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정혜경 지음)에서 '세계최종전쟁론'에 관한 부분을 찾아 읽었다. 




관동군 사령부 - 퍼블릭 도메인,키미디어 커먼즈  * 만주사변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7m1423a


이시와라 간지가 목요회에서 제안한 ‘세계최종전쟁론’은 개인 의견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이 양대 강국이 되고 다른 모든 나라도 가세해서 항공기로 단숨에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세계 최후의 전쟁이다. … 일본 본토에게 한 푼도 돈을 쓰게 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 대러시아 작전은 몇 개 사단이면 충분하다. 전 중국을 근거지로 하면서 중국을 잘 이용한다면 20년, 30년이라도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

이시와라 간지는 지구전을 펼칠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십 년간 전쟁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그러나 일본 육군 수뇌부는 ‘세계최종전쟁론’에 물을 주며 싹을 키웠다.

이시와라 간지는 1929년부터 착실한 준비에 들어갔다. 2년 후인 1931년 9월 18일, 일본 육군 관동군 참모 자격으로 만주 침략에 나섰다.

일본은 러일전쟁 후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관둥저우 방비와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중동철도의 남쪽 지선인 남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관동군이었다. 이시와라 간지는 모략을 사용해 전쟁을 일으켰다. 관동군이 일본 측 철도의 선로 일부를 스스로 폭파하고 중국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방법이었다.

만주를 차지한 일본 군부는 공격의 대상을 중국 본토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시와라 간지는 중일전쟁으로 확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1937년 당시 국력으로 전선의 확대는 잃을 것이 많았다. 만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이 쳐들어오는 날에는 만주마저 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 침략 당시 이시와라 간지가 걸었던 길은 후배들을 자극했다. 후배들은 상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으킨 행동으로 인해 출세한 선배가 부러웠다.

이시와라 간지가 우려한 상황이 곧 현실로 되었다. 1938년 10월, 한커우漢口와 우창武昌, 한양漢陽 등 우한武漢 3진을 점령하고, 1939년 2월 중국 남부 하이난섬海南島을 차지한 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의 승전보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중국을 관통한 후 동남아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던 세계최종전쟁의 발걸음은 일단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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