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이혼 할 때 팔려고 내놓았던 집이 마침내 계약이 되어 내 통장으로 반을 넣었다고 한다. 이혼한 후에도 이렇게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전부 가지라고 못하는 게 미안하다. 시간이 나면 학마을에 놀러오라는 말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다들 어디 가셨어요?]
[온천 여행]
[할매는 안 가시고요?]
[이래가지고 어디를 가!]
청산 할매는 얼마 전에 넘어져서 팔에 깁스를 하셨다. 그덕에 혼자 남으신 걸 둔하게도 굳이 물어본다.
[그럼 학마을에 할매랑 나뿐이네요]
[왜?]
[어제 사다 논 고기 구워먹을까 했거든요]
[권선생, 팍팍 쓰지 말고 돈 아껴. 늙으면 돈 있어야지 안 그럼 초라해]
주민자치센터에서 단체 온천 여행을 보내준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슈퍼에 붙은 포스터의 날짜가 바로 오늘이었다. 그동안 나는 너구리 아가씨의 행보에 정신이 팔려 그 행사를 잊고 살았다. 겨울이 되자 너구리 아가씨는 동면을 하는지 벌써 열흘 정도 오지 않는다. 물론 도자기를 받은 이후로는 모습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림자처럼 와서 고구마와 도토리묵만 두고 갔다. 그것도 이제는 끊어져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별 문제 없이 잘 지내는지..
[받아 먹지 말라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
[저 안 먹었어요. 전부 장군이랑 예쁜이 줬어요]
[너구리가 보기엔 그릇이 비어 있으니 권선생이 마음을 받아주는 걸로 알텐데.. 쯧쯧]
그 순간 10년은 됨 직한 묵직한 한숨이 나왔다. 할매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 하신다.
[일희일비하지 말아, 시간이 가다보면 방법이 있겠지]
할매의 힘들게 걷는 뒷모습을 보자니 내가 마음에 깁스를 한 느낌이다. 너구리표 깁스.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깁스.
[여기, 영주 시내에요]
[어? 그래? 데리러 갈게. 나오지 말고 터미널에서 기다려]
[아니. 택시 탔으니까 괜찮아요. 학마을이라고 하면 되죠?]
[응]
삼일 뒤에 아내로부터 영주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내나 너구리 아가씨나 갑작스럽게 오는 건 똑같다. 나는 얼른 마당을 정리하고 방을 걸레로 닦은 뒤에 부엌을 청소했다. 결혼 생활을 할 때는 집안 일을 한 적 없으니 아내가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뭐..그럭저럭. 나 촌 아저씨 다 됐어]
[그래 보여요]
우리는 나란히 다리 위를 건너가며 안부 인사를 했다. 본지 반년이 훌쩍 넘어서일까, 그녀가 아내였다기 보다는 오랜 친구같다. 마을 제일 끝의 우리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마당을 돌아다니기다가 수로를 내려다본다. 오늘도 장군이는 어김없이 물속에서 나를 기다린다. 아내는 웃으며 나와 장군이를 번갈아 본다.
[많이 편해진 것 같네. 잘 웃고..]
[응. 당신도..]
나는 장작불을 준비하며 말했다. 청산 할매랑 같이 쇠고기를 구워 먹기로 하고 그녀는 수돗가에서 송이를 씻고 상추를 다듬었다.
[할매, 우리가 가야하는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얻어먹는 사람이 와야지, 그럼 쓰나]
할매는 예쁜이까지 데리고 오시느라 지치신 듯 의자에 앉으시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내를 인사시키고 할매가 가져온 막걸리와 함께 지글지글 구워지는 쇠고기를 먹었다. 냉장고에서 좀 된 것이지만 송이도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다.
[아저씨~]
할매가 팔이 아프시다며 돌아가시자마자 너구리 아가씨가 수로 너머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아내와 너구리 아가씨가 같이 나타나기로 약속이라도 했나보다. 서로 어떻게 인사시킬지 고민 하는데 이번에는 자장면을 배달하던 도토리묵 장수도 왔다.
[냄새가 좋소]
[아..와서 같이 드세요. 여긴..아내, 여긴..친구..]
꼭 도토리묵 장수에게 말한다기 보다는 모두에게 뭉뚱그려 소개했다. 아내는 무표정이고, 너구리 아가씨는 뚱해보였으며, 도토리묵 장수는 두 여자를 번갈아 응시했다. 우리는 울산댁네 장 닭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말없이 고기를 먹었다.
[여기..참 재미있는 곳이에요. 왜 당신 마음이 넉넉해졌는지 알겠어요]
[내가 넉넉해졌어?]
[예전엔 찌푸리고 힘든 표정이었는데..지금은 보기 좋아요]
아내를 바래다주려고 걸어가는 길에 고사 직전의 학나무를 쳐다보던 아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집에는 처음보다 더 뚱한 표정을 짓는 너구리 아가씨와 말없이 앉아 있는 도토리묵 장수를 두고 나왔다.
[다음에 또 와]
[고마워요]
아내는 미리 불러둔 택시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보다 더 추워진 듯 한 느낌에 손을 비비며, 이번에는 너구리 아가씨 차례다..라고 마음속에서 기합을 넣으며 집으로 성큼성큼 돌아갔다.
[흑흑]
울음 소리가 들려 수로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지금 마당의 광경은 이러하다. 고기는 숯이 되도록 타는 중이고, 장군이와 예쁜이는 입맛을 다시며 기회를 노린다. 너구리 아가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운다. 도토리묵 장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다. 내 집인데도 무엇 때문인지..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아저씨...]
내 기척을 느낀 너구리 아가씨는 멜로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뛰어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토리묵 장수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여자란 성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내가 이해하기엔 힘든 그 무엇이다. 둘 다 정말 알 수 없는 어려운 존재다.
도토리묵 장수는 마침내 울음을 그친 너구리 아가씨가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행동을 바르게 해야지. 그래서야..]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면서 어두운 도로로 걸어가 버렸다.
숯이 된 고기는 장군이와 예쁜이가 가져갔는지 이미 불판에 없다. 갑자기 만사 귀찮은 생각에 전부 그대로 두고 방으로 들어가 벌러덩 누웠다. 바람이 창문을 덜컹덜컹 흔든다. 너구리 아가씨가 문풍지를 잘 붙여주어 바람은 들어오지 않는다.
[아..도자기들..또 못 돌려주었네]
아직도 책상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가 나를 보고 웃는다. 울고 있던 너구리 아가씨가 신경 쓰여 잠이 오질 않는다. 문득 창문을 보니 바람은 그치고 올해의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