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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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신화 이야기를 차용한 이야기 방식이 재밌다. (극 중에서는 프랑스어 발음 ‘외리디스’와 ‘오르페’로 나온다)

  

외리디스는 물의 님페이고 오르페의 아내이다. 오르페는 음유시인이자 리라의 명수라고 하는데, 어찌나 연주 솜씨가 좋았던지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죽은 아내 외리디스를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기까지 한다. 죽은 아내를 데려가기를 허락한 저승의 신들은 한 가지 조건을 단다. 외리디스가 오르페의 뒤를 따라서 이승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르페는 다 나가기 전까지 절대로 아내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는 이승을 코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고 만다. 외리디스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슬픔에 못 이겨 오르페도 죽고 만다.

  

앨리스 먼로는 이 아름다운 정절과 사랑의 이야기를 가져와 냉혹한 남녀 관계를 묘사한다. 브라이언의 아내 폴린은 외리디스를 다룬 연극의 외리디스 역으로 참여하고, 연출가인 제프리와 바람이 난다. 폴린은 외리디스다. 그녀의 결혼생활을 둘러싼 여건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두 아이의 육아, 자신을 공격하는 시아버지와 해맑기만 한 시어머니, 그런 부모님의 문제를 농담으로 때워 넘기려는 남편.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생활이 최악인 것은 아니다. 남편은 착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단지 그녀는 연극 참여를 계기로 자기 삶이 얼마나 답답한지를 깨달았을 뿐이다.

  

그녀는 텅 빈 거리를 걷는 이 짧은 시간을 즐겼다―자신이 도시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소중한 꿈의 눈부신 빛 속에서 살아가는 초연하고 고독한 누군가가. 브라이언은 집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연못에서 보트를 태워주려고 아이들을 댈러스 로드로 데려갔을지도 몰랐다―그 약속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삶은 여기 연습실에서 진행되는 일―몇 시간씩 연습하고 집중하고 비수 같은 말을 교환하고 땀을 흘리고 긴장하는 일―과 비교했을 때 초라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p. 23

  

그렇다면 오르페는 누구일까. 폴린과 바람이 난 제프리인가, 남편인 브라이언인가. 작가는 단언한다. 두 사람 모두 오르페라고. 

  

작가가 말하는 오르페는 신화 속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오르페는 절대로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저승까지 찾아오는 영웅이 아니다. 제프리는 사랑인지 정욕인지 모를 충동 때문에 폴린의 가족 휴양지까지 쫓아온다. 폴린은 따분한 가정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만, 그렇다고 제프리가 그 구원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브라이언은 어떤가. 그는 착한 남자이지만 폴린을 가정이란 숨 막히는 저승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그리고 한 번 죽은 폴린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오르페다. 가족을 떠나겠다는 폴린에게 ‘자식들은 안 보내’라는 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게 그다. 절대로 다시 한 번 그녀를 붙잡기 위해,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뻔히 죽을 걸 알고, 죽이기 위해 본 것이다. 그것은 복수였고, 결함 있는 아내의 존재를 세상에서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잘못은 오르페에게 있다고, 폴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외리디스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죽여 없애려고 고의로 외리디스를 쳐다본 것이다. 오르페 때문에 외리디스는 또다시 죽어야 한다.

  

작가가 말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그들은 절대로 여자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희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동등한 입장으로 여자 옆에 있어주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여자를 이용하고 그것으로 둘의 관계는 족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기적이다. 브라이언은 폴린 자체보다는 폴린과 자기 부모님의 관계가 중요했다. 아내에게 독박 육아와 대리 효도를 떠넘기고 혼자서 농담이나 해대는 작자다.

  

그에게는 아내와 그의 부모와 자식들이 이렇게 결속되는 것이, 그의 부모와 함께하는 그의 인생에 폴린이 참여하는 것이, 그의 부모가 폴린을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제프리는 전형적인 바람둥이 예술가 타입이다. 연출가라는 알량한 권력 위에 서서, 그럴듯한 뜬구름 잡는 얘기로 마음을 사로잡고, 예술의 일부인 양 여자의 몸을 탐닉한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계의 정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주류 예술계에 대항하는 반항아. 그게 그가 심취한 역할이다.

  

폴린은 그 희곡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제프리에게 말했었다.

그가 말했다. “정말로요?” 그녀의 말은 그를 기쁘게 하지도, 놀라게 하지도 않았다―그는 그 말을 뻔하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로 여기는 듯했다. 그라면 절대 희곡에 대해 그런 표현은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희곡을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처럼 말했다. 또한 여러 적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처럼 표현했다.

  

그럼 외리디스는 잘못이 없는 걸까? 아니다.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외리디스의 잘못과 그 여파에 대해 조목조목 묘사한다. 그녀는 분명히 도덕적으로 당당하지 않다. 그런데 작가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불륜을 저질렀건, 눈이 맞아 도망쳤건, 그녀 자신이 그것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책임져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불륜은, 안온한 가정을 박차고 나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녀 스스로 해낸 일이다. 그게 전부이고, 그녀 스스로도 그 이상으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전부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방에서 살지, 어떤 옷을 입을지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해 그런 것들에 기대지는 않을 것이었다. 자기 스스로에게 알려준다는 명목으로도 안 될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 한 행동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그게 전부가 될 테니까.

  

폴린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돌파구를 스스로 찾은 외리디스다. 그리고 돌파구로 향하는 그녀를 다시 죽인 브라이언이 있고, 돌파구라고 생각한 제프리도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 사람하고 한동안 같이 살았지.’ p. 63)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여자에게 남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주 온건한 어투지만, 작가는 단호하다. 가정에 갇히지 말라. 남자는 여자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다. 결혼이나 남자를 해결책으로 생각하지 마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져라, 여자들아. 사회적으로 이미 죽어있는 여자들을 확인사살(말 그대로 ‘죽인다’)하는 이 세상에서, 오르페우스 같은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은 그런 단호한 메시지다.

  

폴린이 말한다. “오르페가 아니었어.”

“오르페가 아니었다고요? 아빠는 그렇게 말했었는데요. ‘그때 너희 엄마는 오르페와 달아났어.’”

“그랬다면 아빠가 농담한 거야.” 폴린이 말한다.

“나는 그 사람이 늘 오르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이었단 말이네요.”

“그 연극과 관련된 다른 사람이었어. 그 사람하고 한동안 같이 살았지.”

“오르페가 아니고요.”

“아니야. 절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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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춤추고 싶다 - 좋은 리듬을 만드는 춤의 과학
장동선.줄리아 크리스텐슨 지음, 염정용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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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의하면 춤은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깝다. 

(제목처럼 뇌에 한정된 춤의 효과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 정신과 몸에 관련된 거의 모든 질환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춤을 추면 근육운동·자기 인식·기억력·자유와 창의력·정서·사회적 공동체가 단련된다. 춤을 추면 우리의 심장 순환계·면역 체계가 강화되며, 노령에 이르기까지 좋은 자세와 유연성을 유지하게 된다. 춤을 출 때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높아지고, 힘들지 않게 몸무게를 줄여 주며, 엉덩이를 탄탄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춤은 곧장 우리 뇌에 작용해 뇌세포들 사이의 연결을 향상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쉽게 배우고, 정신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어떤 운동이 이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춤은 만병통치약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그토록 춤을 추지 않는 것일까? p. 350-351

 

읽다 보면 춤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언어이자  

건강 관리법이자 본능임을 실감하게 된다. 

왜 당장 책을 집어던지고 춤추지 않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더불어 자신의 연인, 부모, 자녀에게 적극적으로 춤추기를 권하게 될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좋은 효과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제시되는데, 

가끔씩은 반드시 춤에 대한 연구 결과가 아닌 것도 있지만 

(간접적으로는 춤과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 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춤의 위력이 대단한 것은 분명하다 

 

단지 이 책만의 새로운 이론 같은 건 없고,  

춤과 관련된 기존의 연구결과들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다 보니 단조롭다. 

물론 지식 전달 차원의 대중교양서적으로서는 장점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진짜 목적은 도리어 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 있는 것 같다. 

춤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덮여있기 마련이다. 

부정적 생각과 더불어 사회적인 시각 때문에 춤은 일상생활과 거리가 멀다. 

춤을 사랑하는 두 저자는 계속해서 춤에 대한 옹호를 늘어놓고 있다. 

 

‘왜 춤을 추지 않아? 이래도 안 출 거야? 이래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끝까지 춤을 추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그 사람은 바보가 분명하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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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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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용 자체가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이 정도 내용이라면 우리나라에도 많지 않나?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점이  

‘일본 아마존 에세이 부문 1위’에 오르게 만든 걸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책을 끝까지 읽어냈고, 

나는 ‘공감·위로 에세이’의 어떤 새로운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봤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독자의 편을 드는 위로나 

독자의 마음을 계산하는 공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독자는 그렇게까지 엎드려 절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상술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됐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기본에 충실하는 게 먼저다. 

우선은 작가가 솔직하게 자기 생각과 얘기를 풀어놓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나 위로를 불러일으키려 노력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단지 솔직하고 무심한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면 독자는 알아서 위로를 받고 공감을 얻는다. 

(마치 SNS나 유튜브에서 ‘진정성’을 중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적당히 속이는 건 모두가 알아챈다.)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말로만 남을 구할 수 있으니까. p. 197-198

 

이 책의 작가도 위로나 공감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글을 써 내려간다.  

글에는 솔직함이 묻어나고, 내보일만한 일관된 가치관이 보인다. 

그리고 그 글들은 듬성듬성 흩뿌려져 있다.  

문장들이 파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핵심적인 지점이다. 

모든 독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런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기 글을 늘어놓는 것뿐이다. 

독자는 그 파편화된 글을 읽어내려 가다가  

마음에 안 드는 문장은 무시하면 되는 거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다면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것은 좀 더 능동적인 ‘위로와 공감 얻기’라고 볼 수 있겠다. 

진정성 있는 문장들은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어디서부터 펼쳐 봐도 상관이 없다. 

정독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각자 꽂히는 문장이나 문단을 주섬주섬 주워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파편화가 계속되다 보면 일관성이 깨지는 일도 일어난다. 

책의 초반부에는 이런 남자는 이렇다, 이런 여자는 이렇다 하면서 

이성의 유형을 단정 짓는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수준을 저하시키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쌍팔년도’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 

그런데 후반부에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당신 앞으로 아무하고도 사귀지 마. 그 사람한테 실례야. 남의 가치관이나 뜬소문에 의존해서 연애하는 사람을 어느 누가 만나겠어? 그러면 당사자가 너무 불쌍하잖아.” p. 302

 

“(…)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죽어서라도 지켜야지. 남들한테 휘둘리면 안 돼. 

혼자서 연애해. 그리고 혼자서 실연해.” p. 303

 

책의 모순된 태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골라잡으면 그만이니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글을 늘어놓다 보니, 

어찌 보면 같은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이 표현이 마음에 안 든다면, 이 표현은 어때?’ 하고  

친절하게 인용하기 좋은 형태로,  

간직하기 좋은 형태로 계속해서 제안하는 느낌이다.  

같은 챕터 안에서도, 큰 주제 안에서도, 책 전체를 통해서도 

같은 말은 계속해서 다른 문장으로 변주된다. 

‘이 중에 하나라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겠지!’ 

그리고 읽다 보면 분명히 마음에 드는 문장이 하나쯤은 있다. 

 

책 전체의 일관된 주제나 기승전결이나  

점진적인 서술 따위는 상관이 없다. 

내가 꽂힌 문장이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그저 그 문장에 감탄하면서 몇 번이고 되뇌며 마음에 새기게 된다. 

‘미래형’ 공감·위로 에세이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작가는 모든 글을 핸드폰으로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글은 SNS에서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고도 한다. 

이 책의 특징인 ‘파편성’, ‘다양한 변주로 다시 제시하기’ 같은 것들이 

작가의 글을 SNS에 적합하게 만들어준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SNS처럼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서치>같은 영화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책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춰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식의 글쓰기나 책들은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인기를 얻을지 모르겠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독자의 자유도를 제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꽉 짜인 구성에, 

저자의 가르치려는 태도가 도드라지는 에세이라면, 

적어도 젊은이들이 열광하거나  

SNS에서 인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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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랑 - 김충선과 히데요시
이주호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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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해 전쟁의 흐름을 바꾼 일본군, 항왜(降倭).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김충선(일본명 사야가).

만약 그가 원래 조선인이었다면?

그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목을 끌다가 

이순신에 의해 조선인으로 귀화했다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밌는 상상들이 빼곡히 끼어들고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임진왜란의 정황은 확실히 새로웠고, 

특히 조총(일본 말로 ‘뎃포’)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들은 눈을 사로잡았다.

  

히로는 뎃포를 들어 가장 좋은 명중률이 나오는 화약량(약 2.5g)을 포장해 둔 종이를 풀고 흑색 화약을 흘려 넣었다. 총구 구경은 탄환 구경보다 조금 컸다. 이 구경과 탄환 구경을 결정하는 것은 옛날 고쿠와리라고 이야기하던 매우 중요한 사격 요소 중 하나였다. 탄환이 구경에 비해서 너무 작으면 위력과 명중률이 낮아지고 너무 딱 맞으면 두세 발 쏜 뒤 더 이상 탄환이 들어가지 않게 된다. 

화약량은 그 사격음에서 적정량을 알 수 있었다. 적으면 ‘수둥’하며 박력 없는 음이 나며 과하면 ‘펑’하며 폭발음에 가까워진다. 화약을 적정량 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p. 188

  

그리고 아주 악랄하게 그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캐릭터도 빼놓을 수 없다.

초중반까지 그는 강력한 악역을 맡아서 긴장감을 끌어낸다.

  

하지만 중반 이후로는 이야기가 급격하게 무너진다.

먼저 주인공 히로(훗날 김충선이 되는)의 동기 자체가 

상당히 수동적인 것부터가 문제다.

아무리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인물이라고는 해도,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주변 사정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주인공은 매력이 없다.

그 능동성으로 이야기가 동력을 얻는 것이기에 이야기도 힘이 잃는다.

히로는 항상 누군가를 볼모로 잡히거나, 협박에 못 이겨 움직인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히데요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p. 227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인공 히로가 조선에 투항하는 과정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혼란스러운 정체성 속에 있던 주인공이

조선을 선택하는 이유가 느닷없이 ‘혈통’이나 ‘민족’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도 아주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핏줄이 땡겨서’인 것이다.

그전까지의 수동성은 모두 핏줄이 안 땡겨서였던 건가? 

아니, 근데 그 시대에 민족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긴 했을까.

  

일본군인지도 모르고 이 노인은 기꺼운 마음으로 차를 내왔다. 조선의 병복을 입고 있는 자신은 노인을 속이고 있었고 노인의 성의나 마음도 기만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한없이 끌리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이 피에 흐르고 있는 것인가. p. 261


히로가 원래 조선인이었다는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 설정이 나중에 히로가 조선으로 귀화를 결심하는 

이유가 되는 게 문제다.


그는 전쟁 중에 죽어나가는 조선인들을 보며 계속해서 괴로워한다.

아기 때 일본으로 건너 간 후 한 번도 조선에 와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일본 제일의 용병 출신의 히로가 ‘무고한 희생자’ 운운하면서 

조선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것은 일본 백성의 목숨과 

조선 백성의 목숨을 다른 무게로 대하고 있다는 말밖에 안 된다.

조선 백성은 좋은 백성이고, 일본 백성은 나쁜 백성인가.

  

이순신이 사야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조선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네. 정말 좋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남은 생은 정말 좋은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게 어떤가?” p. 367

  

게다가 작가는 초반에 히로의 정체성 변화를 암시하며 

공들여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뒷부분에 가서는 편협한 민족주의로 이야기를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어느 곳이든 네가 살고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리면 

되는 거야. 그곳이 고국이고 고향이 되는 거지.” p. 115

  

“이제 결정권은 너에게 넘어갔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네가 직접 결정해야 해. 

너 이외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결정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p. 130

  

국적마저 선택할 수 있다는 진보적 사상을 깔아놓고

종국에 선택하는 건 핏줄이나 민족이라는 낡은 개념이다.

  

작가는 아마도 다수 독자들의 통속적인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쪽으로 상업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 같다.

때문에 작품 속 이순신의 모습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상당히 평면적이고

익히 알려진 성인(聖人)의 모습에 머문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사랑 말고는 다른 욕망은 모두 제거된 듯한 느낌.

또 다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비를 의식해서 인지, 

전쟁을 맞이한 선조는 과도하게 옳은 말을 늘어놓는다. 

  

“모두 그대들의 당쟁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야. 황윤길과 김성일이 서로 당이 다르니 의견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황윤길의 의견을 김성일이 따르게 되면 배알이 꼬였나? 수가 뒤틀렸어? 아니야, 아니지. 전쟁을 준비하게 되면 그대들이 가진 권력이 흔들리게 되니 그게 불안했겠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혹여나 놓치게 될까 봐! 혹여 자신의 입에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흘릴까 봐!” p. 247

  

이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왜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도망이나 쳤던 것일까.

  

작가가 초반에 보여줬던 가능성은 

이런 편협한 애국 주의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것이었다.

히로가 오히려 국가관이나 민족관에 자유로웠다면 어땠을까.

그런 그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더 넓어진 인류애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히로의 모습에서 

오늘날 난민들의 모습이 겹쳐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꼼꼼한 자료 조사로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던 소설은 

오히려 민족주의라는 기묘한 판타지로 완성되었다.

아쉬운 작품이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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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들의 비밀 - 세상을 바꾸는 0.1% 혁신가들의 특별한 성공 법칙 8가지
멜리사 실링 지음, 이주만 옮김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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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재나 혁신가들의 괴짜 같은 성향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외부적 요인까지 분석한다. 

 

‘나는 혹시 괴짜 천재, 창의력 대장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다. 

하지만 천재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신이 평범한 둔재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럼 이 책은 소수의 괴짜들을 위한 책일까? 

 

이 책의 진정한 활용성은 둔재인 나의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 

더 나아가서는 나의 자녀, 혹은 나의 부하 직원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있다.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까지 나아간다. 

 

책의 대부분은 에디슨이나 스티브 잡스 같은 괴짜들의 

재밌는 일화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서는 둔재들을 위한 팁을 정리해준다. 

소수의 괴짜들에게서 힌트를 얻어 

다수의 범인들이 배울 점을 알려 주는 게 이 책의 강점이다. 

 

괴짜 천재들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그리고 그들이 이룬 업적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서도 

인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류에게 소중한 공공재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책’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는 지점이다. 

 

일론 머스크, 토머스 에디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니콜라 테슬라, 벤저민 프랭클린은 (적어도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지식 자원과 기술 자원을 책을 통해 얻었다. 열렬한 독서가들답게 이들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아인슈타인 주변에는 또한 도움을 주는 몇몇 동료가 있었으며 머스크와 에디슨 역시 똑똑한 인재로 구성된 팀이 혁신 활동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훗날 깨닫게 되지만 어릴 때부터 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p. 342

 

상당수의 혁신은 전문분야 종사자가 아닌 문외한들에게서 나왔다.  

우리는 대다수가 서로의 분야에 문외한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 분야의 혁신을 불러올 잠재력을 가졌다. 

 

때문에 공공 도서관이나 공적으로 공개된 논문은 중요하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 

어린 일론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 에디슨과 마리 퀴리들이 

더 많은 도서관에서 더 많은 책을 읽으며 

혁신을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시간이나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ㅠㅠ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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