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국의 시간 - 당신은 지금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나요?
조한혜정 지음 / 사이행성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도 느꼈던 점인데,

진보적 이야기를 논하면서 과거의 한순간을 이상향으로 그리는 면이 있다.



먼저 <어디서 살 것인가>를 보면,

보행자 중심의 건축을 말하면서

갑자기 70~80년대 골목길 풍경을 가져온다.

저자가 회상하는 그 당시의 골목길은 이상적이기만 하다.

때문에 과거로의 회기만이 골목길 살리기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처럼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강북 골목길은 사람이 정주하는 공간이었다. 동네 주민의 거실이라고 할 만큼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콩나물 다듬고 할머니들이 담소 나누는 장소였고,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공간이었다. 골목길은 무엇보다도 ‘자연이 있는 외부 공간’이다. 하늘이 보이고, 1년 365일 24시간 달라지는 자연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p. 132


골목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정주하는 공간이 되었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가 지금 그리워 하는 것은 사람을 만날 수 있던 사람 냄새 나는 골목길 같은 공간이다. p. 133-134


아이들을 ‘천재 건축가’로 치켜세우면서 ‘새로운 공간 발견’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저자가 예로 드는 건 산업화 시대 버려진 공간에서 뛰노는 위험천만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도시를 좋게 만들려면 추억이 만들어질 만한 장소가 많아야 한다. 그런 장소를 만드는 데 가장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이 어린아이들이다. 어릴 적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숨겨진 공간과 버려진 땅을 찾아서 재미난 놀이터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 60



<선망국의 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대안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산업화 시대의 ‘이상화된' 동네에 가깝다.

물론 개인주의의 시대를 지나 ‘부족’의 시대가 다가온다고는 하지만,

과연 새로운 세대가 그런 ‘살 부대끼는’ 공동체를 원할까.

공동체는 항상 과거의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 걸까?


그냥 동네에 한군데 솥 걸어놓고, 누구든지 와서 밥을 먹을 수 있게 하자고 저는 계속 주장해왔어요. 그냥 밥값만 주고, 동네에서 국 잘 끓이는 사람, 반찬 잘 하는 사람 모여서 매일 밥을 해서 먹으면 거기서 공동체가 생겨나는 거거든요. p. 107


이들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과거의 경험에 묶여 있는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 같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간적 이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단지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그들과 잘 통하리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심지어 과거에도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나를 도울 수 있는 거리에 산다고 해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이웃사촌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선망국의 시간>도 그걸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런 프로그램을 동네마다 한다? 그건 또 아니고요. 어디서는 해봤는데, 사람들이 밥 먹으러 안 오기도 해요. 근대적 인간이 까다롭거든요. ‘내가 갈 가지인가?’하고 따지는 거죠. 차라리 돈 내는 거면 당당하게 가서 먹을 텐데, 약간 불편하게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밥 먹고, 이런 거 잘 못해요. 사실 그런 건 옛날 달동네 살던 친구들이 잘했어요. 그 친구들이 사회성도 머리도 좋고 훌륭했는데, 학원만 다니면서 자란 친구들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죠. p. 107


내가 더 대안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에 등장하는 관계들이다.


약물의존증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이들과 그들의 도우미들에게 전하는 ‘다양한 거리에 자신의 응원단을 만든다’는 메시지이다. 핵심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강력한 응원단을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다. 중요한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의지하고 싶은’ 상대인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그리 가깝지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p. 184


하루에 씨 말대로 ‘다양한 거리에 응원단’을 만들려면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다양한 상황에서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단점이나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대상, 다시 말해 안전 기지’는 굳이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만들어줄 수 있다. 당사자가 ‘이 사람이라면 의지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응원단을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가능하면 많이 만들어두는 편이 좋다. p. 187



앞의 두 책 모두 온라인이 발달한 현재 상황을 감안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굳이 거리에 얽매이는 건 불필요한 전제 같다.


한 남성 유튜버가 여성 유튜버를 죽이러 가겠다고 나섰던 사건이 떠오른다.

굳이 죽이러 그 먼 길을 감수하고 갈 정도의 시대라면,

사람 살리러 가는 정도의 거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과거에는 좋은 면도 있었지만, 그 과거를 그대로 가져온다고 해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그때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식인들이 자기 경험에 갇히지 말고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두 책 모두 좋은 책이었지만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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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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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이 질문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상대라는 ‘신세계’의 낯선 부분을 즐기고 싶은 동시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공통점(익숙함)을 기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상대의 가장 사적인 부분을 묻는 동시에,


그 외의 다른 어떤 사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


정중한 질문이 아닐까.



상대의 사생활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는 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독서 중독자들 앞에 붙은 ‘익명의’라는 단서가 참 좋다.


만화 속 중독자들은 서로의 독서 스타일에 대해 신랄하게 조롱할망정,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다. 굳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끝까지 서로의 실제 정체를 까발리려고 하지 않고, 알고도 묻어버린다.


(심지어 독서 모임 멤버 중에 ‘예티’가 있는데도!)


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뭔가를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만으로 재미있고, 편안해지는 것 같다.



나도 내 사생활을 전시할 생각은 잘 못한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타임 라인에 올라오는 인친님들의 책 사진이 좋다.


이 사람은 이런 책을 읽고 있구나, 그 정도가 관심이 가는 전부다.



그리고 그 정도 거리가 참 좋은 것 같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내가 읽은 책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았을 때,


누군가 나에 대한 낯섦과 익숙함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히 자신을 보여줬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회 부적응자’로 표현되기도 하는 독서 중독자들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중독돼 버린 것을.


앞으로도 익명으로, 중독자로서,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슬쩍슬쩍 내가 읽는 책을 내보이고, 다른 사람이 뭘 읽는지 훔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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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츠드렁크 - 행복 지수 1위 핀란드 사람들이 행복한 진짜 이유
미스카 란타넨 지음, 김경영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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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츠드렁크란 무엇인가.


팬츠드렁크의 어원인 핀란드어 ‘칼사리캔니’는 속옷을 뜻하는 ‘칼사리kalsari’와 취한 상태를 뜻하는 ‘캔니känni’의 합성어이다. 이 함축적인 단어에 팬츠드렁크의 본질이 담겨 있다. 쉽게 말해, 팬츠드렁크는 어디도 나가지 않고 오직 집에서 속옷 차림으로 술을 마시는 행위를 의미한다. p. 31


간단히 말해서, 집에서 편한 속옷 차림으로 (보통 혼자서) 술 마시면서 쉬는 거다. 

한국의 혼술 문화나, 미국의 ‘넷플릭스 앤 칠’과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된다.


따지고 보면 도시생활을 하는 세계 어디에나 흔한 개념이다.

이것은 마치 ‘정(情) 문화’가 한국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핀란드의 자랑스러운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편적이어서 조금 민망하다는 말이다.



책에서는 ‘팬츠드렁크’만의 특성을 부여하려고 계속해서 시도하고는 있지만 끝까지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개념으로만 남는다. 


처음에는 달콤하게 들리기도 한다. 사회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당신 맘대로 해도 되는 자유’를 선사하는 것 같다. 현대인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주는 최고의 방법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지만,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 하나쯤 가지지 않은 직장인이 있던가.

게다가 집에서 팬티만 입고 술 먹는 거라니! 

그것보다 창의적인 방식이 수도 없이 많을 것 같은데!


이것만 가지고 한 국가와 북유럽 지방의 철학이니 라이프 스타일이니 논하는 건 무리라고 본다. 그나마 자유로워 보이던 첫 이미지는 계속해서 강조하는 ‘절제하라’는 말 때문에 증발된다. 막판에 가서는 일부 사람들에게 팬츠드렁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강조한다. 


질문: 매일 팬츠드렁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괜찮을까요?


답변: 괜찮지 않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 스트레스를 날리고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는 건강한 욕구라기보다는 고질적인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증거입니다. 한낮에 술을 마시고 싶다면 분명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겠죠. 당연히 모든 사람이 가끔씩 위기를 겪기도 하고 자기만의 고유한 성격이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팬츠드렁크가 일상이 되고 만족감을 주지도 않는다면 자기 발전을 위한 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되 너무 관대해지지도 마세요. 위험한 상태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면, 외부의 도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p. 186


정리해 보면, 팬츠드렁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술을 잘 절제할 수 있으며, 가끔씩만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애초에 팬츠드렁크가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저녁에 집에 와서 술 먹고 텔레비전 보는 건 비만과 운동부족, 알코올 중독의 위험을 키운다.


이것은 도리어 핀란드라는 나라가 얼마나 환경이 열악한지(얼마나 춥고 어두우면 할 게 집안에서 혼자 술 먹는 것 밖에 없단 말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것밖에 안 된다. 

환경적인 열악함만이 문제가 아니다. 사상적, 문화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더 문제다.


팬츠드렁크는 틀림없이 이 우울하고 어두침침하고 눈비 날리는 계절에 생겨났으리라. 집을 나서는 일이 태산 같은 장애물을 넘기는 것 같은 때 말이다. 핀란드에서는 그런 날이 1년 중 9개월 보름 정도라는 놀라운 사실. p. 34


길고 춥고 어두운 겨울과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집들을 보면 핀란드에서 팬츠드렁크가 생겨나고 유행한 연유를 알 것 같다. 그거라도 없으면 견딜 수가 없으니까. p. 36


핀란드 정부는 팬츠드렁크를 장려한다. 핀란드에 헤비메탈, 휴대폰, 사우나만 있는 건 아니다. 소파에서 뒹굴며 술을 마실 자유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p. 157



그나마 핀란드 전통주도 아니고, 그냥 ‘맥주’라니! 

누구나 어디서나 즐길 수 있어서 보편적이고 평등하다는 말로 포장하려 하지만 그냥 밋밋한 느낌만 남는다.


심지어 팬츠드렁크라는 단어 자체는 생겨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칼사리캔니, 즉 팬츠드렁크라는 단어는 2000년대까지 우리 학회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말이었어요. 하지만 그 용어가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된 까닭에 2014년에 우리 온라인 사전에 실렸죠.” 에로넨의 설명이다. 

칼사리캔니라는 용어는 1990년대에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몇 차례 인쇄물에 등장했고, 2000년대 초반에 온라인에서부터 점차 사용 빈도가 높아졌다. p. 58


핀란드 내에서도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 세대마다 그 단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요. 우리 학회에서도 젊은 직원들은 팬츠드렁크를 중성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반면 더 나이가 있는 직원들은 서글프고 외로운 삶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 p. 61


이 모호한 개념에 핀란드라는 국가의 이미지를 입히는 것보다 더 나쁜 문제는 ‘쿨함’의 이미지를 뒤집어쓰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억지로 ‘쿨하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안 쿨한’ 것도 없다.


일본이 ‘쿨 재팬’을 국가 이미지로 삼은 것을 떠올려보자. 그 단어를 쓰는 순간 쿨함은 사라져버린다. 일본이 롤모델로 삼은 영국의 ‘쿨 브리타니아’는 어떤가. 스파이스 걸스와 텔레토비를 남긴 그 정책 말이다. 그것은 여전히 쿨한가?


쿨함은 정부 주도로 생기지 않는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심지어 주한 핀란드 대사의 ‘추천사’다)

싸이나 방탄소년단이 국가가 주도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강남역에 서 있는 ‘강남스타일 말춤 동상’ 같은 게 정부의 한계다.


결국 이 책은 일련의 ‘북유럽 스타일’ 붐을 타고 나온 또 하나의 팬시상품이다. (책 표지와 본문 중에 삽입된 삽화와 인포그래픽들은 전형적인 ‘북유럽 스타일’을 보여준다) 심지어 북유럽 스타일의 유행이 지난 지도 꽤 됐다.


북유럽 스타일에 대한 로망을 현실적으로 충족시켜 준다는 면에서 일종의 ‘보급판 북유럽 스타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헐렁한 속옷과 맥주는 그다지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그냥 구질구질한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도 북유럽 스타일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북유럽의, 핀란드의, 헬싱키의 판타지에 젖기에는 그나마도 너무 빈곤한 방식이다.



조한혜정의 『선망국의 시간』에 보면 유럽(특히 북유럽)이 대한민국과 얼마나 다른 환경을 구축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세월호 사건을 같이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 많지는 않아도 어떤 ‘코어’가 생긴 것 같아요. 울리히 벡이 20대들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동아시아 청년들의 현실 인식 정도가 가장 첨예하게 높았다고 합니다. 똑똑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처한 현실이 굉장히 모순적이면서 극화된 형태이기 때문 아닐까요? 그에 비해서 미국 청년들은 어차피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고, 또 유럽 청년들은 ‘왜 세상이 이런가?’라는 질문을 잘 안 한다고 해요. ‘컴포트 존Comfort Zone’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안락함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한국 청년들에게서는 ‘세상이 왜 이런가?’하는 질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p. 102-103


북유럽이 좋은 모델이 되고 있지만 사실 북유럽은 1, 2차 대전 이후 세계 패권 따위와 상관없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지역 국가가 되기로 결정했기에 (…) p. 197


우리의 혼술 문화와 팬츠드렁크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우리는 어쩌면 북유럽 스타일로 도피할 때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사회는 전혀 ‘컴포트’ 하지 않은 곳이니까.



이 책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면 오히려 혼자 있을 용기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도 혼자서 멍하게 있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외로우면 누군가를 만나서 그 감정을 해갈하려고 한다.

젊은이들은 모두들 ‘아싸’가 되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인싸’를 꿈꾼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면 이성친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난리들이다.


우리에겐 혼자서도 편안하고, 즐거움을 누릴 용기가 필요하다.

혼자 있다고 해서 우울해하지 않을 자존감이 필요하다.


인간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깊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재충전하기도 한다.

그건 ‘루저’나 ‘아싸’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다.

핀란드 사람들이 외부 환경 때문에 강제로 할 수밖에 없었던 ‘혼자만의 시간’을,

우리는 자발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진짜 문화적, 사상적 빈곤은 혼자서도 제대로 있을 수 없는 사회에서 훨씬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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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언니 2019-02-27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고 책이 아니라 감상평쓰신 분 글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Bookbuff 2019-02-28 09:52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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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p. 132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불평등과 고통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한 인물에 녹여냈다.


문학적인 가치는 좀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문학 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작가는 픽션을 쓰는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픽션이 아님을 끊임없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서적처럼 계속해서 실제 자료가 제시되고, 자료의 출처가 각주로 붙는다. 


마지막에 김지영 씨의 모든 걸 이해한 상담사는 다시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갇힌다. 

작가는 마지막에 그것마저 제시하며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김지영이 겪어내는 코스(?)는 현실보다 좀 더 온건한 경우라는 점이 좀 의아했다. 뉴스나 트위터에서 보는 실제 사례들은 참담함에 차마 끝까지 읽어낼 수 없을 지경이다. 


현실임을 강조하려 했으면서 왜 온건한 사례들을 골라 담았을까.


부모님도 상당히 선량하고 말이 통하는 편이며, 과거에 만났던 남자나 현재의 남편, 상사도 괜찮은 편이다. 그 흔한(?) 성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다.

진짜 끔찍한 이야기들은 김지영이 직접 겪기보다는 그런 사람도 있더라, 하며 전해 듣는 방식으로만 표현된다. 


너무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 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백번 양보해서 다 좋다고 쳐도, 

현실에서 여성들의 삶은 불평등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이었을까.


어쩌면 독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란 이 정도라고 판단한 걸 수도 있다.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능가하기 마련이다.


남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함은 아닐까.

여성의 고통을 말한다고 해서 남자가 ‘절대 악’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끝내 화자가 남자로 귀결되는 것도 그렇고,

편을 갈라서 남자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좀 여자들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의문은, 여자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80~90년대라면, 사실 여자들도 상당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때다. (사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다.)

‘여적여’가 현실처럼 보이기도 했고, 수많은 남자 작가들이 말했듯이 여자들은 특유의 비논리 성과 히스테릭함에 휩싸여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신비로운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고, 

제멋대로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2010년대에 다시 조합한, 

훨씬 오늘날의 여자들을 닮아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래야만 했었다’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한 번도 롤모델로 삼을 만한 페미니스트가 주변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을 것이다. 

가부장을 내면화한 여자들만 등장한다면, 절대로 정확하게 그들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특유의 ‘비논리성’과 ‘히스테릭함’에 휩싸여 있으니까.



어찌 보면 작가가 여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 모든 김지영(곧 세상 모든 여자)을 위해서 작가는 산부인과의 할머니 의사로, 버스에서 만난 낯선 아줌마로, 딸들만은 다르게 살기를 원했던 진취적인 엄마로, 개념 있는 여자 상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를 돕고, 용기의 말을 건넨다.


김지영 씨가 모든 여자를 대변하고 있듯이,

작가 스스로도 모든 여자를 대변하는 또 다른 김지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픽션’의 영역이 커지면 이 소설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되어 버릴 위험에 빠진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픽션이지만, 픽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김지영 씨가 겪는 사례들은 모두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 자극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상담사의 태도를 통해, 

이 소설을 이야기로 소화하고 마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작가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남자에게 상처 주는 것도 피하고, 여자들에게 냉철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런 태도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해는 된다.


이 소설이 남자들을 단죄하고, 여자들의 해방적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한다면, 아마도 이 소설은 신뢰가 가지 않는, 균형이 깨어진, 그저 감정적이기만 한, 복수심에 불타거나 피해 의식에 절어 있는, 여자들의 감정 해소를 위한 소설로 치부될 거라는 걸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왜 온건한 사례 중심인가’ 하는 

앞선 의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심한 일을 겪지 않은 입장의 저자가 

마치 그것을 겪은 것처럼 말하는 것에 죄책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감히 당사자의 마음을 묘사하는 것을 미안해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거리를 두고 말하는 방식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시키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지만,

마치 그 피해 여성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잘난 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주 까다로운 픽션이 된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힘든 작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작가가 픽션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픽션이 지닌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가 주는 위력 때문이다.

그 방식이 이 책을 관통하는 전략이 된다.


같은 여자로서 김지영 돼 보기.

남자로서 여자의 입장에 서 보기.

남자 형제로서 여자 형제의 입장이 돼 보기.

작가로서 여자들의 고통에 감정이입해 보기.


김지영 씨가 종종 완벽하게 다른 여성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토록 온건하고 얌전한(!) 제안에 일부 남성들은 그렇게도 열을 냈다는 건가?

이게 그렇게 위험하고 도발적이고 발칙한 제안인가? 

이렇게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아주 잠깐 동안만 다른 입장에 서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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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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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지나치게 연동된 종교들은 신전이 건축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건축물을 구심점으로 모여야 하는데, 신전 건축에서 멀어질수록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물 없이 문자 같은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둔 유목 민족의 종교는 전파에 유리하고 건축물이 지어진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 그래서 세계적 규모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모두 각각 성경, 코란, 불경 같은 소프트웨어인 책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들이다. p. 195-196


하지만 건축가의 관점에서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한국 기독교가 부흥한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 건축 유형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상가 교회’다. (…) 한국의 ‘상가 교회’는 실리콘밸리의 ‘차고 창업’과 비슷하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몇 년간 전도사 수련 후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적은 보증금으로 상가에서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 실리콘밸리 IT 산업 생태계를 보면 차고 창업처럼 초기 투자비용은 적게 들지만 무한 경쟁 시스템을 통해 살아남은 기업만 공룡 기업으로 성장한다. 이와 동일한 시스템이 한국의 상가 교회 시스템이다. 창업의 문턱은 낮되 무한 경쟁을 통해 실력 있는 목회자가 살아남아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는 시스템이었다. p. 197-199



오늘날 한국 교회에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교회 건물의 대형화가 아니라, 

다시금 성경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집중해야 할 때다.


생각해 보면 중세 시대 기독교의 부패 뒤에도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축이 자리 잡고 있다.


솔로몬이 지은 이스라엘 성전은 지극히 화려했지만, 

이교도적인 면이 있었고, 결국 여러 차례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된다.


성전의 크기와 화려함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상가 교회의 등장이 한국 기독교의 부흥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실리콘 밸리처럼, 살아남기는 힘들지만, 우수한 교회만이 살아남는다.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고, 실패한다면 사라지겠지만 타격이 크지는 않다.


이런 자유로운 이동성이 한국교회가 닮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너무 무거운 교회 건물에 발이 묶여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유목성이 정체성이다. 

언제든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뒤를 쫓을 수 있어야 진정한 제자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길바닥도, 깊은 산속도 교회가 될 수 있다. 

아니, 신자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걸 잊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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