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나는 어렸을 때 몸이 좀 약했다. 어린애인데 뭣 때문인지 항상 머리가 아팠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코피가 났다. 늘 기운이 없었고 체력도 약했다. 학교 체력장 점수는 거의 꼴찌였고, 성적표 '체력발달상황'(이런 비슷한 제목이었지 싶다.)은 가, 나, 다 중 늘 '다'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이런 저질 체력은 그대로였고 거기에 지병 몇 가지가 더 추가됐다. 한의원에 갔더니 맥박이 노인 같다고 했다. 나는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의 에너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베프였던 윤경이는 건강 체질을 타고난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걸어 다녀도 지칠 줄 몰랐고 기운이 넘쳤다. 한참 쌩쌩하고 건강할 청소년기이니 당연했다.
윤경이랑 쇼핑이라도 할라치면, 나는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백화점 한 바퀴를 돌려면 몇 번이나 쉬었다 가야 해서 우리는 몇 번이나 벤치에 앉았다가 다시 걷곤 했다.
한 번 더 쉬었다 가자고 했을 때 윤경이가 "또 쉬어?" 하고 놀라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때 윤경이 표정은 그 후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윤경이의 표정은 진심으로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노인의 몸을 체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노인 전용 용품을 만드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노인의 몸 상태와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 몸에 여러 개의 무거운 추를 달고 인위적으로 목과 허리도 굽게 만든 후 얼마간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다. 실험이 끝나고 그 사람은 놀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결과를 말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노인 몸 체험 실험' 같은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고통이 공유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내가 다리가 아플 때 그 통증의 수치를 입으로 설명하는 게 아닌 타인이 그대로 직접 느낀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그럼 윤경이처럼 튼튼한 애들도 내 다리가 얼마나 아픈지 이해할 텐데.. 절대 엄살이 심해서 쉬는 게 아니라는걸. 내 몸의 고통을 타인이 수치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들. 마치 노인의 신체적 고통을 젊은이가 체험하듯이..
정보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 고통에 대한 상상들.. 그리고 잊었던 윤경이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의 미래 어느 때이다.
부작용도 없는 완벽한 '진통제'가 개발되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어느 미래.
이성과의 결혼만큼 동성과의 결혼도 일상적인 일이 된 어느 미래. 체세포로 정자나 난자를 만들어서 임신하는 것도 일상인 어느 미래.
완벽한 진통제가 존재하는 세상. 얼마나 행복할까. 부작용도 없으니 매달 독한 진통제를 먹으면서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너무 부럽고 나도 살고 싶은 미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진통제가 개발되기까지의 과정에는 끔찍한 희생이 존재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자, 인간은 다시 고통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고통을 인위적으로 없앨 수 있게 되니, 오히려 그 고통을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교단'이 그런 단체였다.
'교단'은 고통의 숭고함을 말한 '데카르트'와 '도스토옙스키'의 주장을 근거로 교리를 만들었다.
-고통이 없는 삶은 자신의 영혼을 자각하지 못함.
-고통을 겪지 않는 인간은 신의 구원을 갈구하지 않음.
-고통이 없는 상태는 죄악보다 더 무서운 타락.
결론적으로 통증의 신체적 감각뿐 아니라 고통에 수반되는 두려움, 절망, 모멸감, 자괴감, 분노 등의 정서적 반응, 이것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고통은 곧 영혼이자, 인간의 정수이기에 고통을 거부하는 것은 곧 신과 구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간주한 그들은 인위적으로 없는 고통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한 '교단'의 중심인물인 '태'의 테러로 인해 완벽한 진통제를 개발한 제약회사의 오너 부부가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교단의 눈에는 진통제를 만들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고통을 없애는 그들이야말로 악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륜'과 '순' 형사, 피해자인 제약회사 부부의 딸 '경', 제약회사의 운영을 맡고 있는 '현', 범죄자 '태', 그리고 정신과 의사. 이들이 함께 제약회사의 본사가 있던 곳으로 사건 조사차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비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강렬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즉각적인 유대감을 맺기는 불가능했다. 고통과 고통의 탐색은 오히려 경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본문 중에서.)
제약회사 부부의 딸인 '경'은 이야기의 초반부터 등장한다. 경은 테러를 일으켜 자신의 부모를 죽게 한 '태'에게 어떤 행위를 하는데, 이 행위를 하는 의미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의 끝부분에 '경'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바로 위의 문장이다. (스포가 되는 부분은 생략)
설명 부분을 읽고 그제야 나는 '경'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물론 '몸'이 아닌 '머리'로 이해가 갔다. 아마 작가가 나를 붙잡고 경의 행위의 이유를 밤새워 설명해 준다 해도 나는 끝끝내 경의 행동의 100 프로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 이기에.
나에게 10인 고통도 건강한 윤경이에게는 3 정도로 느껴진다. '태'와 '경' 모두 어린 시절 끔찍한 경험을 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은 것은 같다. 그러나 태를 '탐색'했던 경은 태에게서 유대감을 느끼지 못했다. '경의 고통은 경 자신만의 것'이니까.
나와 윤경이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뿐한 몸 상태를 가져본 적 없는 나는 늘 쌩쌩한 윤경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윤경이는 노인의 몸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맥박이 노인 같은 나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아플까. 많이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몸으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그 고통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경, 현, 태, 효, 한, 륜, 순, 홍, 욱, 민, 안, 엽... 12명의 등장인물들 중에 나는 몇 명의 삶을,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느꼈을까.
극단적이고 비일상적인 경험을 한 경, 태, 등에 비하면 비교적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산다고 느낀 인물에게조차 감히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철학적인 소재에 빠져들어 스토리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끝에 다다랐을 땐 급작스럽게 뒤통수를 맞으며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저주 토끼'의 괴이한 단편들을 쓴 작가의 책이라는 걸 잊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리뷰 글을 쓸 때까지 이 책의 분류가 SF 소설로 돼있는지 모르고 읽었다.
진중한 주제, 그리고 다소 기묘한 이야기, 미래 소재 등이 마음에 든다면 추천해 주고 싶다. 진지한 주제와 가볍지 않은 스토리에 마음이 무겁다가 살짝 반전을 준 결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를 마칠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서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