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랑 - 김충선과 히데요시
이주호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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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해 전쟁의 흐름을 바꾼 일본군, 항왜(降倭).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김충선(일본명 사야가).

만약 그가 원래 조선인이었다면?

그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목을 끌다가 

이순신에 의해 조선인으로 귀화했다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밌는 상상들이 빼곡히 끼어들고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임진왜란의 정황은 확실히 새로웠고, 

특히 조총(일본 말로 ‘뎃포’)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들은 눈을 사로잡았다.

  

히로는 뎃포를 들어 가장 좋은 명중률이 나오는 화약량(약 2.5g)을 포장해 둔 종이를 풀고 흑색 화약을 흘려 넣었다. 총구 구경은 탄환 구경보다 조금 컸다. 이 구경과 탄환 구경을 결정하는 것은 옛날 고쿠와리라고 이야기하던 매우 중요한 사격 요소 중 하나였다. 탄환이 구경에 비해서 너무 작으면 위력과 명중률이 낮아지고 너무 딱 맞으면 두세 발 쏜 뒤 더 이상 탄환이 들어가지 않게 된다. 

화약량은 그 사격음에서 적정량을 알 수 있었다. 적으면 ‘수둥’하며 박력 없는 음이 나며 과하면 ‘펑’하며 폭발음에 가까워진다. 화약을 적정량 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p. 188

  

그리고 아주 악랄하게 그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캐릭터도 빼놓을 수 없다.

초중반까지 그는 강력한 악역을 맡아서 긴장감을 끌어낸다.

  

하지만 중반 이후로는 이야기가 급격하게 무너진다.

먼저 주인공 히로(훗날 김충선이 되는)의 동기 자체가 

상당히 수동적인 것부터가 문제다.

아무리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인물이라고는 해도,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주변 사정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주인공은 매력이 없다.

그 능동성으로 이야기가 동력을 얻는 것이기에 이야기도 힘이 잃는다.

히로는 항상 누군가를 볼모로 잡히거나, 협박에 못 이겨 움직인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히데요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p. 227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인공 히로가 조선에 투항하는 과정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혼란스러운 정체성 속에 있던 주인공이

조선을 선택하는 이유가 느닷없이 ‘혈통’이나 ‘민족’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도 아주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핏줄이 땡겨서’인 것이다.

그전까지의 수동성은 모두 핏줄이 안 땡겨서였던 건가? 

아니, 근데 그 시대에 민족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긴 했을까.

  

일본군인지도 모르고 이 노인은 기꺼운 마음으로 차를 내왔다. 조선의 병복을 입고 있는 자신은 노인을 속이고 있었고 노인의 성의나 마음도 기만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한없이 끌리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이 피에 흐르고 있는 것인가. p. 261


히로가 원래 조선인이었다는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 설정이 나중에 히로가 조선으로 귀화를 결심하는 

이유가 되는 게 문제다.


그는 전쟁 중에 죽어나가는 조선인들을 보며 계속해서 괴로워한다.

아기 때 일본으로 건너 간 후 한 번도 조선에 와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일본 제일의 용병 출신의 히로가 ‘무고한 희생자’ 운운하면서 

조선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것은 일본 백성의 목숨과 

조선 백성의 목숨을 다른 무게로 대하고 있다는 말밖에 안 된다.

조선 백성은 좋은 백성이고, 일본 백성은 나쁜 백성인가.

  

이순신이 사야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조선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네. 정말 좋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남은 생은 정말 좋은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게 어떤가?” p. 367

  

게다가 작가는 초반에 히로의 정체성 변화를 암시하며 

공들여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뒷부분에 가서는 편협한 민족주의로 이야기를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어느 곳이든 네가 살고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리면 

되는 거야. 그곳이 고국이고 고향이 되는 거지.” p. 115

  

“이제 결정권은 너에게 넘어갔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네가 직접 결정해야 해. 

너 이외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결정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p. 130

  

국적마저 선택할 수 있다는 진보적 사상을 깔아놓고

종국에 선택하는 건 핏줄이나 민족이라는 낡은 개념이다.

  

작가는 아마도 다수 독자들의 통속적인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쪽으로 상업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 같다.

때문에 작품 속 이순신의 모습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상당히 평면적이고

익히 알려진 성인(聖人)의 모습에 머문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사랑 말고는 다른 욕망은 모두 제거된 듯한 느낌.

또 다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비를 의식해서 인지, 

전쟁을 맞이한 선조는 과도하게 옳은 말을 늘어놓는다. 

  

“모두 그대들의 당쟁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야. 황윤길과 김성일이 서로 당이 다르니 의견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황윤길의 의견을 김성일이 따르게 되면 배알이 꼬였나? 수가 뒤틀렸어? 아니야, 아니지. 전쟁을 준비하게 되면 그대들이 가진 권력이 흔들리게 되니 그게 불안했겠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혹여나 놓치게 될까 봐! 혹여 자신의 입에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흘릴까 봐!” p. 247

  

이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왜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도망이나 쳤던 것일까.

  

작가가 초반에 보여줬던 가능성은 

이런 편협한 애국 주의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것이었다.

히로가 오히려 국가관이나 민족관에 자유로웠다면 어땠을까.

그런 그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더 넓어진 인류애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히로의 모습에서 

오늘날 난민들의 모습이 겹쳐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꼼꼼한 자료 조사로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던 소설은 

오히려 민족주의라는 기묘한 판타지로 완성되었다.

아쉬운 작품이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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