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이 약해 달리기를 오래 못하다보니 다리에 들어설 무렵에는 뛰기를 포기하고 걸어가는데, 새지가 반대편 구석에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응. 왜?]
[이 마을에 새로 들어온 요괴에요]
[사람 같아보이는데..]
[옷을 저리 입고 삿갓을 써서 그런거죠]
[왜 삿갓을 쓴거야?]
[해가 싫다나..저도 잘 모르지만 저 멀리 서역에서 왔데요]
[오호..]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고구려를 벗어나 다른 나라에 가본 적이 없어 항상 궁금한데, 내 주변엔 경험담을 들려줄 이가 없다.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니 다리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대나무 막대기에 긴 줄을 매달아 놓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기 위해 요괴의 옆으로 걸어가는데 우리의 기척을 느꼈는지, 삿갓이 옆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서로 매우 가까워졌을 때, 요괴가 삿갓을 들어올렸고, 그와 새지가 눈을 잠시 마주친 후,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침이 고이는 걸 느끼자마자 걸음을 서둘렀다. 역시 새지의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느낀게 틀림없다. 새지를 데리고 있으면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번진다는 것. 그 덕분에 여러 번 목숨을 걸고 도망치거나 싸워야 했다. 이 요괴는 수행을 제법 했는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낚시대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살짝 확인하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늦었다~]
[죄송합니다. 서두를께요] 

대장간 앞에는 떡보가 어느새 도구들을 꺼내 진열하는 중이었다. 그의 이마에 벌써 땀이 맺혀있는 게 눈에 들어와, 미안한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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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잠이 들었다. 나를 부르는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자 내가 저지른 추악한 짓을 처음부터 다시 볼 수 있었다. 피를 마시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고, 아줌마를 때리고, 스승을 깨물어 피를 핥은 일. 나를 둘러싼 암흑이 조여와 쉬지 않고 내뱉은 위액을 무릎까지 차오르게 만들고, 이어 허리를 지나 목에 다다를 때에도 고통스러운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시큼한 액체가 코와 눈을 잠식할 때 나는 영원히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시영아..시영아..]

스승님의 목소리다. 위액의 바다속을 유영하듯 다가오는 그의 낮은 음성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이윽고 내 몸 근처에 도착한 그의 말이, 그 한 단어 한 단어가 내 몸을 감싼 후 잡아당겼다. 잠들지 말라고, 깨어서 용서를 빌라고..

엄마가 나에게 한 말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사랑한다고 속삭여준 단어다. 그것은 외롭고 불안한 내 마음에 한 가닥 희망이 되어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이 또한 뱀파이어가 되게 만든 동기였다. 그리고 뱀파이어가 된 후에도 사랑은 내 마음 속에서 또 다른 싹을 틔웠다, 스승님에 대한 연정이라는 모습으로. 그러나 나는 몹쓸 짓을 저질러 내 사랑에 스스로 상처를 입혔다.

[몸은 좀 어떠니?]

이마에 닿는 손길을 느낀 후, 무거운 눈을 천천히 뜨자 천장에 붙여둔 해바라기들이 보였다. 내 방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스승님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스승님이 왜 미안하세요? 뭐 때문에요?]

소리를 질렀다. 미안함, 죄송스러움,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포기 못하는 짝사랑에 가슴이 쿵쾅거리다가 조금도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 스승님의 말 한마디에 폭발한 것이다. 내 갑작스러운 반응에 그는 쭈뼛거리며 손을 거뒀다.

[내가 너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까]
[말씀하셨던들 제 행동이 달라졌을 것 같진 않아요]
[아니, 넌 달랐을 거야. 난 그렇게 믿는다]
[그건 제가 아니죠, 스승님이 바라는 뱀파이어 일뿐. 나는 본능만 남아있고 자기절
제가 전혀 안되는 미친 뱀파이어에요. 현실이 그렇다고요!]

방안이 마침내 고요해지자, 오로지 나와 스승님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의 머뭇거리는 듯한 행동은 내 눈물을 보았을 때 멈췄다. 잠시 후 스승님은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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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진실

 

 잘 기억나지 않는 꿈들에 시달리다가 잠을 설쳤다. 새벽이 다가오는 회색 하늘을 보고서야 얼핏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아침을 알리는 새들의 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각이다. 나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를 살짝 살펴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부엌에서 간단한 상을 차려 문 옆에 두고는 싸리문을 열고 나섰다.  

[도련님, 아침 밥도 안 먹고 가요?] 

어느새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새지가 투덜거린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주머니 속에서 머리를 내밀려고 용을 쓰는지 울룩불룩하다가 쏙..얼굴을 내밀었다.  

[늦었어. 아침이 먹고 싶었으면 좀 깨워주지 그랬니?] 

[전 아직 어린 새라 잠을 푹 자야해요. 도련님을 깨울 정신이 어디 있겠어요?]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폼이 얄미워 속도를 확 올려 뛰기 시작했다. 미리 대비를 하지 못한 새지가 옆으로 꼬꾸라지며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씩 웃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난 해, 나는 새지를 만났고, 처음으로 요괴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내 세계가 요괴와 인간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특히 요괴들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오로지 나에게만 보이니 그들의 장난에 당해도 어디에 말도 못할뿐더러, 일하는 곳에서까지 곤란한 문제가 종종 생겼다. 그래서 새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역시 그저 스쳐지나가는 요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이렇게 가족이 되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어느새 나는 새지가 없는 일상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변했다.  

[저기~저 놈 보이세요?] 

체력이 약해 달리기를 오래 못하다보니 다리에 들어설 무렵에는 뛰기를 포기하고 걸어가는데, 새지가 반대편 구석에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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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생각지도 못했던 폭력이라 무방비 상태의 아줌마는 거실 끝까지 날아가 큰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딛혔다. 나는 머리를 숙여 프릭스가 흘린 피를 핥았다. 머릿속이 뻥 뚫리는 기분과 함께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피는 마셔본 것 중 가장 달콤하고 미열이 오를 만큼 매혹적이었다. 좀 더 좀 더..라는 마음에 그를 스승의 품에서 뺏으려고 달려들었다.

[시영아! 민시영!]

한 손에는 프릭스를 든 채 달려드는 나를 막으려 손을 뻗은 스승이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순간 나는 휘청하며 미끄러졌다. 스승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오지만 내 눈과 신경은 피를 흘리며 기절한 프릭스에 꽂혀 대답하지 않았다.

[아가씨, 안돼요]

아줌마가 달려와 내 몸을 뒤에서 감싸 앉았다. 그러나 아줌마는 반인반뱀이고, 나는 순종 뱀파이어라 힘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1초도 안 돼 다시 아줌마를 집어던진 후, 나는 성난 황소처럼 스승님을 덥쳤다.

[정신 차려! 이건 그냥 프릭스가 아니야.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기억해내!]

스승님은 거실 구석으로 프릭스를 밀어보낸후, 두 손으로 내 양 팔을 잡았다. 뱀파이어 대 뱀파이어. 그러나 그는 내가 알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베테랑이고 전사이며, 나는 이제 막 뱀파이어 계에 입문한 초짜이니 애당초에 싸움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가슴에 안고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들며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나는 오로지 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물어 뜯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스승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슴에서 뜯어낸 살점들이 그와 나 사이의 공간으로 떨어졌다. 이어 그의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걸신들린 듯 그 피를 핥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떼어내지 않고 오히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영아..시영아..]

신음 사이로 들리는 내 이름..
그의 고통과 나를 부르는 마음이 자꾸만 내 머리 속을 흩트려놓았다. 그의 슬픈 목소리는 피에 대한 흥분에 차가운 물을 쏟아 부었다. 그에게 잡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던 이가 조금씩,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침내, 모든 열정과 갈망이 없어졌을 때, 내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스승님의 상처였다.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보이고, 살점이 떨어진 부위가 끔찍하여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것이 내가 한 일임을 깨닫자,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욱..욱..]

그의 바지에, 내 웃옷에 위액을 게워냈다. 그는 그래도 나를 안은 채 그대로 있었다.

[놔주세요..제발..놔주..세..]

차마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거칠게 밀어낸 후, 2층으로 단 숨에 뛰어 올라가 방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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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져 나는 뱀파이어로서 발휘할 수 있는 청각적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내 마음을 고백하면 지금의 상태마저 사라지고 스승님을 볼 수 없게 될까봐 꼭꼭 숨겼지만, 때로는 입 밖으로, 눈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아 항상 조심스럽다. 그러나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잡아주신 손이 생물학적으로는 차가워도, 나의 마음에는 가장 따뜻했고, 어쩌면 조금은 나를 마음에 담아주시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봤었다. 그러나 스승님이 내 마음을 알지만 동시에 곤란해 하신다는 걸 이 대화로 깨달았다. 내 짝사랑은 좀 더 오래, 깊게 묻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지워야할지도..

와장창...쨍그랑..

갑자기 현관문에 달린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졌다. 계단에서 바닥으로 바로 뛰어내려 한 걸음에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더니 스승님과 아줌마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머리를 집어 넣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였다.

[나..돌아..왔어]

그의 희미한 목소리가 머리 속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암흑과 정적. 그는 부르르 떨다가 기절했다.

[스승님, 도와주세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여기로 돌아오기 위해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목숨을 걸었는지 흙투성이 몸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은 그런 나를 잠깐 보신 뒤, 프릭스를 들고 손님방으로 걸어갔다. 내가 그 뒤를 따라가는데 프릭스의 몸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눈은 피에 고정된 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으려고 해도 혀가 그 피를 핥으려고 마지막 관문인 이를 거세게 두드린다. 눈에 핏발이 서면서 벌벌 떨리던 무릎이 꺽였다. 피를 보고 흥분한 나를 아줌마가 말리려고 팔을 붙잡는데 배고픔에 정신이 나간 나는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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