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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평점 :
그 날,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식당에서
나는 히틀러의 시식가가 되었다.
절대 권력자들은 늘 ‘독살’을 두려워했다. 기원전 54년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버섯 요리를 먹고 독살당했고,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두다리 황후는 남편 찬드라굽타의 음식을 대신 먹고 죽었다. 20세기에도 여전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는 1978년 영국 버킹엄 궁을 국빈 방문했을 때 검식관을 대동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여러 명의 개인 검식관을 두고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검식관을 채용한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한국일보)
문예출판사의 가제본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된 소설이다. 크리스마스에 읽기에 가벼운 소설은 아니었지만 실화바탕과 히틀러의 시식가라는 소재가 흥미로워서 책을 받을 때부터 궁금증이 컸다. 슬픈 전쟁의 서사가 암울한 시대에 파묻힌 인간의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전쟁의 단명과 이면,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포착해 낸
2018 캄피엘로 비평가상 수상작가
로셀라 포스토리노
역사상 가장 잔혹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아돌프 히틀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장편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히틀러의 검식관을 소재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감별하기 위해 끌려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했던 15명의 여성 중 유일한 생존자인 마고 뵐크의 인터뷰를 토대로 썼다. 전쟁이 나면 왜 여자들에게 더 가혹한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읽는 내내 참담했다. 물론 전쟁에 끌려가 무고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 남자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도 못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주는 죽음과 이별, 인간성의 상실과 선과 악이라는 경계가 무너지는 일상들이 무서운 공포로 다가온다.
소설은 구체적 시기와 등장인물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뵐크의 증언을 뼈대로 했다. 스물 여섯 살의 로자는 1943년 남편이 2차대전으로 징집되면서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와 시부모와 함께 지낸다. 어느 날 로자는 영문도 모른 채 나치 친위대에게 붙잡혀 히틀러의 동부전선 본부가 들어선 인근 병영으로 끌려간다. 이곳에서 로자는 함께 끌려온 열 명의 여성들과 함께 히틀러가 먹게 될 음식을 미리 먹는 ‘시식가’이자 ‘독 감별사’ 역할을 하게 된다.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의 기미상궁이 되어 생명을 부지하는 댓가로 보통 노동자들보다 높은 급여를 받는다. 음식을 먹고 독이 퍼질 때까지 60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하는 공포와 불안감은 음식 앞에서 무너지곤 했다. 독약이 있을지도 모르는 죽음을 담보로 한 시식단에 유대인으로 꾸리지 않고 순수혈통인 독일인 여성으로 소집한다. 히틀러는 자신이 먹게될 음식을 유대인과 공유하는 것조차 꺼렸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실종당한 슬픔을 마주할 겨를도 없이 독이 들었을지 모르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일에 내몰린다. 음식을 맛보면서 동시에 공포의 냄새를 맡아야 했던 여자들의 이야기에 몸서리치게 섬뜩해진다.
매일 세 번, 죽음의 공포와 마주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생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매번 식사 후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개처럼 울기도 했다. 시식을 위해 병영에 모인 여성들의 입장도 제각기 다르다. 히틀러가 먹게 될 음식을 미리 맛보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광신도들이 있는가 하면, 추근대는 친위대원들의 관심을 즐기는 여성도 있고 불의에 저항하고 불가항력적인 문제에도 기꺼이 정의로운 편에 서는 여성도 있다. 흥미로운 역사적 실화 뿐 아니라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인간적의 고뇌와 삶에 대한 애착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처음에는 다들 음식을 조금씩 입속에 집어 넣었다. 우리에게 어쩌다 초대받은 그 사람의 점심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억지로 삼키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음식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이 음식은 애당초 우리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순전히 우연히 이 음식을 먹게 된 거다. 음식은 식도를 따라 미끄러져 뱃속에 뚫린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음식물로 채우면 채울수록 구멍은 점점 더 커졌고 구멍이 커질수록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디저트로 나온 아펠슈트루델(여러 겹의 페이스트리 안에 사과와 건포도를 채운 디저트)이 너무나 맛있어서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p.13
내 몸은 총통의 음식을 흡수했다. 이제 총통의 음식은 피를 타고 내 몸속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무사했고 나는 또다시 배가 고팠다.
p.21
두려움은 하루 세 번 노크도 없이 들어와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두려움도 따라 일어났다.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친구처럼 익숙했다.
p.106
사실 모든 삶은 강박증의 일환이다. 언제든 부딪혀 추락할 수 있다.
p.110
나는 그리움의 대상이 없는 향수병을 앓았다. 그레고어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나는 삶이 그리웠다.
p.133
비밀을 공유하면 가까워지기보다는 멀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여러 사람이 죄를 저지를 때는 눈 딱 감고 해치워야 한다. 어차피 죄책감은 빨리 사라질 테니 말이다. 집단적 죄책감은 형태가 모호하지만 수치심은 개인적인 감정이다.
p.190
12년 동안이나 독재 체제하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독재에 순응하는가?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변명이다. 나는 고작해야 내가 씹어 삼키는 음식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음식을 먹는 무해한 행위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200마르크를 받고 몸을 파는 것을 수치스러워할까? 높은 급여를 받으며 호식을 하는 이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할까? 그들도 나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에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비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할까? 나는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내게 아버지는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재판관이었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치글러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도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그런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인 거다.
p.197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이토록 연약한 것에 어떻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강한 것에서 가치를 찾지만, 생명은 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파괴할 수 없는 것에서 가치를 찾지만, 생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강한 것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기를 강요당할 수도 있는 거다.
p.282
사랑이란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상대방의 경계를 잘 허물기를 열망하는 이방인 사이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서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우리의 사랑이 살아남지 못한 것은 비밀 때문이 아니라 제3국의 몰락 때문이었다.
p.285
친구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세상과 격리된 상태에서 말이다.
p.372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가는 힘 없는 인간인 로자가 전쟁 중에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의 상황에서 겪는 일들이다. 그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친구들 떠나 보내고 비밀을 지키고 자신을 지켜나간다. 스스로 악을 행하는 자와 악의 없이 악한 임무를 수행하는 인간의 틈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나치에 순응하기 위해 독 음식을 먹어야 했던 공포 상황과 악의 평범성을 소설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지속되는 광기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지 자문하게 만든다.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폐해와 인간성의 상실로 인한 슬픔과 절망들이 적혀져 있다.
추천사의 적힌 글처럼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