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장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소설
「오베라는 남자」보다
더 재밌고 감동적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책표지에 캐리커쳐처럼 새겨진 고복희의 인상은 깐깐하고 원리원칙 주의자로 보인다.
겉표지를 거둬내고 속표지를 펼치니 파스텔  톤으로 은은한 감성의 양장본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든다. 겉모습과 달리 따스하게 물들이는  고복희의 속 마음을 대변해 주는 장치라도 된다는 둣이.^^
누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의 속내를 구석구석 알아내는 것은 시간과 애정이 필요한 일임을 소소하게 그려낸다.

추천사를 두른 띠지의 소개처럼 재밌고 따뜻한 소설이다. 「오베라는 남자」는 아직 읽지 못해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집어든 책이 가독성이 뛰어나서 무리없이 읽었다.
그럼에도 마음 속으로 아프게 쿡쿡 찔러대는 소설이었다. 모두가 살기 힘든 팍팍한 현실에서 조금만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도전하려는  사람들의 의지, 희망의 삶을 꺾는 사람들의 불편한 관계나  사기행각은 속상하고 원통한 일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까칠한 고복희의 숨은 사랑 이야기가 마음 아팠다. 사람들은 왜 보이는 것만으로 그 사람 전부를 안다고 단정짓고, 자기만의 잣대로 판단하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루는지 모르겠다.

원더랜드를 점검하며 101호를 살펴보니 박지우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아 더울텐데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달씩이나 이곳에 오는 것도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저 멍청한 짓을 벌였을 줄이야. 
상상 그 이상의 멍청이다.
장영수라면 말했겠지. 세상을 바꾸는 건 이런 멍청이들이라고.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p.56

고복희는 올해 오십 살이 됐고 중학교에서 로봇같이 말하고 행동해서 인기도 없는 전직 영어 선생님이었다. 지금은 민박에 가까운 호텔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사장이다. 반면에 흥이 많아 춤추는 것을 즐기고, 낯간지러운 소리도 곧잘해서 인기많은 장영수는 고복희와 같은 학교로 발령받아 함께 교직생활을 한다. 그 청춘들이 서로 다름에 이끌려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는 짧고 시크하게 지나가며 나의 시린 추억까지 곱씹게 만든다.
방에만 처박혀 있지말고 좀 나가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박지우는 한국을 떠나 한달 살기로 정하고 떠난다. 그 곳이 캄보디아 프롬펜의 원더랜드. 고복희에게 오랜만에 온 한국 손님 스물여섯의 백수 박지우는 첫인상이  멍청이였다. 염치없는 투숙객 박지우는  남편에게만 잠깐 열었다가 굳게 닫아버린 고복희의 마음을 들쑤시고 다니며 성가시게 굴어댄다.

 린은 많은 것을 일러준다. 옳다고 믿었던 것이 어쩌면 옳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다고. 그저 싫어만 했던 것에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대표적으로 원더랜드가 그렇다.  안대용에게 원더랜드는 성격나쁜 사장님이 있는 호텔에 불과했다. 하지만 린을 만나고 원더랜드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대문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각상, 은은한 레몬그라스 향기, 열대나무 위로 뚜렷하게 순환하는 해와 구름, 환하게 웃고 있는 린의 미소.......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p.77

사람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 주변의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달라지게 만든다. 원더랜드의 사랑스럽고 정많은 직원 린과 나약함에 무시받고 이용당하는 안대용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고복희도 박지우도 조금씩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고 살아가는 법과 잘하는 것 등을 걸러내며 유쾌해지기도 하고 괜찮은 사람들이 되어간다.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엮이면서 전혀 이상하지 않은 스토리들이 서로의 교감을 만들어 가고 잔잔한 서사 안에 감동을 묻어 놓았다.

"일을 안합니까?"
"해야죠. 해야하는데."
박지우는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국은 망했어요."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고 고복희는 생각했다.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p.93

고복희는 장영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
다양한 것들을 고려하면서 살아야 한다.

장영수는 자유라든가 행복, 평화나 사랑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붙잡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문학을 전공해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고복희는 문학이 삻다. 세상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수학이나 과학이다.  시나 소설에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다분하다. 순식간에 들어와 감정을 난도질하고 도망가 버린다.  명확한 답을 내려줄 것도 아니면서.
p 176-177

그러고보니 맞는 말도 같다. 문법이라는 것에 예외가 빈번해서 어려운 영어보다는 명확한 공식에 맞아 떨어지는 수학을 푸는 것이 더 편리한 이치라고 고복희의 단호함에 한 표를 던진다.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문학이지만 늘 질문을 하고 상상을 하게 만들 뿐 명확한 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있을 때 또 다른 나에게로 가는 여행을 끊어낼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불거사의한 일을 경험 중이다. 그 혼돈마저 즐기는 것이 문학이니까~^^

 "나는 당신이 걱정이에요."
한참만에 장영수가 말했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만 하며 산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니까.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나아가 당신의 도덕성을 시험하려 들 거예요. 부당한 상황에 밀어놓고 옳지 않은 선택을 하게끔 유도하겠죠. 좌절하는 당신을  조롱하고 헐뜯을지도 몰라요."
상관없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삶은 아니니까.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걸로 족하다.
고복희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둣이 장영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당신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p.205

인간관계에 원활하지 못한 고복희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장영수의 진심어린 말이 가슴을 후빈다. 정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때때로 엄청난 외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벽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린 벽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했다. 세찬 비가 내린다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니까. 지난함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니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성가신 남자는 매일같이 찾아와 조금씩 그녀의 벽을 허물었다. 어떤 날은 달콤하게. 어떤 날은 아프게.
p. 206

책 속에 들어갈수록 고복희에게 자꾸 마음이 가버린다. 장영수를 사랑했고 그를 잃은 자리에 벽이 생겨버린  이별의 상실감과 쓸쓸함 앞에서 나는 고복희가 되어버렸다. 옆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먼저 가버리는 이별이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이별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ㅠ

무심한듯 써내린 글 속에 인간의 내밀한 감정들을 섬세하고 유쾌한 문체로 담아내 문은강이라는 작가를 기억하게 만든다. 교민들의 생활에서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인간의 본성들까지 드러낸다. 원리와 원칙대로 융통성이 없어보이는 고복희라는 인물을 내세워 단순히 고지식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내면의 그리움과 잔잔한 정을 발랄한 감동으로 마무리한다.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차츰 변화하는 고복희의 모습은 그 말투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드라마로 나와도 흥미로울 것 같은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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