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부인을 광에 넣어야 할 시기다. 아침 저녁으로 스멀스멀 찬 기운이 몰려온다. 하여 지난번에 장에서 사온 문풍지로 창이랑 문틀에 겨울맞이 대공사를 시작했다. 이런 일은 혼자 하면 다시 붙여야 할 일이 더 많다. 결혼 생활 동안 집 안 일에 일절 신경을 안 쓰다 보니 서툴러서 문풍지 하나 해결하기도 시간이 꽤 걸린다. 문득 헤어진 아내에게 미안함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아저씨~도와드릴까요?]
몸은 창틀에 기댄 채로 고개만 돌려보니 그 아가씨다. 계절이 계절인데도 여전히 짧은 팔에 반바지니 어색하다.
[이런 거 해본 적 없을 텐데..]
[월동 준비하느라 낙엽을 붙여봐서 할 줄 알아요]
요즘 짐승들은 테이프를 사용해 월동 준비를 하나보다. 어찌되었든 손 하나가 생기는 건 반가운 일이다. 눈치도 빠르게 반대편으로 올라가 대롱거리는 문풍지를 잡아 쩍..하는 소리와 함께 붙였다. 그리고는 돌아다니며 바람이 들어올 만한 곳은 알아서 다 한다.
[제가 더 잘하죠?]
해맑게 웃는 모습이 아내랑 비슷하다. 어쩌면 처음 부석사에서 보았을 때 낯설게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다. 그녀도 곧잘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뭐 먹을까요?]
[응?]
[열심히 일 했으니까 배를 불려야죠]
도와주었으니 인심을 써야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먹을 것이 현재는 김치 밖에 없다.
[그럼..우리 집에 가서 먹을까요?]
[너희 집? 어디 있는데?]
살면서 사람이 아닌 존재의 집에 놀러가는 사건도 생기다니, 오래살고 볼 일이다. 아가씨의 집은 부석사 뒤라고 하여 차로 가기로 했다. 10여 킬로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어가기엔 꽤 멀다.
[우리 집에 놀러올 때 매일 이렇게 온 거니?]
[사람이랑 우리랑 같나요. 숲 속 지름길을 따라오면 금방 가요]
[지름길?]
[우리 엄마가 알려주신 전용 길이요]
차를 몰고 부석사 경내까지 왔다.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처음 아가씨를 만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갔다.
[저~기 뜬 바위 보이시죠? 조금만 더 가면 되요]
이 지역에는 바위 두개가 맞물려 붙어 있지 않고 쌓아올려져 “떠 있는 바위”라는 뜻의 뜬 바위가 있다. 그래서 절도 부석(浮石)사 라고 한다. 영주에서는 매우 유명하다보니 영주 사과를 “뜬 바윗골 사과”라고 부를 정도다. 나는 지금까지 부석사에 가면 뜬 바위를 보는 게 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편으로 무엇인가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뜬 바위를 지나 아가씨는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교묘하게 가려놓은 가지들을 걷으니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들어오세요]
갑자기 쑥스러움을 느끼는지 얼굴을 붉히며 옆으로 비켜섰다. 나 역시 헛기침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촛불도 보인다.
[비좁아도 이해하세요]
[불을 밝혀두었네]
[아..보통은 안 그러는데 오늘은 청소를 하던 중이어서..]
[청소?]
주변을 둘러보니 여러 가지 물건들이 바닥에 늘어져 있어 산만한 느낌이다. 게 중에는 목이 긴 도자기도 보이고 나비가 그려진 연적, 개구리가 앉아 있는 벼루 등, 생각외의 것들이 있어 놀랬다.
[도자기 수집이 취미야?]
나는 호리병을 들어 불에 비췄다. 무엇을 하는지 어두운 구석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던 아가씨가 웃는다.
물려받은 거예요. 청소할 때 같이 닦아주거든요. 가지고 싶으신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여기 그런 거 많아요]
아닌 게 아니라 구석에 많다. 도자기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싸구려는 아닌 듯 하니 어쩌면 의외로 좋은 골동품일지도 모른다. 호리병은 청자로, 긴 목의 중간 쯤 넥타이를 두른 것처럼 무늬가 그려져 있고, 넓은 면에는 고고히 하늘로 비상하는 학들을 세겼다. 연적의 나비도 날개를 활짝 펼쳐, 부르면 날아오르겠다. 사람과 짐승의 기준은 확실히 다른 듯, 이런 예쁘고 비싸 보이는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다. 아마도 뭔가를 가지고 있다면 음식에 대한 본능 정도일터..아가씨가 어떤 종류의 짐승이든 현재까지는 사람의 말과 행동, 마음을 가졌으니 친구하기에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요즘은 귀엽기까지 하다. 청산 할매가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도토리묵 장수만큼이나 안 보이면 궁금하다.
[차린 것은 없지만 드세요]
말 그대로 차린 것은 고구마랑 도토리묵이 다였다. 김치 밖에 없는 우리 집 보다야 많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한 상차림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아가씨는 수줍게 웃으며 다음엔 언니네서 더 가져다 놓겠다고 덧붙인다.
[언니도 있어?]
[네. 시집갔지만 종종 놀러 와요]
[오호. 근데 너는 왜 시집을 안가니?]
[아직..마땅한 남자를 못 만나서요. 아저씨 같은 사람이 있으면 바로 시집갈 텐데..]
희미한 양초 불빛으로도 얼굴이 붉어진 게 보인다. 이런, 이거 혹시 나한테 반했나..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머리를 올린 다소곳한 차림의 여자가 들어오자 아가씨는 반가운 듯 벌떡 일어섰다.
[어!]
[어머!]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보며 놀랬다. 아가씨의 언니는 바로 얼마 전 학 알을 얻으러온 둔갑 너구리였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도 너구리라는 뜻이다.
[남편 분은..어떠신가요?]
우리는 말없이 음식을 나누어 먹은 후에 차 한 잔을 손에 들었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묻자 그녀는 얼굴을 돌리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행동이 비슷한 게 역시 자매가 맞다.
[그냥..그렇지요]
아가씨는 우리가 서로 알고 있음에 놀라워하더니 곧 아이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나는 음식도 다 먹고 더 있기도 뭣하여 그만 가겠다고 말했다. 아가씨는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를 건네준다. 그녀의 언니는 기분이 별로 인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이것을 받으면 그녀의 마음까지 가져가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지만 한사코 주는 바람에 어정쩡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이라 책상 위에 도자기들을 올려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름답구나..무릉도원인가..]
꿈이라는 걸 느낌으로 알지만 좀 더 즐기고 싶어 느릿느릿 거닐었다. 지난번에 본 호수가 눈앞에 있고 파란 색의 나비가 팔랑거리며 내 어깨에 앉았다. 날개를 흔들 때마다 파란 가루가 옷에 떨어진다. 또한 남빛에 가까운 파란 개구리가 호숫가 주변에서 뛰어다녔다. 그 때 멀리서 이 호젓한 장면에 어울리지 않게 닭소리를 내는 너구리가 나타났다. 깜짝 놀라 급히 눈을 떠보니 울산댁네 난봉꾼 장 닭이 방 안에 있다. 언제 들어왔는지 오른쪽에서 시끄럽게 울어댄다. 몸을 비틀어 장 닭을 피해 일어났다. 책상 위의 도자기들을 보니 왜 꿈 의 나비와 개구리가 파란 색인지 알겠다. 그녀의 도자기는 백자이고, 새겨진 것들이 바로 남빛에 가까운 파랑이다. 꿈의 마지막에 너구리가 난입할 정도로 그녀가 너구리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나보다.
[그러게 어울리지 말라고했지, 권선생도 말을 참 안 들어]
[이제 어쩌죠?]
[옛날엔..사람을 홀리는 짐승들은 죽였어]
[네?]
[혹시..권선생도 좋아해?]
[아뇨..다만..]
[일단 도자기부터 다 돌려줘. 나무관세음보살]
청산 할매에게 상의를 하다보니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물건을 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죽이는 건 싫다. 그동안 정이라도 들었는지 너구리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싫지 않다. 학마을에 살다보니 이런 일이 다 생긴다.
고민을 하며 어제 갔었던 길을 더듬어 찾아갔다. 비닐봉지에 담아 온 도자기들이 짤랑짤랑 소리를 낸다. 대충 이쯤이다 싶은 지점에서 동굴 입구를 찾는데 어딘지 모르겠다. 하긴, 쉽게 사람의 눈에 띌 것 같으면 너구리가 맘 편히 살겠는가. 도자기 도둑이 들어 살생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못 돌려줬다고?]
[네. 아무리 찾아도 동굴이 안 보여서요]
[잘 가지고 있다가 오면 돌려줘, 쯧쯧]
청산 할매는 난감한 표정의 나를 남겨두고 매정하게 가버리셨다. 책상 위에 다시 자리 잡게 된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웠다.
닷새쯤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너구리 아가씨는 한 번도 오질 않았다. 매일 수로 너머를 보며 두 근 반, 세근 반 하던 것도 점차로 가라앉는다. 혹시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밥맛도 다시 생겨났다.
[으으..춥다]
이제 늦가을마저도 끝나가는 지 이른 아침의 공기는 칼날처럼 차갑다. 몸을 비비며 대청마루로 나가니 고구마와 도토리묵이 도자기 접시에 소복이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