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게 오늘이 벌써 새해 첫 날이다. 일전에 장에 갔다가 은행에서 받은 멋없는 달력을 새로 걸고 대청마루와 방을 청소했다. 우리 집은 구정을 지내기 때문에 새해 첫 날에 특별한 의미를 두거나 떡국을 끓여 먹는 행사가 일절 없지만, 36살의 첫 날은 단정한 몸과 마음, 깨끗한 집으로 시작하고 싶다. 하여 2시간이 넘도록 정리를 한 뒤 땀이 흐르는 몸을 닦았다. 왠지 뿌듯한 기분에 대청마루에 서서 마당을 둘러보았다.

[형욱아~]

  수로 너머에 첫째 형과 셋째 형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라 맨 발로 내려갔다. 혹시나 학마을에서 종종 겪는 신기루가 아닐까 해서..

[신발 신고 내려오지, 그러다 발 다치겠다]

  셋째 형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술이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검은 비닐봉지가 흔들린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그냥..새핸데..혼자 보내기 적적할까 싶어서 내려왔지]

  첫째 형은 나를 바라보다가 대청마루에 앉았다. 우리 7형제가 모두 모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잘해야 2-3일 정도다. 게 중에는 시집간 누나도 있어 친정 모임에 정확히 맞춰 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첫째 형과 셋째 형은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라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다.

[방이 깨끗하구나]

  첫째 형은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가 궁금한지 부엌도 들여다보고 방 안도 살폈다. 책상 위의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를 잠시 살펴보다가 내려놓았다. 평소의 나를 생각하면 그런 물건들이 어울리지 않아서다. 나는 모른 척하고 방 구석에 두었던 화로를 끌어왔다.

[이게 아직도 있었어?]

  화로는 지난 여름에 우리 집 다락에서 발견했다. 아마 윗 세대에서 쓰던 것 같은 데 많이 낡고 군데군데 금이 갔지만 꽤 쓸 만하다 싶어 겨울이 시작될 때 방 안에 들여놓았다. 이게 불을 피워두면 생각보다 좋다. 운치도 있고, 감자를 구워 먹기도 좋고..하여간 남자 혼자 살림에 유용한 도구다. 불이 완전히 죽어버리지 않게 살짝 덮어두었던 재를 걷고 불씨를 키웠다.

[오면서 보니까 산에 눈이 제법 쌓였더라. 꿩 사냥 하던 때가 생각나네]

  화로에 밤을 구워먹자는 의견 일치를 본 후 저장고에서 가져온 밤에 칼집을 내어 올려놓고 앉아 있자니 첫째 형이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런 겨울이면 집 안에만 있기도 지겨워 가까운 산 속에 올가미를 설치해놓았다. 학마을에서는 올가미를 옹노라고 불렀다.

[형이 옹노를 참 잘 만들어서 한 번 걸린 놈은 못 빠져나갔잖아]
[꿩이랑 토끼랑 또..뭐가 잡혔더라?]

  옹노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개목에 걸린 줄이랑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쥐덫처럼 들어간 순간 딱 조여드는 성질을 가졌다. 움직일수록 더 살을 파고들어가 늦게 발견할 때는 피를 흥건히 흘리게 된다. 문제는 설치해놓고 잊어버릴 때다. 제거도 안하고 가보지도 않으니 동물의 시체가 썩기도 하고 지나가던 사냥꾼이나 등산객이 걸리는 일도 발생한다. 그러나 이제는 가축을 해치는 산짐승이 있을 때나 옹노를 설치할 정도로 옛 추억이 되었다.

[우리 이거 다 먹고 나서 옹노 설치할까? 엊그제 폭설이 왔으니 먹이 구하러 내려오는 짐승이 꽤 있을 거야]

  셋째 형은 잘 익은 밤을 골라 먹으며 제안했다. 나는 별 대답을 안 했지만 첫째 형이 좋다고 하여 둘은 대청마루에서 옛 기억을 되살려 튼튼하게 옹노를 제작했다. 그리고는 수군수군 하더니 내가 잘 다니는 숲 속 산책로 쪽으로 사라졌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곧잘 붙어 다녔다. 한 사람이 물고기를 몰고 가면, 또 한 사람은 맞은 편에서 대기하다가 퍼 담는 식으로 손발이 척척 맞아 이곳을 떠날 때까지 근방에서 뭘 해도 제일 잘하는 형제로 소문난 사람들이다. 나이가 들어 각자의 일을 하느라 자주 못 봐도 이렇게 만나면 금방 합체를 하니 참 재미있다.

  둘은 30분쯤 후에 무릎까지 젖어서 돌아왔다. 오늘 밤이 지나면 뭔가 하나쯤은 잡힐 거라며 막걸리를 거하게 마신 후 잠자리에 들었다. 크지 않은 방 안이 코고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혼자 잠드는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잠이 오지 않아 대청마루에 나가 앉았다. 새해 첫 날의 달은 휘영청 밝아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어디 가세요?]
[상석리에 초상이 났다고 해서 도와주러 가는 길이오]

  도토리묵 장수가 두꺼운 잠바에 방수 바지를 입고 우리 집 앞을 지나가길래 반가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초상집에서 무엇을 하려나..하는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가 녹녹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냥 다녀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몇 걸음 가다가 할 말이 있는 듯 멈칫 하는가 싶더니 가버렸다. 요즘 도토리묵 장수는 똥 마려운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번에도 그냥 가는 걸 보니 다음에 꼭 물어봐야겠다.

  날이 아무리 추워도 울산댁네 장 닭은 어김없이 새벽을 알려주러 날아온다. 처음엔 나에게 복수하려고 그랬던 것 같지만, 요즘엔 아예 아침 산책 코스로 잡은 듯하다. 해도 뜨지 않아 어둡기만 한데 5시가 좀 지나자 우렁차게 소리를 내지른다. 문풍지로 창문을 막았어도 소리는 들어오니 형들도 결국 일어났다. 우리 셋은 옹노를 확인해보려고 산 속 길로 들어갔다. 형들의 말에 따르면 눈이 쌓일 경우 짐승들은 길을 잃지 않으려고 한 번 밟은 길로만 계속 다녀 눈을 다져놓기 때문에 알아보기 쉽다고 한다. 그런 길목에 옹노를 설치해야 100% 성공한다고 비결을 알려준다. 하여 반 년 동안 열심히 산책을 다닌 나로서도 처음 보는 곳으로 갔다.

[거봐! 잡힐 거라고 했지!]

  셋째 형은 신나서 야호 소리를 낸다. 마지막에 헉헉거리며 도착한 나는 옹노를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뒷발이 걸려 옴삭 달삭 못하는 너구리다. 몸길이는 대략 50센티 정도로 여우보다는 작아 보이는데 입술 끝이 뾰족하다. 둔갑 너구리가 아닌 본래의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라 이놈이 과연 내가 아는 그 자매인지가 확실치 않았다. 언제 걸렸는지 기진맥진해 옆으로 누워 있어, 손이 닿아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대응 하지 않는다. 열심히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모르겠다. 하지만 단 1% 라도 가능성이 있으니 죽이거나 잡아먹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옹노에서 조심스럽게 풀어 집으로 데려왔다. 형들은 구워먹을 생각에 장작도 준비하고 솥에 뜨거운 물을 올리며 칼도 가는 등 바쁘게 움직이는 데 나는 눈치를 보다가 너구리를 들고 수로를 넘어 도망쳤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셋째 형의 목소리가 어이가 없는 듯하다. 하긴 나라도 동생이 잡은 짐승을 들고 사라지는 데 안 그럴까 싶다.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마음에서 지우고 가장 가까운 단골 보건소로 뛰어 들어갔다. 나와 안면이 있는 의사선생님은 곤혹스러워 하다가 사람의 상처를 처치하듯이 치료를 해주었다. 내 품안에서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늘어져 있는 너구리에게 연민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너구리 아가씨에 대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청산 할매 말처럼 내가 모질게 끊지 못한 결과가 이렇게 새해부터 얽히는 것이니 자승자박이다.

[아저씨~]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어디서 구했는지 야광 같은 묘한 빨강색의 잠바와 검정색 쫄쫄이 바지를 입고 장화를 신은 너구리 아가씨였다. 내 품 안에 있는 것이 그녀가 아님을 알자 안도의 한 숨이 새어나왔다.

[뭐예요?]
[혹시 너의 친구거나 가족일까 했는데..아닌가 보네]
[사람도 친척이 엄청 많잖아요, 우리도 그래요. 영주에 사는 너구리를 다 알면 우편배달부가 됐게요]

  어딘가 이상한 대답이었지만 아무래나 좋다. 새해 첫 날 다친 게 너구리 아가씨가 아니니까.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다친 너구리를 부탁했다. 집으로 가져가면 형들이 결국 먹을 테니 돌봐주지도 못할뿐더러, 이 이상 다른 너구리와 안면 트고 싶지 않다. 너구리 아가씨가 잘 가는지 잠시 지켜보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포기가 빠른 형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다른 고기를 석쇠에 구워먹는 중이다. 셋째 형은 상추쌈을 입에 넣다가 나를 보고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마음에 혼자 먹으려고 숨겨 두었던 자연산 송이와 동치미 국물을 제공했다.

[다시 합칠 생각은 없냐?]
[그냥..지금이 좋아요]

  첫째 형은 자신의 이혼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나는 아직 젊으니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하란다. 그는 같은 여자와 두 번 이혼한 특이한 전력이 있다 보니 나에게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하지만, 셋째 형은 이렇게 시골에 처박혀 살지 말라고 성을 냈다. 그가 보기에 나는 딱 홀아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말을 들으며 형제들에게 내가 학마을을 왜 좋아하는지, 여기서 사는 게 어떤 느낌인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서울처럼 사람만 있고 지성이 가득한,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내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녁을 먹은 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라고 내 등을 두드려준 후 학마을을 나서는 형제들에게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다음에는 모두 함께 와]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어 방안으로 들어와보니 책상 위에 작은 봉투가 보인다. 그 안에는 막내에게 주는 용돈, 즉 형들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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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2009-09-2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제란 떨어져 있어도..항상 서로를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동생에게 주는 용돈..행복하겠어요

새독자 2009-09-23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편부터 쭉 읽었습니다. 다음편이 궁금해서..쉬고 내일 읽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 편 한 편이 머리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졌습니다. 작가님은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시는 것 같이 글을 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