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네버 렛 미 고' 예고편


계간 미스터리 여름호 중 '신화인류학자가 말하는 이야기의 힘'(공원국)이란 제목의 글 중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에 대한 대목을 일부 발췌했다. 영화화된 소설이다. 내 경우 책은 읽지 않았고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와서 영화는 보았다. 

이제는 폐교되었지만 영국 어느 곳에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가 있었다. 학생들은 여느 학교 학생들과 외모나 행동이 전혀 다르지 않으며 남들과 똑같이 이런저런 교과목을 배운다. 게다가 그들은 미술을 즐기고 작품을 만들도록 고무되며 자란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정상적인normal’ 인간, 어떤 ‘근원자possible‘*에게서 나온 복제물clone이다. 실상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들에게 장기臟器를 제공할 목적으로 키워지는 장기 공급용 배양물이다.

*유명 블로거 로쟈가 지적했듯이 ‘근원자’라는 번역어는 어감이 지나치게 거창하지만(https://blog.aladin.co.kr/m/mramor/9745584?Partner=) 대체 어휘도 보이지 않으므로 그대로 쓴다.

이쯤 되면 이시구로가 말하는 정의正義는 무엇일까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이런 추악한 현실에 저항하지 않는 이를 영혼이 있는 존재라 부를 수 있을까?

자식을 낳을 수 없도록 선천적으로 불임으로 설계된 복제인간들은 정신적인 덕목마저 선천적으로 거세된 것일까? 이시구로가 말하는 정의란 진실 앞에 멈춰서 체념하며 바라만 보는 것일까?

그러나 독자들은 이 순간 역설적인 감동을 경험한다. 복제인간들의 나약함, 그 참을 수 없는 나약함 때문에 그들 옆에 서고 싶어진다. 우리가 그들 옆에 서지 않으면 그들은 무너질 것이다. 이시구로는 역사와 인류의 존재 이유를 영웅이 아닌 이 무기력한 인간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독자로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좋아, 사랑하는 그들이 그런 추악한 운명의 강에 빠져 있다면 내가 나설 거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운명이 무엇이든, 수천 개의 머리를 단 그 괴물의 심장을 찾아내 뽑아버릴 거야.’

그렇게 나약한 작가는 무엇인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 공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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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사의학과 자기서술 / 나를 보내지 마
    from 에그몬트 서곡 2023-08-22 18:03 
    '서사의학이란 무엇인가' 1장 '자기 서술: 문학을 통한 관계성의 탐구' 중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에 나타나는 동일시와 거부'로부터 일부 발췌했다. * 이 글은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원용한다. The Pier, 영화 '네버 렛 미 고' OST The Pier (from "Never Let Me Go", Arr. for Piano & Ce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