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옮긴 글의 출처는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에 수록된, 박완서의 딸 호원숙이 쓴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 박완서 연대기’(1992).
[박완서가 회고한 고 박경리 선생의 추억] (2008) https://www.joongang.co.kr/article/3154703#home
1980년 여름 전예원에서 소설집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을 출간했고 (중략) 그 작품집에 박경리 선생님이 발문을 써 주신 인연으로 여태껏 친분이 계속되고 있다. 박경리 선생님은 발문에서 어머니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와 함께 있는 작가 박완서 - 跋文에 대신하여
작가 박완서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예상이 설 자리 없이 뒤집히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지면을 통해 본 그의 글이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여성, 옥색 치마 흰 저고리를 입은 아주 작고 안존스런 주부(主婦)였다. 그런데 미숙하다 할까 그런 가냘픈 線이 신기하게도 그에게 남아 있었다.
상대방의 천착하는 눈빛과 지나치게 의식하는 몸짓에 질려버리는 것이 대개의 경우 첫 대면에서 겪어야하는 곤욕인데, 해서 엷은 외로움과 모멸의 감정도 동반하게 되는데 박완서 씨는 천연스러웠다. 나는 내심 당황했다. 나를 과대평가하는 상대, 그런 부담감 때문에 감정이 들쑥날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주부(主婦)의 영역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은 예비지식 속에 있었던 것이지만 신기하게도 남아 있는 미숙한 것 같은 가냘픈 선이 의문이었다. 그 가냘픈 선은 요새(要塞) 같은 주부의 자리에도 뚜렷이 연결이 되지 않았고 날카롭게 가차없이 몰고가는 비정(非情)의 작가에게도 뚜렷이 연결되지 않았다.
새털같이 가벼워 보이는 몸매, 가늘은 손목, 섬세한 손가락의 이 여인이 억세고 황막(荒漠)하고 감미(甘味)라곤 없는, 애증(愛憎)에는 미련한 투우같이 덤비는 경지를 통과한 뒤 조용하게 연민을 감추고 냉소를 머금은 것 같은 그 작가일까?
그러나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나는 박완서씨의 가냘픈 모습에서 분명(分明)했던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수화기만 들면 박선생 우리 저녁이나 함께 합시다, 할 수 있을 것을, 수없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의 초청으로 두 번 만난 이외 아직 우리는 만나지 못하였고 전화통화조차 한번 못했다는 것은 게으름에서 비롯된 습벽은 아니다.
나를 아껴주는 분들, 내가 존경하는 분들에게 늘 이런 망각(忘却)의 형식으로 덮어두는 것은 절실한 만큼 행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라는 것을 박완서 씨는 알고 있는 사람이다.
1980년 7월 4일 아침
-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호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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