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 가을이다. 학마을의 유일한 개인 장군이도 오동통통 살이 오르는지 볼 때마다 배와 엉덩이가 넓어진다. 딴 건 몰라도 무게의 변화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이유가 내가 매일 수로에서 장군이를 건져주기 때문이다.
[할매, 장군이가 너무 살이 찌는데, 잡아드실 거 아니면 다이어트 좀 시키세요. 너무 무거워서 구해주기도 벅차요]
[나는 고날이 고날이라 장군이가 그런지 몰랐어]
[이 참에 밥을 좀 줄이세요]
[알았어]
우리는 마당에 서서 대화를 나눴다. 청산 할매는 수확물들을 말리기 위해 마당에 검은 헝겊을 깔고 계셨다. 축사 근처에는 빨간 고추들이 어느새 제법 말라 태양초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오늘처럼 해가 좋으면 버버리 할배는 도로에서 벼를 말리신다. 나는 완성된 출판물 파일도 보낼 겸 봉투를 들고 슈퍼 쪽으로 걸어 나가는데 역시 버버리 할배가 보였다.
[잘 마르고 있나요?]
[나..날..이..조..좋아..자..잘..말..라]
[수고하세요]
땅은 열을 흡수해 낮 동안은 매우 덥다. 그 위에 수확한 벼를 널어놓으면 기계에 말리는 것보다도 좋다. 태양초, 태양초 하는 것처럼 태양쌀인 셈이다. 버버리 할배는 자신이 먹을 쌀만 농사 지으시기 때문에 저렇게 혼자 일을 하신다. 아침에 한 번 쫙 뿌려두었다가 대낮이 되면 발로 벼들을 살살 밀어서 안과 밖의 자리를 바꾸신다. 밤이 되기 전까지 말린 후 모아 두었다가 다음 날 그 과정을 되풀이 한다. 양이 많아서 좀 더 요령 있게 하실 때는 고랑을 만드시려고 발로 밀어주신다.
[장군아~]
할배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를 스쳐지나가는 장군이가 보였다. 내가 부르자 잠깐 멈춰 서서 쳐다보더니 슈퍼 주인 할매네 집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 근방은 풀이 높게 자라 다니기 불편한데 왜 장군이가 그런 지역으로 들어가는지 궁금해졌다. 슈퍼는 잠시 후에 가기로 하고 장군이 뒤를 따라갔다.
[헉! 저 녀석..]
어떻게 구한 건지 계란을 날름날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지난번에 너구리에게 주려던 학 알을 뺏어먹은 후 그 맛을 못 잊은 게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장군이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이유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시무시한 장 닭을 어떻게 피해 계란을 구하는 건지 궁금하다. 장군이는 내 기척을 느꼈는지 계란을 물고 도망쳤다. 그런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다리를 지나다보니 개울가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걸 목격했다. 그나마 몸이 날렵했을 때는 가장 자리 근처에서 징징거렸지만 상당히 무거워진 지금은 개울 한 가운데에 돌덩이 마냥 쓰러져있다. 지금 장군이를 구하러 들어가려면 출판물 파일을 분실하거나 잊어버리겠다 싶어 먼저 슈퍼에 들렀다가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하루 이틀 빠지는 게 아니다보니 구해주러 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기술을 익혀놓았음을 안다. 실제로 지난번에는 잊어버리고 있다가 2시간 후에 갔는데도 그대로 수로에서 기다렸다.
[할매, 신경써주세요. 이거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그래, 걱정 말고 막걸리나 한 사발 하고 가]
택배 기사가 물건이 있을 때만 오다보니 신신당부를 하며 맡겼다. 기왕 기다리는 거 조금 더 있으라고 중얼거리며 씨껍데기 막걸리 한 사발을 마셨다. 목울대를 퉁겨주며 넘어가는 술 맛이라니...
[저리가! 저리가!]
슈퍼 주인 할매는 빗자루를 들고 무엇인가를 쫓으셨다.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서 보니 고양이다. 몇 십분 후에 택배 값이랑 술 값을 치르고 나올 때까지도 도로 건너편에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아마도 다리를 다쳤는지 계속 핥으며 신음 소리를 낸다. 나는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일반적인 야생 고양이는 사람을 매우 경계하여 조금만 가까이가도 도망가거나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데 이놈은 멍하니 처다본다. 손으로 잡아들자 벙벙했던 모습과는 달리 약간 말랐다. 왼쪽 뒷다리에 피딱지가 앉아 흉한 게 덧에 걸렸거나 다른 짐승에게 당한 모양이다.
[안 키우려면 건드리지 마시게. 사람 손 탄 놈은 죽어]
스쿠터를 탄 도토리묵 장수가 털털거리며 다가오더니 멈춰서면서 말했다. 그의 발치에 중국집 배달통이 보인다.
[자장면도 배달하세요?]
[돈 되는 건 다해. 먹고 싶으면 이리로 전화해. 근데 그거 어쩔 텐가?]
발로 배달통에 적힌 번호를 가리키더니 다시 내 손에 들린 고양이에게 관심을 돌렸다.
[일단 치료부터 해주고 생각해보죠, 뭐]
[안 키울 꺼면 연락해. 약으로 팔면 제법 받아]
그는 다시 털털거리며 멀어져갔다. 학마을에서 안 사람 중에 제일 기이한 인물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뭐든지 알고, 뭐든지 한다. 처음에야 놀랐지 이제는 그가 어떤 일을 하든 그러려니 한다. 이쯤 되면 그가 때때로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학마을 사람이 다 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구급약 상자를 꺼내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에 붕대를 감았다. 또 핥아댈까 봐 머리에는 두꺼운 종이로 깔때기를 만들어 묶어주었다. 예전에 아내와 함께 이런 놈을 “깔때기 고양이”라고 불렀다. 깔대기를 벗으려고 팔을 이리 저리 제치는 게 재미있다며 깔깔거린 추억이 스쳐지나갔다.
[앗! 장군이!]
갑자기 개울가에 버려두고 온 장군이가 생각나 뛰어갔다. 성격이 진득하고 몸이 무거워 아직도 개울가 한가운데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물을 뚝뚝 흘리는 녀석을 안고 돌아오니 청산 할매가 집에 없어 우선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진흙을 닦아주려고 호수를 수도에 연결하는데 장군이 놈이 대청마루로 걸어간다. 순간 고양이가 생각나 돌아보았다. 내 걱정과는 상관없이 둘은 잘 지낼 것처럼 보인다. 더 정확히는 장군이가 고양이의 몸을 샅샅이 핥아준다.
[웬 고양이야?]
[아까 슈퍼 갔다가 발견했어요. 다친 게 불쌍해서 치료 좀 해주려고요]
[장 닭 조심시켜]
학마을의 난봉꾼이자 무법자 장 닭에게 걸리면 이런 고양이는 사망할 수도 있으니 사람보다도 일차적으로 조심시켜야 한다. 청산 할매의 말대로 적당한 박스에 넣어주고는 마당의 풀을 뽑으며 오후를 보냈다.
고양이가 나아갈 동안에 장군이가 변했다. 물고기를 물고 와 고양이에게 주거나 그것도 모자라다 싶으면 계란을 가져다준다. 톡톡 까서 터지면 발로 밀어서 먹으라고 한다.
[말 못 하는 짐승이 사람보다 낮구만]
[하지만 할매, 이건 좀 그렇잖아요]
[뭐가?]
[개랑 고양이가 잘 지내는 거는 그렇다 쳐도 장군이 하는 폼이 좀..]
[공수래공수거야, 보기 좋으니 됐지 뭘, 신경 꺼]
뒷짐을 지고 흐뭇하게 바라보시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사랑을 하든, 미움을 하든 장군이의 선택이니 수로에 안 빠지면 내 신간이 편해져서 좋다.
얼마 안 있으면 추석이라 이것저것 준비할 겸 장에 다녀왔다. 넷째네서 가져온 차가 고장이나 장날용 특급 버스를 이용하자니 번거로운 게 사실이다. 땀이 나서 빌빌거리며 다리를 건너오는데 장군이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오늘은 미스터리도 풀 겸 짐을 바짝 당겨 들고는 빠르게 쫓아갔다.
[엇! 어~어~]
말 대신 감탄사만 나온다. 분명 “개”인 장군이가 나무를 타는 게 아닌가. 순간 원숭이가 환생했나 싶었다. 어찌나 잘 타는지 하루 이틀의 솜씨가 아니다. 저런 능력을 가진 놈이 왜 수로나 개울물에 빠지는 지 참 신기하다. 장군이는 내가 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엎드린다. 잠시 후 장 닭이 날아와 모이를 먹은 후 사라지자 나무에서 내려왔다. 주변을 살피더니 계란을 물고 사라진다. 장군이는 멍하니 구경하는 나를 슬쩍 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우리 집으로 갔다. 이제는 다 나아 깔때기를 벗은 고양이가 장군이에게 다가간다. 둘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이좋게 계란을 나누어 먹었다. 짐을 내려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할매, 장군이 좀 데려가세요]
청산 할매의 소리가 들려 크게 외쳤다. 둘은 깜짝 놀란 듯 일어서더니 함께 청산 할매 집으로 갔다. 그리고 결국 고양이는 그 집의 새식구로 변신한다. 이름은 예쁜이.
몇 개월 뒤의 일이지만 예쁜이는 3마리나 새끼를 낳았다. 덕분에 장군이가 가는 곳에는 예쁜이와 그 새끼들이 줄줄이 따라다니고, 장군이가 수로에 빠지면 다 같이 합창을 해 더 빨리 구해준다.
[미물들도 다 생각이 있는 법이여, 알간?]
청산 할매는 수로에서 건진 장군이를 건네주자 그렇게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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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벼를 수확하고 나면 도로마다, 마을마다 바닥에 가득 널어놓은 벼들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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