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2020'과 최윤 소설집 '동행'에 실려 있는 단편 '손수건'은 묘한 작품이다.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틀이 과연 적합한가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내적 사연인 이 커플의 고생담은 켈러의 연작소설 '젤트빌라 사람들' 중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토지분쟁을 둘러싼 이웃들의 이야기.


[네이버 지식백과] 맹지 [盲地] (부동산용어사전, 2020. 09. 10., 장희순, 김성진)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11818&cid=42094&categoryId=42094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삽화(1919) by Ernst Würtenberger (1868-1934) - "Schweizerland" (퍼블릭도메인, 위키미디어커먼즈)


켈러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1k2670a

N도 나도 인생에 다가오는 모든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열한 살 때 같은 동네, 같은 반 친구로 만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30년째다.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니 그 기간을 더 길게 잡아도 되겠다. 그 길다면 긴 시간 중 많은 부분은 유년과 청소년기의 무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우리가 겪은 것은 삶에 깊은 고랑을 판 고난의 행군과 같은 것이었다. 16세 때 서로 은반지 나눠 끼고 결혼 약속을 했지만 38세, 거의 중년에 나이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결혼을 했다. 그전까지의 기나긴 시간이 우리 존재의 모든 모서리를 다 후렸다. 우리는 어느새 웬만한 문제는 그저 바보처럼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결혼 전에 준비할 시간이 아주 많았다. 우리가 나름의 약혼식을 선포한 뒤, 처음에는 미성년이었기에 나중에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이유로, 두 집안은 우리의 결혼에 반대했다.

우리가 결혼식을 올린 것은 겨우 3년 전이다. 다 늙어 결혼했으니 그사이 남는 게 시간이었다. 결혼을 목숨 걸고 반대하던 나의 모친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비극적인 연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의 모친만큼은 아니어도 갖가지 전략을 동원해 우리의 결혼을 반대한 N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라는 적이 사라지자 기세도 꺾였거니와, 노환이 오면서 전의를 상실했다. 마침내 우리의 결혼이 가능하게 됐다.

모든 것이 고향 산 밑 마을에 일찍이 불어 닥친 전원주택 바람으로 땅값이 오른 탓이다. 두 집 소유의 맹지에 길 내는 것을 놓고 오랜 이웃사촌인 N의 집과 우리 집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식구처럼 한마을에서 오손도손 지내던 두 집안은 이 맹지 문제로 ‘급살 할 놈의 집’,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놈의 집’, ‘망하지 않으면 손끝에 장을 지질 집’이 되었다. 다행히 이 모든 저주는 이 집에도 저 집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문제의 맹지는 아직까지도 집이 지어지지 않은 유일한 공터로 남아 있다. 전원주택 마을 한복판의 잡초 밭. 우리가 열여섯 살이 되어 각기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전 겨울, 바로 눈 덮인 그 맹지 한구석의 작은 바위에 앉아서 결혼을 약속했다. 그때는두 집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그런 약속에 걸맞은 두 집안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내 맘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N이 말했다. "오랜만에 맹지 보러 가자." 나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차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말하자면 우리 사이에 사소한 갈등이 있을 때 다시 마음을 합하기 위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저기 봐라. 우리가 같이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데, 서로 지난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웬만한 일은 가볍게 떨치고 넘어가자, 고 찾아가는 장소. -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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