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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엄마 ㅣ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9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 / 202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읽어보는 일본 작가의 소설이다.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을 띄엄띄엄 읽었다. 겨울방학인 아들의 집사가 되어서 챙기려니 은근히 부화가 치밀기도 한다. 코로나로 더더욱 긴 집사 노릇이다. 엄마도 내가 사는 근처에 이사 온지 1년이 넘었고, 늘 챙겨야 하는 존재이다. 본인은 스스로 하신다고 무척 우기시더니 심하게 앓아 입원 후에는 챙김을 받는 것에 좀 더 익숙해 지시는 것 같다. 나 또한 도와 줄 것과 알아서 하실 것을 구분 지었다.
제목하고는 참. <엄마의 엄마> 눈물 짜내는 뭐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스토리는 아니길 바라며 조금씩 읽다가 어느 순간 흡입력을 느끼게 한 책이다.
생각보다 맑고, 담백한 소설이다. 중년이 되고는 복잡한 서사구조 보다는 깔끔한 문체와 스토리가 좋다. 뒷끝이 경쾌하면 더욱 좋다. 삶에도 군더더기가 많은 중년이 허구 속에서도 속 시끄럽고 싶지 않은 심리가 깔렸다고 할까? ㅋ
<엄마의 엄마>는 갓 중학생이 되는 '다나카'를 중심인물로 주변인물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된다. 엄마(마치코) 할머니(다쓰요)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나카의 집 주인 '겐토', 중학교 친구 '사치코', 초등학교 선생님 '기도선생님' 초등학교 남사친 '미카미'의 사연을 담고 있다.
#태양은 외톨이
풋풋한 사과향이 느껴졌다. 스토리는 슬프고, 상처의 흔적이 곳곳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청순하다. 상처를 받아 들이는 '다나카'라는 14살의 넘치는 자존감이 산뜻하게 다가왔다. 공사 현장에서 육체노동자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사는 다나카는 미혼모 가정에서 산다. 생활력이 강한 엄마는 다나카가 보기에 구두쇠라고 느낄만큼 아끼는 억척맘이다. 다행이 다나카는 자신의 환경을 비관하기 보다는 엄마만큼 잘 적응하고 있다.
어느 날,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집에 낯선 할머니가 방문한다. 상상 속에서 인자하고, 예의바른 조부모를 생각한 다나카는 반전의 외할머니를 만나면서 엄마와 외할머니의 비밀 사연을 듣게 된다. 미혼모로 딸을 키웠던 할머니는 다나카의 엄마를 키우다 버렸고, 아동 학대까지 범했던 사람이다.
엄마는 계속 엄마의 엄마 빚을 갚기위해서 그렇게 억척같이 돈을 벌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빚을 다 갚게 된 날, 할머니는 몇 일 간 다나카네 집에서 보내다 떠돌이 생활로 떠나게 된다. 떠나는 할머니와 다나카가 나누는 대화는 '엄마'라는 존재를 규정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엄마'에게도 입장이 있고, 상황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교육 받고 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 '엄마'가 되었고, '엄마'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출발한다. 인간의 성장환경이란 그만큼 존재의 출발점이고, 첫 배움의 시작이다. 할머니 다쓰요는 엄마이기 전에 모성애가 결핍된 상태로 살아온 한 인간이다. 엄마가 되어 다나카의 엄마를 자신의 입장으로 모성애를 보여준 건 아닐까?
"그럼 엄마 이름은요? 마치코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어요?"
"이름? 아아, 내가. 그 애가 태어났을 때는 벅차게 기뻤으니까, 나한테는 말 그대로 천금 같은 아이라고 생각해서지었어." 나한테는 과분한 아이니까.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야."
"그러면, 그러면 왜?" "아마 나한테 인간으로서 중요한 뭔가가 크게 결여됐기 때문이겠지."
143쪽
엄마(마치코)와 할머니(다쓰요)의 모녀관계 속에는 두 개의 플롯이 함께하고 있다. 주인집 아들 겐토와 야스타케 관계, 사치코의 사연은 가족이지만 사적 심리를 나누기에는 폐쇄적인 가정의 암묵적인 폭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부모의 권위와 맞서지 못하는 자녀들의 심리를 저자는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천재적이고, 소심한 겐토는 야스타케와 중등 3년 간 절친 사이다. 서로 교환일기를 나누며 남들에게는 말 할 수 없는 비밀이야기까지 나누게 된다. 어느 날, 야스타케 부모님이 비밀일기를 다 읽게되면서 겐토는 문제아로 낙인이 찍히는 학생이 되버린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해는 오해를 불러 결국 두 친구는 결별하게 되고, 겐토는 자퇴 후 정신병원까지 다니게 된다. 결혼을 앞 둔 야스타케가 어느 날, 겐토를 찾아오면서 다나카는 겐토의 사연을 알게 된다.
눈에 띄게 고풍스러운 양옥집에 사는 사치코는 중학교 입학 후 만난 다나카의 동급 친구이다. 재혼한 엄마를 딸로 살아가는 사치코는 고풍스런 양옥집을 떠날 궁리를 늘 하고 산다. 나이차이 많이 나는 동생만 대놓고 이뻐하는 조부모님과 늘 주변환경만 신경쓰는 엄마, 무의미한 아빠. 중학교를 졸업하면 자신이 번 돈으로 당당하게 이 집을 떠나겠다는 계획을 늘 사치코에게 털어놓는다. 초대 받아 처음 사치코 집을 다녀온 다나카는 독백한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며, 여기가 내가 머물 곳이라 새삼스레 생각했다. 여태 그런 의식조차 없이 살았다. 자기 집인데 내가 편히 머물 곳이 없다니. 그렇게 큰 집인데, 비좁은 셋집이라도 여기에는 분명히 내가 머물 곳이 있다. 지저분한 이층 방이지만 겐토에게도 머물 곳이 있다. 거기 말곤 없지만, 사치코는 자기 자신을 가족에게 필요 없는 조각이라고 여길 만큼 괴로운 거다.
아무리 로라애슐리 이불에서 잔다고 해도..
41쪽
부모에게도 자신의 생활태도와 사회적 위치가 있기는 하지만, 어린 자녀가 처하는 입장과 처지를 무시하는 경우는 많은 것 같다. 부모의 권위를 넘어 개인의 존재성을 자본과 힘의 논리로 부모의 권력이 자녀의 존재까지 좌우지 한다는 문제의식을 <엄마의 엄마>는 담아내고 있다.
#신이시여 헬프
미션스쿨에 입학한 미카미는 신부가 되겠다는 진로를 일찌감치 선택한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미카미는 집에서 소식을 전해도 관심이 없다. 어느날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신부님의 안내로 오랜만에 집으로 가게 된다. 가족들 사이에서 섬 처럼 떠다니는 미카미를 독자들은 느끼게 된다. 그러다 마을 산책 중에 초등학교 반 친구인 다나카를 우연히 만난다. 다나카의 주선으로 함께 공연을 보러 간 날, 미카미는 사춘기 사내의 설레임과 신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는 심리적 갈등이 묘사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복선이 깔려있는 것 같다. 미카미와 가족들의 분위기로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의문을 갖게 하고 있다.
#오마이 브라더
마지막 스토리에서 개인적으로 닭살 돋았다. ㅋ
<태양은 외톨이> <신이시여 헬프>에서 미카미의 생각 속에서 등장하는 초등학교 '기도선생님'의 가족사가 전개된다.
'후미오' '미쓰오' 라는 형제는 12살이나 차이나는 형과 동생이다. 대학생인 형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
성실하고, 친절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따뜻한 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모님과 경찰, 대학에서 까지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형의 존재는 살아졌지만, 동생 미쓰오는 '오컬트'를 믿으며 성장내내 형을 깊이 간직하며 살아간다.
오컬트는 내 인생의 핵심, 살아가는 신념이었다. 오
컬트를 믿는 것이 곧 형이 살아 살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었으므로.
대학 친구의 결혼식으로 신주쿠 호텔을 방문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인'은 '미쓰오'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 눈은 형 '후미오'라는 걸 직감한다. 서로의 암호를 나누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미쓰오'는 그제서야 흔적도 없이 사라진 형을 인정한다.
그랬구나. 형은 다른 세계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자기 세계를 찾은 것이다.
그래, 그랬어. 그랬던 거였어.
유쾌한 기분을 참지 못해 실실 웃음이 흘렀다. 눈에 진한 주황빛이 스쳤다.
아아, 저녁놀이다. 대도시에서 보는 저녁놀도 훌륭하구나.
<엄마의 엄마> 속에는 다양한 가족 관계 스토리를 유연하게 풀어내고 있다. 꽤 복잡한 사연임에도 '미카미'라는 14살 소녀의 시선으로 따뜻한 문장과 대화는 독자들에게 미소를 띄게 하는 것 같다. 인물들의 성격이나 관계를 이끌어가는 힘도 우리내 주변에서 쉽게 인물들 사연이 친근감을 더해 주었다. 가볍지 않는 '근친폭력', '성정체성', '미혼모 가정', '재혼가정' 등의 문제를 다양하게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는 않았다. 다쓰요 할머니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미카미는 왜 가족들을 외면하는지? 사치코는 어떻게 독립 할지? 의문이 남는 요소들을 곳곳에 숨겨놓았다. 다음 시즌은 어떤 내용으로 스토리를 이어갈지 궁금해진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은 저자가 2003년 도쿄 출생이라는 점이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임을 읽으며 놀랐다. 생일에 맞춰 소설을 한 권씩 출간 한다고 하니 타고난 재능이 부럽다. <엄마의 엄마>는 2019년 출간 된 세 번째 소설이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에 이어 나온 작품이다.
2020년에는 17살 생일을 기념으로 <나를 달로 데려가줘>를 내놓았다. 갑지기 호기심으로 저자의 소설을 찾아 읽어 보고 싶어진다.
"중학생이 되어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하나미와 미카미. 앞으로도 같이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저자 '스즈키 루리카'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