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막걸리의 별칭이 “카바이트 막걸리”였다. 먹고 나면 다음 날 어찌나 머리가 깨지게 아픈지 안 먹고 싶은 술 1위다. 막걸리는 원래 시간을 들여 스스로 발효가 되게 해야 전통의 술 맛이 나는데, 그 때는 빨리 생산해 한 병이라도 더 팔자고 인위적인 첨가물을 넣었기 때문에 두통을 유발했다. 몇 일전에 TV를 보니 일본의 막걸리 열풍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막걸리 붐이 일고 있다는 보도를 듣고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권선생, 막걸리 만드는 데 도와줄 수 있어?]
[막걸리도 빚으실 줄 아세요?]
[그럼, 옛날엔 집에서 해 먹었어]

  청산 할매는 아침 밭일을 가시는 길에 수로 너머에서 부탁하셨다. 내일 장에 가서 재료를 사오면 힘 좋은 내가 누룩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물론 다되면 수제 막걸리를 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인터넷으로 막걸리의 역사 등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청산 할매는 부지런히 장날용 특급 버스를 타고 다녀오셨다. 나는 마을의 단 한 개뿐인 정류장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버스 문이 열리고 내려오시는 모습에 반가워 한 걸음에 달려가 짐을 들어드렸다.

[역시 술꾼은 술이 최곤게..권선생, 침이나 닦아]

  청산 할매는 내 속을 다 아시는 듯 웃으며 농담을 하신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왜 갑자기 술을 빚으시냐고 묻자 남편 제사상에 올릴 예정이란다.

[그 양반이 집에서 만든 거 아니면 안 먹어서..살아선 바람질로 괴롭히더니 죽어서도 요따구로 힘들게 한다니까]

  말은 그리 하셔도 할매가 돌아가신 남편을 그리워하신다는 걸 안다. 가끔 저녁에 마실 나가다가 창문 너머로 보면 할배 사진을 보고 계시니까. 아무튼 덕분에 수제 막걸리가 생기게 되어 나만 살판났다. 아니 학마을 최고 술꾼 버버리 할배도.

[더 세게 해야지, 권선생은 힘도 없나?]

  그날 점심 무렵에 나랑 버버리 할배는 청산 할매 집에서 반죽을 발로 밟느라 고생했다. 베보자기에 싼 반죽을 피자처럼 만든 뒤 발로 자근자근 밟으라고 하셨다. 그래야 제대로 된 반죽 상태가 나온다고 한다. 청산 할매는 호미처럼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지시고는 시범을 보이신다. 

[할매, 이게 진짜 술이 되요?]
[내 20년 넘게 만들어 먹었는데 그걸 말이라 해? 누룩 반죽을 반그늘에서 사흘 밤낮으로 말리고, 고소한 맛이 날 때 빨리 거둬서 빠작 말려야 돼. 몰랐지?]

  이렇게 밟는 건 TV에서나 보았지 내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학마을에서 태어나 학마을을 벗어난 적 없으실 할매가 이런 방법을 아시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얼마나 밟았는지 땀이 목을 타고 흘러내릴 무렵에야 다 됐다고 하시며 가져가셨다. 얼마간 숙성 시켜야 된다는 말과 함께 그 날은 매정하게도 위로주 한잔 입에 대보질 못하고 끝났다. 출판물을 손보느라 몇일 동안 두문불출하고 있으려니 할매가 다시 부르셨다.

[권선생, 술 익는 소리 들어봤나?]
[소리요?]
[그런 게 있어. 이 항아리는 권선생 줄 테니 가져가서 방에 두시게]

  발효되는 일만 남자, 두 개의 항아리 중에 작은 것을 내게 안겨 주셨다. 얼결에 받아온 항아리를 할매 말대로 방 안 아랫목에 두었다. TV에서만 보던 것이 내 코앞에 있으니 어찌나 기분 좋은지 혹시 소리가 들릴까 싶어 자주 귀를 가져가보았다. 술 익는 소리란 게 참 재미있다. 어떨 때는 도란도란 아줌마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또 어떨 때는 속닥속닥 할매들이 정겹게 말하는 듯하다. 바닷가에 가면 뽀드락 뽀드락 발밑에 밀려오는 파도의 느낌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더욱 신기하다. 어느 산 속, 사람이 오지 않는 옹달샘에 끊임없이 샘물이 솟아오르듯 둥글고 맑은 거품이 생겼다 꺼진다. 한 참을 보고 있어도 지겹지가 않다. 우리네 전통 술은 마음과 정성, 시간의 산물임을 또 한번 느낀다.

[동동주를 마시려거든 항아리 안에 체를 넣어 맑은 물만 건져내면 돼]
[아~그렇군요]

  다음 날 마실 가는 중에 만난 청산 할매는 동동주 만드는 팁을 알려주셨다. 빨리 익어라..빨리 익어라..나는 매일 산신에게 기도하듯 항아리에게 말을 걸었다.

[캬....좋다]
[소싯적엔 이 술통 숨기러 산 속으로 도망 다녔어]
[왜요?]
[집에서 술 만들면 잡혀갔거든. 벌금도 물고..그래서 조사 나오면 신발도 못 신고 뛰었어]
[그래도 이만한 게 없어. 설탕을 쪼매 타서 먹으면 맛이 기가막혀. 권선생도 어릴 때 꽤 먹어봤지?]

  할매들 말에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주전자 속 막걸리를 마시고는 물 섞어 내밀던 일과, 형이 설탕을 타줬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드디어 수제 막걸리가 다 된 날, 학마을 사람들은 밭 한 가운데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달빛이 숨 막히게 뿜어져 내려오는 가운데 동그랗게 앉아, 녹슨 주발에 가득 담은 청산 할매표 막걸리를 한 입 들이키는 순간 절로 캬..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먹을 것이 넘쳐나도 배추적에 김치만 있으면 이렇게 행복한 축제가 되니 학마을이 이 순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배추적을 찢어 입에 넣자니 정녕 내 고향에 돌아왔다는 감회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제사상에 쓸 것만 따로 두고 항아리째 들고 나온 술을 다 마셨다. 날 좋으면 모레 저녁에 다시 모여 우리 집에 둔 것도 마시자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라?]

  자리에서 일어나 보글거리는 항아리부터 살펴보았다. 왠지 약간 줄어든 느낌이 술이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양이 적어지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맛만 좋다면야..라고 항아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출판물 재점검 작업에 몰두하였다. 저녁식사는 청산 할매네서 하고 들어와보니 또 술이 조금 줄어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금을 표시해 두었기 때문에 줄어들었다는 게 정말 확실했다.

[거참...]

  어차피 내일 밤이면 먹을 것이라..밤사이에 또 조금 줄어든 들 큰 문제 있을쏘냐 싶어서 다시 한 번 줄을 그은 뒤에 잠들었다.

[맛이 참 좋네]
[역시 이게 제일이야]
[맛이 깊은 게 누룩이 잘 떠진 모양이구만]

  잘은 안 들리지만 계속 뭐라고들 한다. 크..캬..신음인지 환호인지 미묘한 작은 소리들이 이어서 들려온다.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 고개를 들어보니 항아리 옆에 그림자가 많다.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체구들이 상당히 작다. 마치 아이들이 모여 있는 듯한데, 목소리는 쉬었다. 애기 할배들?

[너구리도 부를걸 그랬지?]
[나중에 알면 삐져서 경을 칠 텐데..]
[신경 쓰지 말고 마셔] 
[도토리도 좀 가져오지]

  나는 살금살금 포복 자세로 문지방을 넘어갔다. 이제껏 조금씩 사라진 게 그들의 행동이었음을 알았지만 왠지 방해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술꾼들의 술 인심이야 대한민국 어디에나 같고, 맛있는 술을 인정해주는 이에게 조금 나누어 주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으니까.

[달빛이 참 좋죠?]

  대청마루에 앉아 있자니 이 늦은 밤에 길을 걸어가는 도토리묵 장수가 보여 말을 걸었다. 그는 봄에는 도토리묵을 팔고, 여름에는 개를 사며, 가을에는 닭을 매매하는 매우 버라이어티한 사람이다. 비록 키는 나보다 작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 이제는 안 보이면 궁금하다.

[그러게 말이요. 하도 좋아 달구경하러 나왔소]

  그는 슬렁슬렁 산 속으로 걸어갔다. 나 역시 방에서 나온 이상 그들의 술잔치가 끝날 때까지는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를 따른다.

[술을 빚었으면 산신께 먼저 바치지 그랬나]
[아...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그럼 혹시?]

  그는 어찌 알았는지 막걸리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야 나의 집에 있는 키 작은 무리들이 산신들임을 알았다. 그는 기다 아니다 정확하게 어느 쪽 말도 안하지만 왠지 느껴진다. 산신도 찾는 수제 막걸리라니..나는 참 좋은 곳에 산다. 복 받은 인생이다.

[한 잔 하고 싶소?]
[그러고야 싶지만..술이 없어서..]

  그는 무너진 사당 쪽으로 가면서 그렇게 물었다. 서낭당 나무 아래 앉더니 어디에 숨겨 온 것인지 사발과 통을 내놓았다. 마음으로는 이 정도 크기라면 들고 있는 것을 못 보았을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종종 사람이 아닌 듯 행동하니까 이럴 수도 있다.

[크....]
[이런 날, 이런 곳에서 마시는 것도 운치 있지]
[학마을은 정말 신기한 곳이에요]
[약간은...그럴지도]

  달빛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안주 하나 없지만 맨 술만 먹어도 우리네 막걸리는 속이 괴롭지 않다.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서야 조졸한 술 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산신 무리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항아리 안의 막걸리는 역시나 조금 줄었지만 대신 작은 매화 한 송이가 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친 매화와 수제 막걸리의 맛. 가을이 이렇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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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배추적...시골에 내려갈때만 먹으니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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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차한잔 2009-09-1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처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막걸리..한창 먹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그땐 머리가 너무 아팠던 게 딩딩 울렸죠.

우주바다 2009-09-1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흐린하늘에 빗방울이 후두둑..비가오면 시골의 흙마당에선 마른흙내음이 확~올라오고 밭일을 나가지않는 집에선 배추적붙이는 냄새가~~~.쪽파나 부추가 흔하지않아 언제나 배추적을 노릇하게 부쳐 쩍쩍 찟어서먹었는데..아 정말 먹고파요..얼른 집에가야겠어요..막걸리도 한병 사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