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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소진의 부인이었던 함정임 작가가 고인의 마지막 나날들을 기록한 글 '동행'이 책 '서정시대'에 실려 있다. 단편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수록된 김소진전집 4권 '신풍근배커리 약사'에 실린 문학평론가 손정수 교수의 해설 '소진의 미학'은 손정수 평론집 '뒤돌아보지 않는 오르페우스'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로부터 일부 옮긴다.



변두리 콤플렉스란 애초에 부여된 밑그림대로 삶을 살 수 없었던, 그 연필 자국 위에 끊임없이 짙은 색으로 덧칠을 하여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 덧칠에도 불구하고 더욱 선명하게 연필 자국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자기 삶의 어두운 밑그림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운명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글쓰기 의식의 유력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P136

그런데 지금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기억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셈일 테고 나아가 아직 다른 차원으로 정립되지 못한 ‘나‘의 존재의 한 축을 허무는 것에 해당된다. ‘나‘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눈사람 속에 들어 있던 깨진 검은 항아리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장석조네 사람들도 아닌 단지 그 사건. 그것은 곧 기억의 글쓰기의 막다른 골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기억의 글쓰기의 최종 지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P141

삶의 종말을 통해 기억조차도 잊겠다고 말하는 이 순간 그는 기억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비로소 벗어나기에 이른다. 바로 이 지점에 모든 것을 쏟아내고 동시에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던 현실조차도 일시에 초월하여 투명하게 빛나는 ‘소진의 미학‘이 놓여 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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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클래식판 '위대한 개츠비' 해설에서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던 미국 문학 연구자 토니 태너(Tony Tanner)는 1922년의 단편 '겨울 꿈'과 1925년의 장편 '위대한 개츠비'의 관계를 설명한다.

F. Scott Fitzgerald (1922 caricature) By William Gropper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피츠제럴드 1924 By Newspaper staff photographer - Blogspot (Originally published in The Brooklyn Daily Eagle and The Vancouver Sun in Spring 1924),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피츠제럴드가 1922년에 쓴 단편소설 「겨울 꿈」에 나오는 덱스터 그린은, 미네소타 주의 식료품점 주인의 아들로 ‘무의식적으로 겨울 꿈에 이끌려서’ 사는 민첩하고 예민한 중서부의 청년이다. 겨울은 특징적으로 볼 때 ‘암울’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꿈은 ‘화려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의 겨울 꿈이 애초부터 부자들에 대한 생각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해서 소년에게 속물근성이 있다는 인상을 갖지 말라. 그는 화려한 것들, 화려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화려한 것,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종종 자신이 왜 그걸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는 최고의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덱스터 그린은 미성숙한 개츠비이다. 그리고 ‘화려한 것들, 화려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것 그 자체’라고 화자가 주장한 부분에서는 상당히 독특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화려한 것, 혹은 화려한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울림을 넘어서 소유하려는 시도가 ‘부정과 금기’와 맞닥뜨리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이것이 후에 발표될 『위대한 개츠비』에 자주 등장할 암묵적인 질문들이다.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난 수많은 야심찬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덱스터는 ‘농부’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옷장을 조립하듯이 자기 자신을 세심하게 조립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그는 돈을 벌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한없이 취약하고 위태로운 결과였다.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가진 것은 줄어드는 법이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경솔하고 변덕스럽고 엉뚱하며 멍청하고 천박한 부유한 여자 주디 존스에게 매혹되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된다(이용되고 버려진다). 그녀는 (개츠비의 미소처럼) ‘환하게 빛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인위적이며 설득력 있는’ 미소로 스스로를 알리고 드러내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도 아마 덱스터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을 꾸미거나 속이는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속임수에 맞장구치고 그것에 놀아나는 것도 하나의 속임수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개츠비와 데이지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디가 다시 덱스터를 버리기 전, 그를 다시 유혹했을 때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가짜였는지는 덱스터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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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을 다시 읽는다. 지금 같은 한겨울에 조제는 무엇을 할까? 츠네오가 곁에 있건 없건 간에, 조제는 스웨터를 입고 방에 앉아 여전히 책을 읽고 있겠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조제는 ‘나‘라고 할 때, 아이처럼 콧소리를 낸다. 아버지가 재혼한 여자가 데리고 온 애가 세 살 적에 그런 식으로 발음을 했다. 조제는 그 코맹맹이 같은 발음 때문에 아버지와 여자가 그 아이를 귀여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열네 살이던 조제도 그때부터 ‘나‘라고 말할 때 콧소리를 섞어 말하기 시작했다.

츠네오는 그냥 즐거웠지만, 조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저에 있으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마냥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조제는 공포와는 다른 어떤 도취에 빠져, 끝도 없이 그 안을 뱅뱅 돌았다.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죽을 때까지 그 안을 돌아다닐 것 같았다.

물고기 같은 츠네오와 조제의 모습에, 조제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츠네오가 언제 조제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 그런 생각을 할 때, 조제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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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해경의 일러스트책 '겨울 꿈'으로부터


All the Sad Young Men - Wikipedia 피츠제럴드의 단편 '겨울 꿈'은 1922년에 발표되었고, 1926년에 나온 피츠제럴드의 단편집 'All the Sad Young Men'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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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노스미’인 조향사라니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55938.html


아들 김태형의 에세이를 포함하여 고 김소진 작가 특집이 실린 악스트 19호도 가져온다.


성북 문인 김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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