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들이 요즘 새벽부터 사라져서 해가 질 무렵에 돌아오신다. 겨울은 농번기라 얼마 전에 지어진 마을 회관에서 고스톱을 치시며 노셔야 되는데 어디론가 우르르 갔다가, 다시 우르르 나타나신다. 고로 이 마을에는 버버리 할배와 나만 있는 셈이다.

[할매, 어디 다녀오세요?]
[봉황산에 갔다오지]
[이런 겨울에 왜요?]

  할매들은 아르바이트를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논밭이야 겨울에는 놀려야하고, 방안에서 짚신을 짜던 것도 고리짝의 일이라 불러줄 때 가서 일하면 돈도 벌고 좋지 않냐고 하신다. 게다가 일하던 사람이 놀면 병난다나. 아무튼 할매들은 새벽에 봉황산에 가는 봉고를 타고 국화 꽃순 따기 아르바이트를 한 뒤, 일당 4만원을 받아 저녁에 오신다. 요즘 갈 곳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마땅치 않아 심심하던 차에 할매들의 제의를 받자 같이 가서 일하기로 했다. 

  새벽 5시에 정자 앞으로 가니 수건 달린 모자에 장갑까지 갖춘 할매들이 나를 기다리셨다. 털털거리는 봉고가 새벽을 뚫고 들어와 나는 보조석에 앉았다. 운전기사는 도로를 무법자처럼 내달린다. 살짝 보니 커브길인데도 80의 속도다. 언젠가 티비에서 보니 도시보다 시골에서 대형 사고가 더 잘난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그동안의 경험에서 보자면 폭주족들이 많고 음주운전자들이 넘치는 세상이 바로 시골이기 때문이다. 도시처럼 마을, 마을마다 버스가 많고 택시가 잘 연결 되는 게 아니다보니 시내에 술을 마시러 나갈 때도 차를 가지고 가고, 조금 알딸딸해도 룰루랄라 몰고 온다. 또한 왕복 2차선 도로가 대부분인데 앞 차가 60으로 규정 속도를 잘 지키고 가면 빵빵 소리를 내며 짜증을 내다가 중앙선을 넘어 추월하여 달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너무 잘 아는 길이니 속도를 안 줄이는 특성이 있다. 학마을 주민의 90%를 태운 이 봉고도 평균 100에서 120으로 달려 1시간 거리를 25분 만에 도착하였다. 나는 문이 열리는 순간 보조석에 앉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휘적휘적 내렸다.

[국화를 겨울에도 재배하나요?]
[죽는 사람이 천지삐가리인데 계절 가릴게 있나]

  처음 보는 분이지만 시골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 내 옆에서 국화 꽃 눈을 따시는 할매에게 물어보았다. 그 분은 숙련된 기술자인지 손은 국화꽃을 골라 정교하게 따면서도 쉴 세 없이 이야기를 하셨다. 국화도 종류가 여러 가지이지만 장례식장에서 쓰는 흰 국화는 계절을 안 따지고 수요가 많다. 사계절에 다 필요하다보니 겨울에는 이렇게 난방을 하는 비닐하우스에서 기르는 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밤차로 대도시의 꽃 도매 시장에 가져다주면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서 국화 농사를 짓는 사람의 경우는 지난해에 순이익만 7000만원이라고 하니 내가 하고 싶을 정도다.

[권선생, 시엄시엄 해. 병 나]

  빨간 양옥집에 사시는 황주 할매가 귀띔하셨다. 초보자란 게 보통 일은 못하면서 열심히 하기 때문에 혼자 얼굴이 빨개지고 땀을 삐질 삐질 흘리기 마련이다.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확 밀려온 지독한 국화 향기에 적응이 안 돼, 숨을 소리 내어 쉬다보니 남들이 보기에는 딱 병나게 생겼다.

[그래도 지금이 여름보다 좋아. 하우스 안이 얼마나 더운지 온 몸이 땀에 절어]

  나를 위로하는 할매의 말이지만 겨울인 지금도 비닐하우스 안은 덥다. 2시간을 내리 해보니 국화 꽃눈 따기란 게 절대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참하고 실한 국화를 피우기 위해서는, 꽃눈 여러 개가 동시에 올라오면 가운데의 크고 좋은 것 하나만 남기고 모두 따버려야 한다. 그래야 영양분이 결집돼 상품성이 좋은 국화가 탄생된다. 처음 순 따는 것을 알려준 여주인은 힘들이지 않고 하려면 두 손으로 꽃을 바치고 양손의 엄지만을 사용해서 딱 소리가 나게 꺾으라고 했는데 그러려면 허리를 계속 숙여야 한다. 고로 키가 큰 나는 불리하다. 허리가 굽은 청산 할매는 2시간을 해도 아프다 소리를 안 하시는데 나는 몇 개 따고 허리 두드리고, 몇 개 따고 허리 펴느라 더디게 진행되었다.

[아침 드세요]

  안주인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비닐하우스 앞에 지어져있는 임시 거처가 식당이다. 해도 없던 시간에는 모두 몇 명인지 몰랐지만 모이고 보니 제법 많았다. 할매, 할배,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20명은 됨직 하다.

[할만해?]
[돈 벌기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열심히 해서 돈 값은 해야죠]
[권선생은 역시 배운 사람이라 다르네]
[일이 많이 힘들어서 저 사람들 오래 못하고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아요. 마을 어르신들이 훨씬 좋은데..수가 적어서..어쩔 수 없이 저 사람들을 써요]

  안주인은 밥을 퍼주며 알려주었다. 그들은 머슴밥이라고 부를 만큼 꾹꾹 눌러 담은 밥을 열심히 먹었다. 나 역시 새벽부터 빈 속에 일해서인지 밥을 평소의 두 배나 먹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1시까지 일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다 자란 국화 따기와 상품성이 없는 것이나 이상한 꽃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뒤돌아보니 오늘 하루만도 아침, 점심, 새참에 막걸리까지 엄청 먹었다. 평소에는 별로 안 먹는데다 끼니도 가끔 건너뛰는데 이렇게나 잘 먹는 내 모습에 놀랬다. 

[이거 가지세요]

  오후 4시 반쯤에 모든 일이 다 끝나자 여주인은 일당 4만원을 주면서 상품성이 없어 한쪽으로 버려진 국화를 건네주었다. 집에 가져가서 꽃꽂이 삼아 화병에 꽂어두는데 꽃향기가 퍼져서 숙면에 좋단다. 해서 생각지도 않게 한 다발 정도 얻었다.

  아침의 그 공포 봉고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락에 올라가 사방을 뒤져 화병으로 쓸 만한 도자기를 찾았다. 너구리 아가씨에게서 받은 것들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흰 국화를 담기에 나쁘지 않다. 깨끗이 안을 부시고 물을 채워 국화를 층층이 담으니 나름 작품이다.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책상 위에 화병을 올려놓고 그 옆에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를 두었다. 고된 일과 후에 술 한 잔이라고 중얼거리며 국화꽃들을 향해 건배를 제의했다. 혼자 마시는 술에 국화가 벗이라니..나름 풍류가 있지 않은가. 술을 한 잔 마시고 내려놓는데 국화꽃들이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방울꽃들처럼 살랑살랑 움직이는 게 참 귀엽다. 자세히 보니 파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며 바람을 솔솔 일으킨다. 흰 국화꽃잎에 파란 가루가 떨어진다. 추상화가도 못 그릴 명화처럼 느껴져 그것을 축하할 겸 또 한 잔의 술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데 연적에 나비가 없음을 알았다. 평소에는 날개를 펴고 연적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던 그 나비가 국화꽃 주변을 날아다니며 유혹을 하니, 거 참 한가롭고 매력적인 밤이다. 문득 이 나비가 다른 때도 꽃이 있었으면 날아다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벌떡 일어나 놋대접에 물을 한가득 퍼왔다. 개구리 벼루 안에 조심스럽게 붓고 나와라..나와라..중얼거리며 술 한 잔을 또 따라 마셨다. 나비가 꽃을 찾아 나오는데, 물 좋아하는 개구리가 벼루에서 탈출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렇지!]

  시간이 조금 지나니 못 버티겠는지 벼루 꼭대기에 앉아 있던 개구리가 다리를 쭉쭉 펴며 기지개를 켜더니 물속으로 퐁당 들어간다. 뻐끔뻐끔 입을 벌리며 이리 저리 헤엄 친다. 나비가 날아다니고 개구리가 헤엄치는 방에 국화 향기가 가득하니 올 해 최고의 술상이다. 기분이 좋아 술을 모두 비우고 잠이 들었다.

  그 뒤로도 열심히 국화 농장에 다녔다. 일에 적응이 되고 공포 봉고에도 제법 익숙해져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다보니 살이 2킬로나 쪘다.

[강단이 있으시네요]

  겨울 국화가 모두 정리 되자, 다음번에 또 오라는 말과 함께 여주인은 일당에 보너스 만원을 더 얹어 주었다. 왠지 서운하고 섭섭해지려해 국화가 포장된 박스를 몇 번 쓰다듬은 뒤에 발길을 돌렸다. 봉고는 농장 입구에서 사람을 태우고는 나에게 어서 오라며 붕붕 거렸다. 나는 눈을 만지다가 조수석에서 잠이 들었다.

[권선생..권선생..]

  어느 할매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흔들며 부르는 게 느껴진다. 귀찮지만 집에 도착했구나 싶어 눈을 떴다.

[몸은 괜찮소?]

  도토리묵 장수와 경찰이 나를 바라본다. 알고 보니 병원이었다. 공포 봉고가 여느 때처럼 학마을로 힘차게 달려가는데 오른쪽에서 나오던 농기계랑 교통사고가 났다. 다른 곳은 괜찮았는데 내가 앉은 조수석으로 농기계의 팔 부분이 유리를 뚫고 들어왔고, 내가 옆으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병원에 후송되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이가 도토리묵 장수여서 경찰이 증인 삼아 함께 데려왔다. 결국 실제 환자는 나 한 명인데 참고인에 증인까지 몰려서 병원은 와글와글 시장 통이다. 엑스레이 등등의 검사를 하였으나 별 다른 이상은 없었고 머리에 유리 파편이 많이 박혀 있어 남자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아야 한 일 빼고는 멀쩡히 걸어 나왔다. 사고 순간에 농기계가 나를 친 것도 아니건만 왜 옆으로 쓰러졌는지 알 수 없다.

[욕 봤소. 몸 잘 추스리소]

  도토리묵 장수는 경운기로 집까지 데려다 주고는 푹 쉬라며 돌아섰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술 한 잔 대접하겠다고 붙잡아 방 안으로 끌고 갔다. 풍류 좋은 한 때를 자랑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어때요?]

  아직 국화가 싱싱하여 나비가 날아다니고 개구리가 벼루 안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도토리묵 장수에게 감상을 물어보았다.

[술 맛 나겠구먼]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국화 향기 가득한 방 안에서 무릉도원을 거니는 보살처럼 그날 밤이 샐 때까지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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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바다 2009-09-2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 찌푸린하늘..금새 비가 쏟아지겠죠..아침에 출근해서 궁금한맘에 일이 제대로 안될지경이 되엤네요..점심에야 겨우 짬이나 후딱 읽고 다시 천천히..파란 나비나 개구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않겟죠..점점 도토리묵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해지네요..바쁜 일상중에 잠시 휴식이되어주어 점말 감사합니다.낼 뵐께요..술 넘 많이 드시지마세요

최현진 2009-09-2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아침부터 오더니 지금도 내리네요. 사람의 기분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걸 또 한 번 느낍니다. 내일은 비가 안 오길 바라며..참..도토리묵 장수는 나중에 외전에서 정체가 밝혀집니다(외전까지는 아직도..쭉 달려야해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