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에서 한국 여자 최홍은 일본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집을 열심히 청소하다가 콩깍지가 벗겨지고 자기성찰을 한 후 관계가 어긋난다.

(c .1870-c.1900) - Rijksmuseum By Unknown author - Japanese girls cleaning in a room. Look and Learn (lookandlearn.com)., CC0, 위키미디어커먼즈
https://blog.aladin.co.kr/790598133/16588292 일본 남자의 입장에서 츠지 히토나리가 쓴 권에서 준고는 청소하는 홍이를 구원자로 여긴다.



그는 늘 늦었다. 그의 방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숨겨진 동굴을 탐험하는 주근깨투성이 소녀라도 된 것처럼 그의 집 창틀에 끼인 먼지를 닦고 싱크대에 들러붙어 있는 얼룩들을 지웠다. 어떤 날은 그렇게 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았는데 벌써 날이 저물어 있기도 했다.
그즈음 청소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욕실 여기저기는 어수선하고 더러웠다. 옷을 벗으려고 하는데 거울 속으로 머리카락이 땀에 잔뜩 엉겨 붙은 여자가 보였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번쩍이는 번개처럼 무엇인가가 나를 쳤다. 나는 말없이 티셔츠를 벗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인가가 다시 한번 나를 내리쳤다. 내 몸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 강렬한 감정이었다. 다 벗지 못한 티셔츠를 팔에 낀 채로 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묻고 있었다.
‘최홍, 너,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니?’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암전되어 버린 것처럼 아찔해졌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거역할 수 없는 물음이 들려왔다.
‘윤동주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던 너는,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아니야, 아빠. 나 독립운동 하려고 그 사람하고 헤어진 거 아니야. 아빠가 혹은 엄마가 결혼하라고 내 등을 밀었더라도 우린 끝났을 거야……. 아빠, 사랑은 어쨌든 끝나는 거잖아. 헤어져도 끝나고 결혼해도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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