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소진의 부인이었던 함정임 작가가 고인의 마지막 나날들을 기록한 글 '동행'이 책 '서정시대'에 실려 있다. 단편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수록된 김소진전집 4권 '신풍근배커리 약사'에 실린 문학평론가 손정수 교수의 해설 '소진의 미학'은 손정수 평론집 '뒤돌아보지 않는 오르페우스'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로부터 일부 옮긴다.
변두리 콤플렉스란 애초에 부여된 밑그림대로 삶을 살 수 없었던, 그 연필 자국 위에 끊임없이 짙은 색으로 덧칠을 하여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 덧칠에도 불구하고 더욱 선명하게 연필 자국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자기 삶의 어두운 밑그림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운명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글쓰기 의식의 유력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P136
그런데 지금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기억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셈일 테고 나아가 아직 다른 차원으로 정립되지 못한 ‘나‘의 존재의 한 축을 허무는 것에 해당된다. ‘나‘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눈사람 속에 들어 있던 깨진 검은 항아리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장석조네 사람들도 아닌 단지 그 사건. 그것은 곧 기억의 글쓰기의 막다른 골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기억의 글쓰기의 최종 지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P141
삶의 종말을 통해 기억조차도 잊겠다고 말하는 이 순간 그는 기억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비로소 벗어나기에 이른다. 바로 이 지점에 모든 것을 쏟아내고 동시에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던 현실조차도 일시에 초월하여 투명하게 빛나는 ‘소진의 미학‘이 놓여 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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