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집 정리를 하면서 책과 음반 등을 꽤 추려냈다. 이상하게도(?!) 책보다 음반을 덜 버렸다. 독서보다 음악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니라 책보다 음반을 덜 샀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음반은 더 신중하게 샀다는 뜻일까.


'아무튼, 레코드'(성진환)로부터 옮긴다. 음악하는 저자는 음반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재즈 시디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독일의 재즈 레이블 ‘ECM’이 생각난다. 바이닐과 카세트도 꽤 가지고 있지만 그 레이블의 시디들이 나는 참 좋다. 모두 비슷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부클릿과 알판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ECM 음반들은 항상 첫 시작 5초 동안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어떤 음악이든 듣기 전에 자세를 잡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설립자이자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의 철학 때문인데, 시디를 재생할 때 그 무음 구간이 특히 설렌다. 정확히 시디가 핑 돌기 시작한 후 숫자가 다섯 번 바뀌는 걸 볼 수 있으니까.

최근에 갑자기 노르웨이 피아니스트 케틸 비에른스타(Ketil Bjørnstad)의 90년대 ECM 발매작 «The Sea»와 «The Sea II» 시디가 매장에 입고됐다. 그의 피아노와 데이비드 달링(David Darling)의 첼로가 함께하는 음악은 못 참지. ‘사장님 나이스’를 외치며 내가 샀다(한두 장씩 들여오는 걸 자꾸만 제가 사서 죄송합니다). 이 시디들을 틀고 5초가 지나면 우리 매장은 서울 마포구 동교동이 아니라 장엄한 북유럽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 Interlude 최근에 잘 산 시디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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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에서 한국 여자 최홍은 일본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집을 열심히 청소하다가 콩깍지가 벗겨지고 자기성찰을 한 후 관계가 어긋난다.

(c .1870-c.1900) - Rijksmuseum By Unknown author - Japanese girls cleaning in a room. Look and Learn (lookandlearn.com)., CC0, 위키미디어커먼즈


https://blog.aladin.co.kr/790598133/16588292 일본 남자의 입장에서 츠지 히토나리가 쓴 권에서 준고는 청소하는 홍이를 구원자로 여긴다.




그는 늘 늦었다. 그의 방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숨겨진 동굴을 탐험하는 주근깨투성이 소녀라도 된 것처럼 그의 집 창틀에 끼인 먼지를 닦고 싱크대에 들러붙어 있는 얼룩들을 지웠다. 어떤 날은 그렇게 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았는데 벌써 날이 저물어 있기도 했다.

그즈음 청소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욕실 여기저기는 어수선하고 더러웠다. 옷을 벗으려고 하는데 거울 속으로 머리카락이 땀에 잔뜩 엉겨 붙은 여자가 보였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번쩍이는 번개처럼 무엇인가가 나를 쳤다. 나는 말없이 티셔츠를 벗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인가가 다시 한번 나를 내리쳤다. 내 몸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 강렬한 감정이었다. 다 벗지 못한 티셔츠를 팔에 낀 채로 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묻고 있었다.

‘최홍, 너,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니?’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암전되어 버린 것처럼 아찔해졌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거역할 수 없는 물음이 들려왔다.

‘윤동주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던 너는,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아니야, 아빠. 나 독립운동 하려고 그 사람하고 헤어진 거 아니야. 아빠가 혹은 엄마가 결혼하라고 내 등을 밀었더라도 우린 끝났을 거야……. 아빠, 사랑은 어쨌든 끝나는 거잖아. 헤어져도 끝나고 결혼해도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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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9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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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9 2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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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9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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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수록작 '흰 꽃'(1996)은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의 씨앗이라 할 수 있겠다.

제주(2020년6월) 사진: Unsplashjoongil Lee


cf. 창작과 비평 2024 겨울호 '노벨문학상 수상 특별기획_한강의 문학세계' 중 '백지연 / 삶의 본모습을 찾는 ‘목소리’의 여정: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 『노랑무늬영원』 읽기'에 단편 '흰 꽃'이 거론된다.


문학동네 '작별하지 않는다 코멘터리북'에 '코멘터리「흰 꽃」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로'가 실려 있다.





일 미터 사십 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하얗게 센 눈썹의 숱이 많고 눈이 부리부리하던 그녀는 "사삼 때 그 사람 총살 맞아 죽고 사 형제를 나 혼자서……"를 시작으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자신의 생애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남자처럼 느껴지는 강인하고 무뚝뚝한 얼굴에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눈물로 세수함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탄식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 이 벽이 사삼 때 사람들이 줄줄이 서서 총 맞던 데……" "저 팽나무 밑이 사람들 모아놓았던 데……""하나도 안 변했지, 다 변했다고들 해도…… 오십 년이 지났어도 안 변할 것은 정말로 안 변하는 거야……" - 흰 꽃

소설은 북제주군의 소읍에서 두 달을 지내고 난 뒤 돌아오던 화자가 완도행 페리보트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거듭 애도되어야 할, 그러나 끝내 애도를 그칠 수 없을 죽음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어떤 예의 바른 애도도 그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처절하게 겪어내야 할 당사자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임을 헤아리듯이, 소설은 죽음을 만들어낸 어떤 사건에 가까이 가 파헤쳐 들어가는 대신, 거듭 무명천을 싸듯 하얀 이미지들을 덮어간다. - 해설 | 빛을 향해 가는 식물의 춤_강지희

흰 꽃 <하이텔 문학관> 1996년 여름 - 수록 작품 발표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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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 | 공유 마당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9001238&menuNo=200150 이효석의 단편소설 '일요일'은 1942년 1월 발표작이다.이효석은 그해 5월 35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메밀꽃 필 무렵 : 이효석 단편전집 1'로부터 옮긴다.


Portrait of a young lady with a veil, 1907 - Jan Sluyters - WikiArt.org


일요일 - 이효석 l KBS WORLD Korean https://world.kbs.co.kr/service/contents_view.htm?lang=k&menu_cate=culture&id=&board_seq=437873&page=3&board_code=radiobook





준보는 사실 아내와 함께 자기도 세상을 버렸으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랑 없는 생활은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고 고독은 엄청나게 정신을 메말리는 것이었다. 고독은 사람을 귀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지로 만들었다. 쓸쓸하고 초라한 거지의 신세로 살아서는 무슨 일을 칠 수 있을꾸 생각되었다. 잠들 때에나 잠을 깰 때 눈물이 자꾸만 줄줄 흘러서 베개를 적시는 것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자기 혼자만이 아는 노릇이었다. 목청을 놓아서 울래도 넉넉히 울 수 있는 노릇이었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울 때에나 커피 냄새를 맡을 때 문득 아내의 생각이 나면서 목이 막혀 느끼곤 한다. 다시 두 번 결코 해도 달도 볼 수 없는 아내의 처지를 생각할 때, 지구가 여전히 돌고 세상일이 여전히 진행되어나가는 것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측하고 교만하고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가는 날 오는 날 아내가 부활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막막한 고독만이, 허무한 행운만이 남을 뿐이었다.

- 일요일

1940년 부인 이경원이 복막염으로 사망. 뒤이어 차남 영주도 잃음.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방랑함.

1942년 5월 25일 뇌막염으로 사망. 부친에 의해 평창군 진부면에 부인 이경원과 나란히 안장됨. -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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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winter - John Atkinson Grimshaw - WikiArt.org


Janis Ian https://janisian.com/ 재니스 이안은 1951년 생 미국 싱어송라이터로서 'In The Winter'는 1975년 발표곡이다. In The Winter / Janis Ian https://www.genie.co.kr/detail/songInfo?xgnm=44234838




‹In the winter›는 평범에 가까운 어느 겨울날의 풍경과 그 속에 스며든 옛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겨울이 오면 노래 속의 그녀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여분의 담요를 준비하고 낡은 히터를 고치고 TV를 본다. 평온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그녀가 여전히 떠나간 당신을 잊지 못하는 바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명백한 겨울노래다. 이별은 역시 추운 겨울이 제격이다.

겨울에 히터를 고치는 것과 여름에 선풍기를 고치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다른 이야기다. - In the winter _Janis Ian (계절을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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