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나는 스승님의 방에 있었다. 입은 옷은 창피하지만 여전히 체육복이고, 머리도 산발인 게 호랑이와 접전을 벌인 후다. 어쩌면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수도 있다. 스승님은 해바라기가 활짝 그려져 있는 새파란 잠옷을 입고 다가오셨다. 내 옆에 누워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행동에 가슴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쿵쾅쿵쾅... 

내 귀로 가득 들려오는 심장소리에 얼굴이 벌개지며 손, 발도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뱀파이어는 냉혈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들다가, 이건 꿈인데 뭔들 불가능하겠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는 꿈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는 무모한 용기를 내, 두 팔로 스승님의 목을 감쌌다. 

[넌 아름답고 총명해]
[스승님께 사랑받을 수 있을 만큼요?] 

그의 중얼거림이 너무 작아 귀에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긍정적인 대답이었을 거라고 믿었다. 서늘한 손이 옷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따라 움직이면서 동시에 입술이 목을 스치며 천천히 얼굴로 올라왔다. 그의 긴 몸이 살며시 내 위로 겹쳐지고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흥분이 느껴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다급한 무엇인가가 담겨 있어 나 역시 목에 감은 손을 더욱 조였다. 무엇인가 야릇한 느낌이 몸에 전해지며 심장에서부터 아릿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평소에 바래오던 상황이긴 하지만, 아직 스승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는 꿈일지언정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살짝 밀자 가라앉은 목소리가 거친 숨결 사이에서 들렸다.   

[싫으니?]
[아니요. 그게..] 

그의 넓은 가슴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머뭇거렸다. 스승님은 내 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떨어뜨렸다. 이토록 침대가 넓었던가..싶게 스승님과 나 사이에는 차가운 공간이 생겼다. 

[스승님을 좋아해요. 진작에 알고 계셨죠?] 

천장을 바라보며 고백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게이치 않았다. 

[이건 꿈이니까 하는 말이에요. 내 꿈인데,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잖아요]
[꿈?]
[네. 제 꿈이요. 스승님도 제가 만들어냈고, 나도 내가 만들었어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좀전의 일은 계획했던 게 아니지만..어쨌든..]
[그건 내가 한 행동이지] 

스승님의 눈은 따뜻한 갈색으로 가득 덮혀 있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듣고 싶어요] 

그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작은 소리가 새어나오는 느낌이지만 너무 아득하고 멀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

 

차가운 액체가 뺨에 느껴져 눈을 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손으로 훔쳐내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어?] 

눈을 몇 번 비빈 후 둘러보자 이곳은 스승님의 방이고, 내가 누워 있는 침대도 스승님께 분명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불을 들쳐 몸을 살펴보았지만 체육복은 조금의 벌어짐도 없이 단정했다. 

[일어났어?] 

방문이 열리며 스승님이 파카글라스를 들고 들어오셨다.  

[그 옷..언제 입으신거에요?]
[옷? 어제부터. 왜?] 

스승님은 꿈에서 본 해바라기 무늬의 새파란 잠옷을 입고 계셨다. 걸을 때마다 얇은 린넨 잠옷이 흔들리며 튼튼한 몸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식지 않았는지, 꿈에서의 열정이 생각나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파카글라스를 건네받아 몇 모금 마셨다. 급하게 들이킨 탓에 유난히 거북한 속을 달래려 숨을 몰아쉈다.  

[저는 왜 여기서 잤죠? 제 방이 없나요?]
[니가 찾아왔잖니]
[제가요? 저기..어제 혹시..] 

스승님은 말없이 웃으시며 옷 갈아입으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꿈이라고 생각한 게 꿈이 아닐 수도 있다면, 어처구니없는 타이밍에 고백을 했다. 멍한 느낌으로 침대를 내려와 새로 만들어진 내 방으로 가면서 몇 번을 되풀이해 어제의 상황을 되집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여는데 두통이 몰려왔다. 삼차신경통이 시작되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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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바다 2010-10-2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읽었는데..더 이상 없네요..
이 글 정말 재밌어요..은근 박진감도있고 긴장도되고 조바심도 생기고..
작가님의 글은 뭐랄까..참 친근해요..소재가 영 생소한데도..그 전의 글 때문인지..
이런 멋진 가을날은 영주 부석사쪽으로가 빛고운 사과를 한상자 가득 사오고도 싶네요..


최현진 2010-10-23 10:39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지금 한창 사과를 따는 철이라 곳곳이 붉은 사과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