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자 민음의 시 155
김언 지음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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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일까?

자신의 감정적 표현을 절제화시켜 만든 일종의 운율을 갖춘 글.

중국의 한시, 한국의 시조, 일본의 단가.

일본어에서 시의 형식을 극단적으로 줄여 만든 <하이쿠> 등.




그런데, 조금 색다른 시집이 나왔다.

전혀 시적 운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듯한 시집.




김 언 시집. <소설을 쓰자>.

사실 <시집>이란 이야기가 없었다면 아, 에세이집인가? 하면 집어들었을 책이다.

아니면, 아 소설작법에 관한 책인가? 라며 책을 집어들었을지도.




저자의 시를 처음 접하는 나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기존에 시적 허용과 예외성을 어느정도 인정하더라도,

<이건 도대체 시가 맞나?>를 연발하게된다.




결국 책장을 넘긴지 몇 장 안되어 책 이 곳 저 곳을 살핀다.

도대체 저자의 의도는 뭐고, 왜 이렇게 쓰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책의 맨 뒷장에 있는 작품해설을 먼저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소설을 쓰자>는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신형철.

그 역시 제목을 이렇게 달아놨다.

<히스테리 라디오 채널-김언 시집 사용 설명서>.

참 그 저자(?)에 그 해설을 맡은 문화평론가(?)답다.




<(p165-6)이미 있는 독자와 소통하기보다는 있어야 할 독자를 창조하겠다고 나서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야심가들을 흔히 전위라고 부릅니다.(중략) 가장 소극적인 항목 중 하나는 당대 독자와 불화하는가?의 여부다. 러시아 미래파들의 모토는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랴! 였다.>




아! 독자가 시인으로부터 따귀를 제대로 한 대 맞았다.

책을 집어들고 이렇게 독자를 유린(?)하는 시인이라니, 정말 전위롭다.

그래서 이렇게 시집자체가 소설을 쓰자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나왔구나.




이제야 조금씩 시인 김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나마 해설서를 통해 아주 조금만.




<(p191)이 책은 소통의 근거를 심문하고 문법의 제약을 유린하면서 시(삶)속에 억압돼 있는 사건을 깨우려는 물건>




일단의 혁명투사적인 시 쓰는 이의 투쟁일지.

전위적인 소설을 쓰듯 자유롭게 시를 쓰는 이런 일탈(?).

아니라면 이런 혁명(?). 또 다른 새로운 장르의 창작(?).

수많은 물음표들이 책 한 권에 가득하다.




도대체 어디서 감흥을 얻고, 어디서 감상을 하고,

어디서 왜 이 시를 읽는지 정말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다.




<(p135)아름다운 문장 중-

/케이는 몇 십만부가 팔렸는지 궁금한 전화번호부를 들고 왔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엘 엠 엔 모두 오의 반쪽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피를 부른다 알은 잠자코

/걸어갈 계획이다 새가 되기 전에>




음...문법의 파괴와 해체, 문장의 재구성과 이해불가의 언어들.

왜 제목은 반어법처럼 아름다운 문장인가?

한글가운데 현대 언어적 파괴성을 영어과다사용에 빗대어 표현한 것일까?




<(p160)소설을 쓰자 중-책을 내고 출판 기념회에 온 하객들에게 왜 왔는지 모를 초청장을 발송할 것. 발송과 동시에 소설을 시작할 것. 영화의 결말도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끝날 것.>




아마도 독자를 바라보는 전위적인 글로 독해 불가능한 <소설을 쓰자>.

시인이 바라본 시적 소설쓰기의 모든 것이 담겨진 이 글이 흥미롭다.




남다른 독특함에 일단 점수를 매긴다.

조금은 당황스럽고 전위행위가의 이상한 몸짓처럼,

시적 일탈과 파괴의 글들에 후한 느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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