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창비시선 253
문성해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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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문성해 시인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임자

 

취한(醉漢)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 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 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어나간 것 같은

 

지하철역 앞

토큰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 나오는

꼽추 여자들,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시집 <자라. 창비>. 66~67쪽의 시.

 

"눈부신 듯/조심스레 기어 나오는/꼽추 여자들,/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시란 무엇일까. 시인은 누굴까. 삶이 대체  뭘까. 이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궁금증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시와 시인, 시와 삶 사이에 긴장이 들어 있다.

긴장은 팽팽했다가 스르르 무너지게도 한다. 삶은 어쩌면 살아가는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눈에 비치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풍경 속 기계 부품처럼 살다가 사물화가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시인은 시를 삶 속으로 끌어와 고통스러운 진실을 보여준다.

*"삶은, 풍경이라는 거짓말"  이어서 아프고 쓸쓸하고 저릿하다.

​저 꼽추 여자들과 나와 너와 우리를 위해 푸시킨의 시 한 구절을 끌어온다. 심심한 위로가 돼 주길 바라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김기연 작가의 산문집

 

...눈부신 듯/조심스레 기어 나오는 /꼽추 여자들,/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자라다 만 목덜미가/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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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의 옛 그림과 뛰노는 동시 놀이터 신현림 동시 놀이터
신현림 글.그림 / 살림어린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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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시는 절대 어렵고 심각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도 그림을 만만하게 보세요. 놀이니까요.

그림에 대해 전혀 몰라도 돼요. 그림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신현림 시인의 말이다. 이 책<옛 그림과 뛰노는 놀이터>은 사진 찍고 시 쓰는 시인이 우리 옛 그림을 가져와 거기다 아이 마음을 시로 담아냈다.

시인이 꾸민 동시집은 우리가 한 번쯤은 봤음직한 조선시대 그림 스물두 편을 싣고 거기에 쉬운 설명과 그림을 보고 느낀 단어들을 모아 재밌는 동시를 썼다.

 

친근한 그림을 다시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어떻게 동시로 쓸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시인의 기발한 생각을 엿보는 것 또한 이 책의 재미다. 그림 보고 동시 읽고 꿩 먹고 알 먹고다.

 

그중 어미 개와 새끼개를 순하게 그린 이암의 <모견도>, 김홍도의 <서당>, 추사 김정희가 제자를 위해 그렸다는 <세한도>,

 작가 미상의 <까치와 호랑이>에 붙인 동시가 더 좋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시인은 아이들에게 귀띔한다. 감성이 풍부해지고 상상력을 꽃  피우려면 그림을 가까이하라고.  우리 그림은  옛날 조상들의 삶을 보여줘 전통문화를 일깨우고 그림을 보고 자기만의 느낌을 메모해 가다 보면 세상을 보는 안목이 두 겹 세 겹 두툼해진단다.

 

그림에 시를 붙인 것도 좋지만 책 마지막 부록엔 조선시대 회화만 모아 초, 중, 후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정선의 진경산수화, 풍속화, 서민들이 그려서 더 친근한 민화 등 화가와 작품들을 시대별로 보여준다.

 

이 정도라면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우리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떠먹여 주는 셈이다. 시인의 동시집을 보자니 후회스럽다. 한때 어줍잖게나마 그림책 읽고 동시 쓰기를 시도했다가 그만둔  일이 생각나서다. 그땐 그림책에 시 있다는 생각에 동시 몇 편 써 보기도 했었는데 살짝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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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앞에 영화관(롯데시네마 )이 생겼다.
너무 좋다.  혼자서 조조영화를 즐겨보기 때문이다.
그동안 맘이 당기면 부랴부랴 전철을 타고 나가  보곤 했는데
집에서 3분거리니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워도 좋겠다.

휴일이라서 짝꿍이랑 아침 먹고 운동화 끌고 가 봤다.
우리 둘 다 마치 집들이에 초대되어 가는 기분으로 나섰다.


주유소 자리에 1년 남짓 공사한 새 건물로 11월초에  오픈했다.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다.

근동 사람들인지 편안한 복장이다. 엘리베이터 안이 찼다.
4층부터 8층까지 영화 전용관이라 넓고 쾌적하다.
눈도장으로 합격이다.

'내부자들' 을 봤다.
정치인과 재벌회장, 정치깡패, 펜은 칼보다 힘이 세다.
그들 사이에서 펜으로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논설주간, ...

서로 제 이익을 위해 속이고 복수하는 추악하고 더러운 흙탕물 속 미꾸라지들의 몸부림같은 영화다.

조승우는 우장훈답고 이병헌은 안상구로 개성 넘치는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좋았다.
영화의 결말은 다행히 관객의 바람대로 통쾌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기분은 그리 통쾌하지 않다. 별로다.
속 시원하지도 않다. 이런 느낌을 뭐라 할까.
목에 이물감이 잔뜩 남아 있는 것 같은 개운찮은 느낌, 후회했다. 보지 말걸,

새로 입은 옷에 오물이 튄 것처럼 께름칙한 이 기분을 뭐라 할까. 불편한 것이 진실이기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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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은 문장을 필사하게끔 만들어진 책이다. 지난번 서점에 갔을 때 산 책이다. 책속 문장은 그동안 장석주 작가가 읽고 밑줄 그었거나 작가 자신을 물들인 문장이라고 소개한다.

작가는 필사를 이렇게 전한다.
"필사는 느린 꿈꾸기이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이며, 행복한 몽상가다."

톨스토이에서 김애란까지, 책갈피속 손으로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소개한다. 문장들이 그리 길지 않으니 천천히 음미하며 써 봐도 좋을성 싶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가 읽은 책도 있어반갑다. 그 중 김훈작가의 <자전거 여행>은 필사까지는 아니어도 야금야금 곱씹으며 먹었던 책이라서 작가가 소개한 문장을 보자, 나도 읽었고 밑줄 그은 문장이라고 알은 체를 하고 싶어진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보다 한번이라도 보고 말 섞은 사람이 더 반가운 것처럼 오지랖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친다. 바로 이 문장들이다. 겨우내 언 땅이 봄 햇살에 서서히 녹아 부푸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봄풀들

봄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속의 길을 예비한다.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고, 풀어진 흙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풀의 싹들이 흙덩이의 무게를 치받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흙덩이의 무게가 솟아 오르는 풀싹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풀싹이 무슨 힘으로 흙덩이를 밀쳐낼 수 있겠는가. (23~25쪽의 글)

이것은 물리현상이 아니라 생명현상이고,역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풀싹들은 헐겨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 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23~25쪽의 글)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 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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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부근

        정일근 시인​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집<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81쪽의 詩

<시시콜콜> 꽤 오래전에 산 시집인데 이맘때가 되면 꺼내 본다. 시편마다 시인의 맑은 서정이 가을날과도 닮아 있다. 시도 계절을 타는지 모르겠다. 우연히 본 거미집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는 시인을 보고 거기에 마음이 붙잡힌다.

거미를 쫓아내면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못본 채 돌아서는 구절이 따뜻하면서도 고맙다. 어쩌면 시인도 보따리를 싸 여기저기 거처를 찾아 헤매봤거나 지금도 그리 살고 있지 않을까싶어 거미도 시인도 짠하다.

측은지심이란 머리로 계산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그리로 가는 것일까. 가을이 깊어가는 아침에 시인과 거미를 걱정하느라 행간에 머물러 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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