랑이에게는 벵골 호랑이의 말이,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말이 필요하듯. 나이 들어 문득 쳐다보게 되는 어머니의 말.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관광지처럼 곧 사라질 것 같다 예감한다. p. 9 


 화자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을 수가 없다. 평생 밥을 만들다 어미가 죽은 마당에 밥이 넘어가면 이상한 일이다.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가 어머니에게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한국에 밥하러 오셨어요?” 한국의 어머니들은 밥하러 이 땅에 온 것 같다) 


 밥을 거부하는 화자에게 남편을 비롯한 친척들은 먹기를 강요한다. 임신 3개월인 화자를 어미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화자는 짐승이 되기를 끝끝내 거부하고 어머니의 부엌으로 간다. 


 자신을 키워낸, 수많은 것들을 죽여 온 그 작업대에서 칼을 집어 든 화자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칼을 쓰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단지 사과하나를 깎아먹었을 뿐이지만 그것은 엄청난 도약이고, 여자에게 짐승이 되기를 강요하던 시대와의 작별을 의미한다.  


사과 조각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축축한 혀를 굴려 그 맛을 음미했다. 씹고 빨고 굴리다 나도 모르게 꿀꺽. 그런 뒤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아, 맛있다!” p. 79-80 


 하지만 저자는 어머니가 속한 짐승의 시대를 거부하면서도,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에 버려두고 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의 짐승성은 시대에 의한 강요였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접살림에 쓸 칼을 품에 안고 집으로 오는 어머니의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고 표현한 것이 못내 신경이 쓰인다. 마치 그것이 어머니의 꿈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어서다. 


그날, 마분지에 둘둘 말은 칼을 품고 산동네를 오르던 어머니의 가슴은, 흡사 연애편지를 안고 달리는 처녀처럼 마구 두근거렸더랬다. 그 후로 어머니는 손안의 반지의 반짝임이 아닌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았다. p. 27 


 칼 장수가 군인의 철모에 칼을 내리찍으며 칼을 파는 장면은 그 칼이 처음부터 지닌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칼을 ‘연애편지처럼’ 안고 달렸다는 것이 너무 지나친 상상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짐승이 된 이후의 시절을 연결하는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가 빠진 느낌이다. 단편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마땅히 납득될 어머니의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어머니 자신도 그랬지만, 작가는 도덕적으로 아무도 탓하지 않고 관조한다. 바람을 피우는 어른들, 도박하는 어머니, 무책임한 아버지. 짐승의 세계가 끝났다는 말에 그 세계를 향한 비난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연민의 시선과 묘한 향수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言〕이다” 


 그래도 익숙한 주제를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킨다는 면에서 훌륭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면이 ‘소설의 첫 만남’이라는 시리즈로도 손색없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방심하고 있을 때마다 신선한 표현과 생소하고 예쁜 단어가 튀어나와 시선을 붙들어 놓고 특유의 리듬감을 이룬다. 읽는 재미 하나는 확실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누구든 이 단편으로 김애란을 처음 만났다면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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