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들어서니 수로가 얼었다. 개울물은 덜 하지만 거기도 한번만 더 동장군이 오면 빙판으로 변할 태세다. 덕분에 장군이를 꺼내는 아르바이트는 휴업 상태다. 집에서 추위를 피한다고 이불 속에 있자니 밖보다 더 추운 느낌이 든다. 우리 집 기름보일러를 사용하기가 부담스러워 전기장판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기름 값 걱정을 하다가 결국 영주 시내에 들러 연탄보일러 공사를 부탁했다. 눈이 더 오면 길이 막혀 들어오질 못할 테니 꼭 내일 아침에 시작해달라는 말을 하고 시내로 걸어갔다. 바로 돌아갈까 하다가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다. 봄이 되면 야생화를 캐다 마당에 심으려고 하는데 아는 지식이 별로 없어 농한기 동안 열심히 들여다보자는 마음이다. 하여 미니 백과사전 같은 책을 골라 금액을 지불하고 버스비로 쓸 잔돈을 마련하기 위해 껌 한 통을 샀다. 1시간 뒤에 학마을을 지나가는 막차를 탔다.
[날씨가 꽤 춥소]
나는 운전기사의 인사에 답변도 제대로 못했다. 그는 다름 아닌 도토리묵 장수였다. 그동안 내가 본 그는 도토리묵 장수, 개 장수, 닭 장수, 자장면 배달원이었는데 여기에 버스 운전기사라는 이름이 또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언제부터 운전을 하신 건가요?]
[오늘]
[자장면은 배달 안하시구요?]
[눈이 와서 그만 뒀소]
그의 답변은 언제나 간단명료하다. 막차라서 그런지 할매 한 분이랑 내가 다여서 그가 심심할까봐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다보니 건너편 자리가 불편해 운전석 뒷자리로 옮겨 앉았다.
[이렇게 눈이 날리는 날이 운전하는 게 더 어렵고 위험하던데..잘 하시네요]
그는 고개만 끄덕이더니 라디오를 켰다. 내가 사는 학마을은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데 지금 아나운서의 말에 따르면 오늘 밤 산간지방에는 폭설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살살 내리는 눈발이 거세지기 전에 집에 도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이 갑자기 펑펑 쏟아진다. 아직 집까지는 마을을 세 개 더 지나야 하니 큰일이다. 학마을은 이 버스의 마지막 정류장인데다가 굽이굽이 길이 이어져 있어 눈이 많이 오면 위험하다.
[꽉 잡으슈]
운전을 하던 도토리묵 장수가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졸고 있는 할매를 슬쩍 돌아본 뒤에 의자 옆에 있는 긴 봉을 잡았다. 잠시 후 굽이굽이 길에 들어섰다. 버스는 반대편에서 차가 오지 않으면 중앙선을 침범하여 커브를 돌았고, 나는 그 때마다 보이지 않는 건너편에서 갑자기 차라도 나타나 박을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차라리 이 순간 졸고 있는 할매가 부러웠다. 어느 덧 굽이굽이 길의 최고점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으로 된 굽이굽이 길이다. 눈이 하도 오니 와이퍼를 움직여도 앞이 잘 안 보인다. 아마도 우리만 이 길을 가는지 앞뒤로 차가 없다. 게다가 재설 작업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아 길이 눈 투성이다. 그걸 아는 도토리묵 장수는 이젠 아예 중앙선이 그려져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도로 가운데로 차를 운전한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털썩 기댔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버스가 가니까 언젠가는 도착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보지 않으려던 행동인데, 따뜻한 히터 바람 때문에 고개가 자꾸 숙여졌다. 자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무뎌진다.
[어이~어이~]
이번엔 눈 내리는 호수에서 파란 나비랑 개구리들과 놀고 있는데 누군가 흔드는 통에 깨어났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도토리묵 장수다. 그는 간단하지만 힘이 실린 한마디를 했다.
[내리소]
[뭐라고요?]
[차 섰어]
내가 잠든 사이에 버스가 고장 났다. 그의 말로는 라디에이터 문제라는데 오늘 버스 운전을 시작한 사람의 말이니 100% 믿기도 그렇다. 무엇이 문제이든 버스가 섰으니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 함께 탄 할매가 걱정이 되어 뒤돌아보니 이미 내리셨는지 없었다.
[혼자 가라고요?]
[나는 버스를 지켜야 되니까]
[하지만..]
그는 나보다도 얇은 옷차림이었지만 버스와 함께 장렬히 전사할 작정인지 고개를 흔들며 나를 밖으로 내몰았다. 버스 문이 열리는 순간 뺨에 칼날이 스친다. 손에 입김을 불어 뺨에 대고 비비면서 걸어가자니 울적해지는 기분이다. 한 편으로는 그냥 기름보일러 땔걸..하는 자책도 든다. 몇 푼 아끼겠다고 이런 고생을 하다니..
시골길의 문제점은 이정표가 드문드문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 나는 지금 얼마쯤 걸었는지, 어디쯤 왔는지 모르겠다. 눈은 어느새 발목을 다 채우고도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 감각도 없이 추운데 핸드폰도 없고, 따뜻한 손난로도 없으니 쉬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걷는다.
[길을 잃으셨나요?]
생각을 비우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데 반갑게도 말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에는 여름에 밭일할 때 쓰는 수건 달린 모자를 썼고 두꺼운 방한 잠바와 바지를 입은 아주머니였다. 손에는 그릇이 들린 게 어딘가 다녀오는 길인 듯 하다.
[학마을에 가는데 버스가 고장 나서요..아무래도 길을 잃었나봅니다]
[아..학마을..제가 길을 아는데 따라오실래요?]
자신은 상석리에 산다며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 걱정 말고 가자며 웃는다. 이 상황에서 안 따라가면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왜 이 밤에 밖에 계세요?]
[동생 집에 갔다가..]
나보다 앞서 걸어가는데 도토리묵 장수 저리 가라로 발이 빠르다. 확실히 길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있는 발걸음, 절도 있는 손동작이다. 그렇게 그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걸어가자니 너구리 아가씨가 무사한지 걱정 된다. 연모의 마음이야 다음 문제라 치고,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먹이 구하기도 어렵고 고립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동생에게 오지 말라고 해주세요]
[네?]
갑자기 억양이 달라져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머뭇거렸더니 앞서 가던 아주머니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가로등불에 보니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 즉 학 알을 달라고 찾아왔던 여자다.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안 좋다. 어쩜 같이 있기 싫은 걸지도..
[처음엔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혹시 죽기라도 하면 내 동생이 따라 죽는다고 할까봐 살려주려고 왔답니다]
나는 먹이를 달라고 조르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동생 분이..어떻게 한다고요?]
[음식도 먹고 도자기도 받으셨으니, 자기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역시 청산 할매의 말이 맞았다.
[다음 날 돌려주려고 갔었지만 집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도 제 동생이 선생님 집에 갔을텐데요. 그럴 마음이 없으면 확실하게 하셨어야죠]
우리는 계속 걸어가면서 옥신각신 한다. 나도 처음에나 놀랐지 계속 말하다보니 곧 평정을 되찾았다.
[마음도 없으면서 흔들다니 참으로 나쁜 사람이군요. 동생은 지금 몸저 누웠어요.밥도 못 먹고 울기만 한다구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풀었다. 그날 울고 가서는 그리 되었구나..문득 마음이 아파오면서 슬퍼졌다. 눈은 어느새 무릎까지 쌓였다. 또 하나의 언덕길을 올라 정상에 도착하여 둘러 보니 학마을 입구가 눈에 파묻혀 온통 하얗다.
[남편 분은 혹시..사람인가요?]
[한 번은 그랬고, 또 한 번은 아니에요]
[행복했습니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침묵이었다.
그녀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학마을 입구에 일찍 도착하였다. 내가 목례를 하고 눈에 덮여 흔적도 없는 다리 위를 걸어가자니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서로 살아가는 길이 다르잖아요]
다 건너 커브를 돌 무렵 저 너머를 바라보니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버스 운전기사인 도토리묵 장수가 지나가는 중이다. 그의 손에는 영주 시내에서 샀던 야생화 백과사전이 들려있었다. 그는 멈추지 않은 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고는 빙긋 웃었다. 왠지 그가 일부러 나를 그곳에 내려주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냥 돌아섰다. 나 역시 내 갈 길을 가려고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속에 발을 옮겼다. 이제 곧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