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딸에게 - 세상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한 노래
김창기.양희은 지음, 키큰나무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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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양희은이 부르는 노래를 원래부터 너무 좋아한다. 고요하고 적막하게 화려한 기교없는 창법으로 듣는 이의 마음과 향수를 불러오는 탁월한 음색. 통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즐겨 부르던 그 시절의 음악들.
역시 난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이 곡은 양희은과 후배 가수의 콜라보 곡으로 여러 번 들었다. 김세정과 악동 뮤지션의 이수현과도 함께 부른 이 곡은 들을 때마다 마음 한켠에 묻어두었던 모성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추억과 사랑이 애틋해진다.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 속을 뒤져 할 말을 찾지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난 한참 세상 살았는 줄만 알았는데
아직 열다섯이고
난 항상 예쁜 딸로 머물고 싶었지만
이미 미운 털이 박혔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알고픈 일들 정말 많지만
엄만 또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내 마음의 문을 더 굳게 닫지

공부해라 그게 중요한 건 나도 알아
성실해라 나도 애쓰고 있잖아요
사랑해라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나의 삶을 살게 해줘!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줄 수 있겠니
넌 나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양희은이 담담하게 부르는 가사의 내용이 사춘기 딸을 키울수록 더욱 마음에 와 닿아 뭉클하다. 더구나 좋은 노래를 따스한 그림과 색채로 가사를 담아 책으로 만들었다. 김창기님께서 작사를 할 때에는 아들에게 주는 곡으로 쓰셨다고 한다. 양희은님이 노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가 딸에게>가 되었고 2절 가사는 양희은님께서 직접 쓰실 정도로 애착을 가진 노래이다.♥

곧 데뷔 50주년을 맞이하는 가수 양희은의 이 노래 가사는 모녀를 끈끈한 애정으로 묶어주는 귀한 노래가사라고 생각된다. 처음 듣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던 노래.
엄마가 딸에게...

엄마도 한때는 딸이었고 어느 새 나도 엄마가 되어 딸의 모습을 보고 있다. 늘 생각한다. 엄마라면 나에게 어떻게 했을까?
내가 딸이라면 어떻게 해 주는 것이 나을까?

엄마와 딸을 꽃과 나비로 표현해서 더욱 포근해지는 그림이 있는 책이다. 꽃과 나비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꽃울 피우고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운명같은 존재이다.

딸에게 노래도 들려주고 책도 보라고 슬며서 밀어 주었더니 딱 자기 이야기라며 웃는 그 웃음 뒤엔 다른 생각이 있을거라는 짐작이 든다. 책이란 겉으로 표현내지 못하는 내면의 울림이 있다.나는 음악과 책이 주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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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의 새로운 상상력
국내 최초 재난•공포 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역작!

둥근 달에게 소원을 간절하게 비는 듯한 보랏빛 표지 그림이 몽환적이다. 김유정 소설 문학상 수상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라는 이경 작가의 소개가 짧게 있었다. 소재가 특이하고 스토리는 박진감 넘치는 색다른 장르의 신선한 소설이었고 마지막까지 궁금해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허물을 벗지 않으면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온 몸이 허물에 덮이는 피부병으로 밤의 도시 속 D구역에 격리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전설 속의 거대한 뱀 '롱롱'이 허물을 벗게 될 때 자신들 몸의 오래된 허물이 벗겨진다는 전설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전설 속의 뱀 '롱롱'을 찾아 나선 파충류 사육사 '그녀'와 방역 센터의 입소자들. 허물에 덮인 그들이 롱롱과 마주치는 순간, 도시를 움직이는 거대 제약회사의 충격적인 음모가 드러난다. 
작가의 압도적이고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구축된 거대 도시. 재난과 질병에 포위된 인간의 극한 공포, 그리고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육원을 나와야 했을 때 후원금 통장을 털어 동물원 근처에 방을 얻었다. 동물원은 보육원과 비슷했다. 새끼들은 어미와 떨어져 사육사의 손에 자랐다. 그녀는 오랫동안 뱀을 지켜보다 돌아왔다. 뱀은 고요했다. 그녀처럼.
p.24

숭배의 대상이었던 뱀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공포의 대상이 됐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타이어 동굴을 지키던 사람들이 갑자기 빠져나던 이유를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사육장에 있는 뱀을 이용해 공포를 부풀리는 이유가 고작 프로틴을 팔기 위해서라니. 납득하기 힘들었다.
p.146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을 보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하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과 잉여 생산물을 교활하게 연결시키는 전략을 활용한다. 우리 자신의 분명한 분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풍문에 의해서 쫓게 되는 허상과 실재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전설은 전하는 입마다 다르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다음 사람에게 전하기 때문이야. 믿음은 저절로 싹을 튀우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지 스스로 택하는 게야. 제 손으로 터를 파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집을 짓는 것이지. 너는 스스로 허물을 벗으면 마땅히 다시는 입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게지.
p.201

이런 소설을 상상 속에서 끄집어 내어 이야기로 엮어내는 작가를 보면 비상한 천재들 같다. 언제나 별거 아닌 생각을 특별한 시선으로 달리해 보는 실험정신과 많은 가설들을 내세운 스토리 전개가 흥미롭다. 

파충류를 신으로 숭배하는 둣한 토테미즘에 빗댄 이야기와 혼자 벗겨내기 힘든 허물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격리되어 사는 사람들의 불안과 고통을 현실처럼 혹은 가상의 세계처럼 마음껏 상상하게 만든다. 

어떤 사회에서든 특정 부류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조장함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또 어떤 부류는 희망을 조성한다.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언제나 선택에 따른 책임은 자신의 몫이다. 그 불안과 공포를 악용하는 사회와 기업의 윤리와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적인 풍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에 기인한 소망이라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의 간절한 이야기 전개는 끝까지 박진감 넘친다. 그리고 마지막이 궁금해져서 끝을 행햐 읽게 만든다. 열린 결말을 맺음으로 더욱 상상력을 극대화 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공포가 이념이 되고, 이념이 공포를 강화시켰다. 그 불행한 순환 속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건 허물 뿐이었다. 공박사는 시민이 아니라 시민들의 허물이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공포란 인간의 욕망과 여러 모로 비슷하지. 공포가 공포를 낳는 것처럼 욕망이 욕망을 낳는다네. 내가 공포를 이용했다면, 자네는 욕망을 이용한거야. 허물을 벗고자 하는 욕망. 그게 죄라면 자네와 내가 저지른 죄의 무게는 비슷할 걸세."
p.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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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유연하게, 
마음은 단단하게! 
오늘은 나의 심신 가꾸는 날  

외부로 향한 눈을 잠시 가리고 내 안에 있는 눈을 뜨고 그저 여기 있음에 집중하는 시간.
균형잡힌 삶을 위해 오늘도 나마스떼!!

-AM327 글•그림
생소한 이름의 작가, 피키캐스트 화제의 연재작이라는 궁금한 채널의 소개로 시작한다. 본명은 김민지. 상업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이야기를 그리는 작가의 책이라서 네 컷이나 여덟 컷의 웹툰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림으로 된 에세이는 처음이다. 글밥으로 가득 채워진 책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색감의 그림 안에 일상에 깃든 요가라는 장치를 소개하며 소소한  이야기들이 미소짓게 만든다. 자꾸 책장이 넘어가지 않고 멈추는 이유는, 따라하라는 안내는 어디에도 없지만 친절하고 자세한 그림설명에 요가 동작을 쓸데없이 따라하게 된다는 점이다. 정말 말도 안되게 뻣뻣한 내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도 요가를 하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지고 삶까지 유연해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 버렸다.

작가는 회사생활이나 사람으로 지친 몸과 끌려다니는 감정을 줄이고 나 자신과 친해지려는 노력으로 요가를 시작했다. 여전히 휘청일 때도 있지만 삶 속에 요가가 스며들어 일상의 중심을 지탱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작가의 말에 나는 과연 어떻게 나를 보듬어 가는지, 나 자신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는지,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정답없는 게 인생이라도 나만의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줘요.
늘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네요.​
없던게 생겨나는게 아니라 늘 있던 걸
발견하고 깨달을 뿐.
p.53

빈 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도 텅텅 비어버려서 집에 오는 길도 긴 밤도 허전하게만 느껴져요.
그런 날 나는, 가장 소중한 친구 대하듯 나를  다독입니다.
마음의 구멍은 제때제때 메워요
p.238

덜컥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둘 수 있었던 것, 자리잡을 때까지 월세를 선듯 내주는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던 용기 메이트, 반려견 민구와의 일상이나 엄마와 딸의 흔한 이야기들을 작가만의 감성으로 가만가만 읊조리듯 들려준다. 다른 것들이 침범하지 않게 온전히 들숨과 날숨을 내쉬며 나에게만 집중해 보는 시간을 날마다 반복하며 쌓아올린 요가를 통한 유연함을 전하고 함께 나누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꼭꼭 눌러 담겨져 있었다.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좋고 아무데나 보이는 요가 동작을 따라해 볼 수 있는 재밌는 책이다. 날마다 요가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성취해가며  안팎으로 근육을 키워가는 모습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나 자신을 다독다독하고 싶어지고 온전히 집중해 보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언제나 내 안에 깃든 인생의 답을 길어 올리는 시간들을 즐기며 나마스떼~인사하는 날이 오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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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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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못 다한 삶을 후회하는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안한
일생일대의 거래

[오베라는 남자]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감동소설의 대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소설이다.

다산북스의 책인데 표지가 너무 이쁘다. 겉표지를 벗겨내니 보랏빛 양장본의 동화같은 표지가 마음에 든다. [일생일대의 거래]에는 배크만이 가족에 대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있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실제 자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밤, 잠든 아내와 아이를 바라보며 쓴 소설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 형식의 책이다. 처음과 마지막 장의 그림은 동화같은 아름다운 장면으로 소설 속으로 이끌고 들어 간다.

"모든 생명이 똑같이 소중할까요?"하고 누가 물으면 대다수가 우렁찬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의 생명은요?"라고 묻기 전까지의 얘기지.
일생일대의 거래(p.11)

병원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보게 된다. 겨우 다섯 살에 암에 걸린 아이. 다가오는 죽음이 무섭지만 본인을 걱정하는 엄마를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애써 엄마에게 맞춰주는 아이. 사랑스러운 아이와 맞닿은 생과 (죽음이 아닌) 목숨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서 내가 죽으면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다섯 살짜리의 죽음은 기사로 다루어지지 않고, 석간신문에 추모사가 실리지도 않는다. 그 아이들은 아직 발이 너무 작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만한 발자취를 남길 시간이 없었다.
일생일대의 거래(p.26)

할 수만 있다면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본인이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인 걸 깨닫는다. 아이를 살리려면 그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이룬 업적들, 남긴 발자취... 모두 포기해야 한다.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부담감을 달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0초쯤 서 있을 거다.
p.34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고 싶었던, 오랜 세월 쌓아온 이야기를, 아버지는 곧 죽을, 아니 사라질 마당에 아주 담담하게 그린다. 오랫동안 본인이 쌓아온 모든 것들을, 본인이 중요하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두고 가야 하는 씁쓸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쉽고 슬플 뿐이다.

...(생략) 항상 네 눈에 비치던 헬싱보리가 아주 찰나의 순간 내 눈에도 보였다. 네가 아는 어떤 것의 실루엣처럼. 고향. 그곳은 마침내 그제야 우리의 도시가 되었다. 너와 나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일생일대의 거래(p.105)

목숨을 맞바꾼다는 것은 대신 죽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왔던 인생 전체를 삭제 당하는 것. 즉 존재 자체가 없어짐을 뜻한다. 남자는 두렵지만, 이제 일생일대의 거래를 하려고 한다.
사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아버지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남자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고 싶다.
바로 지난 시간을 어리석게 흘려보낸 자신과 화해하고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는 것.

사람이란 누구나 미련해서인지 바빠서인지 죽음을 코앞에 두고 마주해야만 살아온 인생을 함축적으로 반추하게 되고, 사는 동안 애써 눈감았던 진실을 현실 속으로 데려온다. [일생일대의 거래]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사색적 질문을 담고 있어서 여러 번 읽을수록 곱씹게 되는 시처럼 서정적인 소설이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이 이야기는 마지막 그림처럼 크리스마스 선물같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부모로서의 무게감, 성공의 가치,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나의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파적이겠지만 부모의 부담감과 책임감, 성공을 향하던 젊음 뒤에는 결국 자식을 위한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부모님의 일생을 나 역시 가고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일까.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런 편지같은 소설을 남기는 작가가 부러웠다. 이해할 듯 못할 듯 새로운 형식의 짧은 동화같은 소설은 다 읽은 후에 다시 한번 읽어도 여전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이라는 작가만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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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장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소설
「오베라는 남자」보다
더 재밌고 감동적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책표지에 캐리커쳐처럼 새겨진 고복희의 인상은 깐깐하고 원리원칙 주의자로 보인다.
겉표지를 거둬내고 속표지를 펼치니 파스텔  톤으로 은은한 감성의 양장본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든다. 겉모습과 달리 따스하게 물들이는  고복희의 속 마음을 대변해 주는 장치라도 된다는 둣이.^^
누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의 속내를 구석구석 알아내는 것은 시간과 애정이 필요한 일임을 소소하게 그려낸다.

추천사를 두른 띠지의 소개처럼 재밌고 따뜻한 소설이다. 「오베라는 남자」는 아직 읽지 못해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집어든 책이 가독성이 뛰어나서 무리없이 읽었다.
그럼에도 마음 속으로 아프게 쿡쿡 찔러대는 소설이었다. 모두가 살기 힘든 팍팍한 현실에서 조금만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도전하려는  사람들의 의지, 희망의 삶을 꺾는 사람들의 불편한 관계나  사기행각은 속상하고 원통한 일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까칠한 고복희의 숨은 사랑 이야기가 마음 아팠다. 사람들은 왜 보이는 것만으로 그 사람 전부를 안다고 단정짓고, 자기만의 잣대로 판단하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루는지 모르겠다.

원더랜드를 점검하며 101호를 살펴보니 박지우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아 더울텐데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달씩이나 이곳에 오는 것도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저 멍청한 짓을 벌였을 줄이야. 
상상 그 이상의 멍청이다.
장영수라면 말했겠지. 세상을 바꾸는 건 이런 멍청이들이라고.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p.56

고복희는 올해 오십 살이 됐고 중학교에서 로봇같이 말하고 행동해서 인기도 없는 전직 영어 선생님이었다. 지금은 민박에 가까운 호텔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사장이다. 반면에 흥이 많아 춤추는 것을 즐기고, 낯간지러운 소리도 곧잘해서 인기많은 장영수는 고복희와 같은 학교로 발령받아 함께 교직생활을 한다. 그 청춘들이 서로 다름에 이끌려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는 짧고 시크하게 지나가며 나의 시린 추억까지 곱씹게 만든다.
방에만 처박혀 있지말고 좀 나가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박지우는 한국을 떠나 한달 살기로 정하고 떠난다. 그 곳이 캄보디아 프롬펜의 원더랜드. 고복희에게 오랜만에 온 한국 손님 스물여섯의 백수 박지우는 첫인상이  멍청이였다. 염치없는 투숙객 박지우는  남편에게만 잠깐 열었다가 굳게 닫아버린 고복희의 마음을 들쑤시고 다니며 성가시게 굴어댄다.

 린은 많은 것을 일러준다. 옳다고 믿었던 것이 어쩌면 옳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다고. 그저 싫어만 했던 것에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대표적으로 원더랜드가 그렇다.  안대용에게 원더랜드는 성격나쁜 사장님이 있는 호텔에 불과했다. 하지만 린을 만나고 원더랜드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대문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각상, 은은한 레몬그라스 향기, 열대나무 위로 뚜렷하게 순환하는 해와 구름, 환하게 웃고 있는 린의 미소.......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p.77

사람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 주변의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달라지게 만든다. 원더랜드의 사랑스럽고 정많은 직원 린과 나약함에 무시받고 이용당하는 안대용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고복희도 박지우도 조금씩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고 살아가는 법과 잘하는 것 등을 걸러내며 유쾌해지기도 하고 괜찮은 사람들이 되어간다.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엮이면서 전혀 이상하지 않은 스토리들이 서로의 교감을 만들어 가고 잔잔한 서사 안에 감동을 묻어 놓았다.

"일을 안합니까?"
"해야죠. 해야하는데."
박지우는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국은 망했어요."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고 고복희는 생각했다.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p.93

고복희는 장영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
다양한 것들을 고려하면서 살아야 한다.

장영수는 자유라든가 행복, 평화나 사랑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붙잡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문학을 전공해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고복희는 문학이 삻다. 세상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수학이나 과학이다.  시나 소설에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다분하다. 순식간에 들어와 감정을 난도질하고 도망가 버린다.  명확한 답을 내려줄 것도 아니면서.
p 176-177

그러고보니 맞는 말도 같다. 문법이라는 것에 예외가 빈번해서 어려운 영어보다는 명확한 공식에 맞아 떨어지는 수학을 푸는 것이 더 편리한 이치라고 고복희의 단호함에 한 표를 던진다.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문학이지만 늘 질문을 하고 상상을 하게 만들 뿐 명확한 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있을 때 또 다른 나에게로 가는 여행을 끊어낼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불거사의한 일을 경험 중이다. 그 혼돈마저 즐기는 것이 문학이니까~^^

 "나는 당신이 걱정이에요."
한참만에 장영수가 말했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만 하며 산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니까.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나아가 당신의 도덕성을 시험하려 들 거예요. 부당한 상황에 밀어놓고 옳지 않은 선택을 하게끔 유도하겠죠. 좌절하는 당신을  조롱하고 헐뜯을지도 몰라요."
상관없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삶은 아니니까.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걸로 족하다.
고복희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둣이 장영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당신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p.205

인간관계에 원활하지 못한 고복희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장영수의 진심어린 말이 가슴을 후빈다. 정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때때로 엄청난 외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벽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린 벽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했다. 세찬 비가 내린다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니까. 지난함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니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성가신 남자는 매일같이 찾아와 조금씩 그녀의 벽을 허물었다. 어떤 날은 달콤하게. 어떤 날은 아프게.
p. 206

책 속에 들어갈수록 고복희에게 자꾸 마음이 가버린다. 장영수를 사랑했고 그를 잃은 자리에 벽이 생겨버린  이별의 상실감과 쓸쓸함 앞에서 나는 고복희가 되어버렸다. 옆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먼저 가버리는 이별이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이별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ㅠ

무심한듯 써내린 글 속에 인간의 내밀한 감정들을 섬세하고 유쾌한 문체로 담아내 문은강이라는 작가를 기억하게 만든다. 교민들의 생활에서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인간의 본성들까지 드러낸다. 원리와 원칙대로 융통성이 없어보이는 고복희라는 인물을 내세워 단순히 고지식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내면의 그리움과 잔잔한 정을 발랄한 감동으로 마무리한다.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차츰 변화하는 고복희의 모습은 그 말투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드라마로 나와도 흥미로울 것 같은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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