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에 걸렸다. 덕분에 새해가 다가오는 데 아무 준비도 못하고 자리보전 중이다. 오늘까지 며칠 째 누워있는 건지, 얼마나 잔건지 도통 모르겠다. 멍하게 눈을 뜨면 청산 할매가 보이고, 또 감았다 뜨면 슈퍼 주인 할매, 그 다음엔 도토리묵 장수까지 골고루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건지, 각각 온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한데다가 열이 나고 땀이 흐른다. 정말 무시무시한 독감이다.
[금방 털고 일어나긴 힘들겠어]
[권선생, 먹기는 하남?]
[생선 대가리 마냥 빼짝 한 게 먹기는 뭘 먹어, 아따 봐도 모르면 눈은 왜 달고 있어?]
나를 놓고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한다. 그동안 어떻게든 먹을 때 되면 먹었건만 할매들 성에는 안 차나보다. 나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 그저 눈만 떴다 감았다 할 뿐이다. 두통이 점점 심해진다. 잠시 후 어르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감기에는 이런 환경이 필요한 법인데,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콜록 콜록]
목구멍 깊숙한 곳을 치고 나고는 기침이 온 몸을 흔들어 놓는다. 삭신이 쑤신다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이다. 계속되는 기침에 끙끙 거렸다.
[물 좀 드세요]
기침이 빠져나가자 이어서 찾아오는 목 타는 느낌에 더듬더듬 물그릇을 찾는데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내 손에 시원한 물 잔이 쥐어졌다. 눈을 천천히 돌려 얼굴을 보았다. 너구리 아가씨다. 언니의 말대로 홀쭉하고 여윈 얼굴이 그동안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걸 한 눈에 알았다. 연민이 느껴져 모습을 찬찬히 살피는데 머리에 붉은 돌? 붉은 콩? 장식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걸 잔뜩 달고 앉아 있다.
[머리에..뭐야?]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드세요]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리고는 이어 약을 건넨다.
[감기에 좋은 약이에요. 생약이니까 잘 씹은 후에 넘기세요]
오른 손을 펴게 하더니 빨간 헝겊 주머니에서 동그랗고 검은 알들을 5개 정도 올려놓았다. 환약이다.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자니 쓴 맛이 퍼진다. 좋은 약은 쓰다고 한 것처럼 씹으면 씹을수록 더 쓰다.
[계속 먹어주면 감기에 정말 좋아요]
너구리 아가씨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너는 몸이 좀 나아졌어?]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이 반쪽인데 모를 수야 있나]
[괜찮아요. 그럭저럭]
그녀는 나를 다시 눕힌 후 새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주고 물러갔다. 그리고 나니 나는 다시 혼자다. 하도 자서인지 수마는 태평양 저 너머로 간 듯 하여 고된 몸과는 달리 정신은 또렷하다. 문득 처음 내려온 날 잠들기 전에 느꼈던 서글픔과 외로움, 고독이 밀려온다. 잊고 지냈던 약한 감정들이 내 몸을 슬금슬금 잠식해온다. 사람은 아플 때 가장 약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방 안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놓고 간 다양한 음식들이 보였다. 만약 서울에 계속 있었다면 원룸이나 하숙집 같은 곳에서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앓다가 죽어갈지도 모른다.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땀을 많이 흘려서 당분간 일어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땀이랑 소변은 또 다른 차원인지 느낌이 계속 온다. 하는 수 없이 문을 열고 차디찬 대청마루로 나갔다.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때렸다. 간신히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처마 밑의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치켜들고 실눈을 떠 초점을 맞추어보니 거꾸로 매달린 개구리들이다.
[뭐지?]
나는 동물의 왕국을 보는 기분으로 눈만 껌뻑껌뻑하며 숫자를 셌다. 거꾸로, 한 쪽 다리로만 처마에 매달려 서커스를 하고 있는 개구리들은 10마리 쯤 된다.
[왜 나와 있어? 감기 더 들게..]
청산 할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들어 서커스 개구리를 가리켰다.
[여기선 병이 나면 저런 놈들이 보여]
답을 알고 나니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아도 궁금증은 풀렸다는 안도감에 방으로 복귀했다.
[할매, 저런게 있으면 계속 아픈 거 맞죠?]
[그럼, 싹 사라져야해]
할매는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이 나는지 확인하셨다. 나는 다시 축축한 요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앉아 있던 할매는 푹 자라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아저씨, 이거 드시고 주무세요]
언제 잠들었는지 열심히 밭을 달려가던 꿈에서 깨어났다. 너구리 아가씨가 머리와 어깨에 눈을 가득 얹은 채로 숨을 고른다.
[추울 텐데..옷 좀 따뜻하게 입지..]
아직도 반팔에 반바지라 한 마디 했다. 내 말에 객쩍은 듯 웃으며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는 눈을 털어냈다.
[아..옷을 바꿔 입었어야 하는데..제가 아직 서툴러요]
그녀는 왠지 얼굴이 더 어두워보였다. 눈가에 살짝 눈물도 어린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보았다.
[언니가 뭐라고 했니?]
눈 속을 헤매던 밤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물어보니 너구리 아가씨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연다.
[아저씨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그런 말을 들었어요. 제가..그동안 그랬나요?]
너구리 아가씨가 눈을 피하며 말소리를 죽였다. 나는 힘없는 팔을 꺼내 다리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마음은 머리를 쓰다듬고 싶지만 거기까지 올릴 수가 없다.
[아니야..덕분에 즐거운 걸..게다가 이렇게 병문안도 와주니..고맙지]
너구리 아가씨는 그래도 개운하지 않은 얼굴이다. 내 팔을 다시 이불 속에 넣어주고는 일어나 책상 위에 있는 도자기들을 든다.
[그건 왜?]
[가져가려고요]
[지금?]
[네. 여기에 두면 아저씨가 곤란한 거 알아요]
[예쁜 것들인데..그냥..두렴]
나는 기침을 하며 말했다. 너구리 아가씨의 의아한 표정에 계속 보다보니 예뻐서 정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그렇다기보다는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내 말의 속뜻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 잠시 도자기들을 바라보다가 두고 갔다. 문이 열렸을 때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서커스 개구리가 한 마리 사라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에게 받은 환약을 씹어 먹고 잠을 청했다.
약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잠만 들면 꿈의 퍼레이드다. 어떤 꿈에서는 꽃상여를 매고 있고 다른 꿈에서는 도토리묵 장수와 개를 잡고 있다.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꿈은 장군이와 학 알을 놓고 싸웠다.
[썩 사라져!]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린다. 좀 전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움직이기가 싫어 천장을 보고 있는데 청산 할매가 오셨는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방문을 발로 차 열고 내다보니 팥을 손에 쥔 청산 할매가 수로 쪽을 향해 큰소리를 내신다.
[할매, 무슨 일 있어요?]
[사람 기가 허하면 미물들이 꼬여, 권선생 빨리 일어나야지, 안 그럼 자꾸 와]
[혹시, 반바지 차림이었어요?]
[뭔 소리야, 짐승이어도 이런 날엔 반바지 안 입어]
할매는 죽을 끓였다며 방 안에 놓고 돌아가셨다. 잠깐 올려다보니 서커스 개구리가 두 마리 사라졌다. 점점 나아가니 기분이 좋아진다.
[아저씨~]
얼마 후에 문 앞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발로 문을 차서 열였다. 머리카락에 팥이 잔뜩 달려있는 너구리 아가씨가 서 있다. 좀 전에 청산 할매가 쫓아낸 미물이 누군지 알았고, 더불어 지난번에도 머리에 붙어 있던 붉은 돌은 팥이었다.
[아프지?]
[그럭저럭 견딜만 해요]
[그래도..아플 텐데..안 와도 돼]
[아저씨가 어떠신지 봐야 마음이 놓여요]
나는 방 안에 누운 채로, 너구리 아가씨는 밖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산 할매가 올라치면 바로 도망갈 준비를 한 듯 긴장하며..
[다음에 또 올게요. 약..놓고 가요]
너구리 아가씨는 가는 게 좋겠다 싶은지 약이 담긴 붉은 주머니만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모습을 감췄다. 팥을 잔뜩 맞고도 찾아와주는 게 미안해진다. 감기가 나으면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라고 생각하며 쓰디쓴 환약을 입에 물었다.
밤이 되어 창밖도 어둠만 보이는 데 대청마루에서 뭔가 살금살금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또 산신인가 하며 내가 그동안 만난 이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무엇이든 간에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방문을 조금만 열고 밖을 염탐했다. 예상 외로 너구리 아가씨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찾아온 게 아닌 듯 하다. 대롱거리는 개구리를 떼어내려고 까치발을 하며 끙끙 거린다. 이제야 스스로 떨어진 게 아니라 저렇게 매일 몰래 떨쳐주는 이가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그녀가 넘어질락 말락 쩔쩔매며 뜯는 걸 지켜보았다. 몇 십 분을 고생하여 두 개를 떼어내고는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는 게 순간 예뻐 보인다. 내 아내도 여기 있었다면 저렇게 해주었을까? 청산 할매도? 너구리 아가씨가 대청마루를 내려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걸 귀로 들으면서 방문을 살짝 닫았다. 내일 아침에 나가서 보면 아마 서커스 개구리가 4-5마리 정도만 남아 있을 것이다.
[일어나면..쇠고기나 구워서 같이 먹자고 할까?]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좀 더 세차게 불어서 나머지도 다 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