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 숙종실록 - 공작정치, 궁중 암투, 그리고 환국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오랫동안 영국군에 저항하던 프랑스 칼레 시가 항복하던 날.
영국군 칼레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면서 내건 항복조건.
“칼레 시민 대표 6명을 처형해야 한다!”
과연 누가 시민들을 대표하여 죽을 것인가?
서로 눈치만 볼 때, 칼레 최고의 부자가 스스로 자원하고 나선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시장, 부유한 법률가, 귀족이 차례로 나서고,
이들은 이후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았다.
- 지식채널e 中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모으고 있는 몇 안되는 시리즈.
만화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러나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부한 책.

이번 14권은 조선의 18대 왕이었던 숙종 시대의 실록이다.
사실 숙종 시대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이 때는 무슨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거나 전쟁이 있었다거나 뛰어난 위인들이 많이 나왔던 시기는 아니다.
조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연상되리라.
‘장희빈’ 또는 ‘인현왕후’ 또는 ‘무수리 최씨’라는 여인들 말이다.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일까.
흔히 숙종은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한 철부지(!) 임금의 표상처럼 그려지지만,
오히려 숙종은 권모술수 정치에 대단히 능수능란하고 사대부 신하들에서부터 종친, 외척, 주위의 여인들까지 마음먹은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단한 수완을 가진 임금이었다.
숙종조에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일어난 소위 ‘환국’이라는 정치적 지배층의 교체는 좀 심하게 말하면 숙종이 조장한 ‘친위 쿠데타’나 다름없다.
숙종은 오랫동안 야당의 역할을 하던 남인을 등용시켜 서인의 세력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남인들이 정권에 익숙해 질 때 다시 서인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손바닥 뒤집듯이 정국을 돌려 버린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그 어떤 왕도 꿈꿔보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현왕후나 장희빈은 불쌍한 여인들일 수도 있겠다.
여성이 인정받지 못하던 봉건사회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의 핵심 가까이에 있었으나 절대자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다가 버려졌던 여인들 아닌가.

인현왕후와 장희빈 등에 얽힌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충분히 긁어 먹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분명 몇 년 후에 또 나올 것이다.
똑같은 얘기더라도 기본 시청률은 먹어주는 소재이니, 그 생명력이 영원할 것 같다.)

이번 14권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당시 지배층의 무능함과 부패가 아닌가 한다.
이는 울릉도 어부 안용복의 이야기와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부정과 축재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안용복은 아무 벼슬도 없는 사람이었고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를 지킬 의무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나 정부로부터 어떤 포상을 받는 것 없이 직접 일본 땅에 뛰어들어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인물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행동이 자신의 어획량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하지만,
직접 일본까지 가서 대마도주를 비롯한 지배층들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고,
임금과 조정 대신들로 하여금 독도까지 관심을 가지도록 한 그의 공로는 절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당시 당쟁에 빠져 있던 정부가 한 일을 보면 어이가 없다.
벼슬아치를 사칭했다는 죄목으로 안용복을 죄주고 귀양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또 하나. 숙종은 그야말로 정국을 전환시키는 데에는 뛰어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보였지만,
곪아 터진 민생 문제 해결과 지배층의 부패에 대해서는 무능한 편이었다.
왕실 종친들이 소유한 전답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황폐해 지는 것에도,
중앙 사대부들의 뇌물과 지방 사대부들의 공공연한 백성 착취에도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군포의 폐단이 불러온 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족징 등은 문제는 알고 있으면서도 과감한 개혁에는 주저하였다.
백성들은 세금으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궁중의 암투라... 과연 무슨 의미인지?

민생을 외면한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모습,
우리 땅을 지키고자 한 백성에게 가해진 어이없는 죄.
그 때나 지금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우리 땅에서 요원한 일일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한 가지 소개한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모두 번역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책을 보면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가면서 읽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용을 짧게 요약한 만화에서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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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세계일주 레이스
밸리 챈드라새커런, 스티브 헬리 지음, 권성환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스티브와 밸리라는 골 때리는(!!!) 두 친구가 있다.
세계 명문인 하버드대를 나와서 방송작가 일을 하고 있으니 바보들은 아닐테고..
하여튼 서로 아웅다웅 못잡아먹어 안달인 두 친구는 어느날 엽기적인 경주를 제안한다.
다름아닌 세계일주여행!!!!
단, 규칙이 있다.
첫째, 미국 LA에서 한 명은 서쪽으로, 다른 한 명은 동쪽으로 떠나서 1분이라도 빨리 다시 LA로 돌아오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둘째, 이동할 때는 비행기나 헬리콥터, 열기구를 타면 안된다.
경주에서 이긴 쪽은 LA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스카치위스키를 상품으로 얻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에 관심을 보인 출판사를 꼬셔서(!!!) 여행비용을 대게 했다.

2007년 4월 14일.
드디어 스티브는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밸리는 멕시코를 향해 출발하면서 좌충우돌 경주는 시작된다.
스티브는 태평양-중국-몽골-시베리아-모스크바-유럽-대서양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선택했고,
밸리는 브라질-유럽-모스크바-카이로-중동-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이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만나 하루를 함께 지낸다)
이 과정에서 밸리는 약간의 반칙을 쓴다.
바로 두 번째 규칙, 즉, 비행기를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여러번 어긴 것이다!!!!!

하여튼 이 두 친구는 목숨의 위협을 받기까지 하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레이스를 완주한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때론 익살로, 때론 허풍으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광고문구도 있는데,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할까? 특히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낯설은 해외여행을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광고문구에 100% 동의한다. 정말 집 떠나면 개고생이다!!!)
물론 특별히 뚜렷한 목적을 가진 해외여행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업무상 출장으로, 또 어떤 사람은 공부를 위해서 등등.
하지만 이런 특정한 목적을 가진 경우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닐까?

스티브와 밸리는 세계일주 여행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
물론 그들의 나라인 미국의 이웃들이나 유럽 국가들처럼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부족함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스티브와 밸리의 관심은 이런 나라들의 국민들에게는 잠깐 머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나라들, 즉, 중국, 멕시코, 몽골, 브라질, 이집트, 팔레스타인, 캄보디아 등에 사는 사람들에 깊은 애정과 유대를 드러낸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
문명의 이기와는 동떨어진 채로 어렵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
아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걱정해야만 하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외국인인 스티브와 밸리를 경계하다가도 어느 샌가 마음을 여는 사람들.

스티브와 밸리는 이들과 마음으로부터 소통한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처한 환경과 조건은 동일하지 않으며,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상황과 언어도 상이하다.
그런 사람들과 여행자들이 소통하는 것은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고단하지만 일상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가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 군데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지리를 무척 좋아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 이름대기 게임도 무척이나 즐겨 했지만, 실제 여행 자체는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스티브와 밸리가 경험한 이렇게 재미있고 아름다운 여행이라면,
이렇게 스릴 넘치면서도 사람의 인정이 흐르는 여행이라면,
기꺼이 오늘 밤 꿈속의 시간을 투자하여 이들의 여행행적을 그대로 따라갈 용의가 있다.

아참!!! 스티브와 밸리 중 누가 먼저 LA에 도착해서 상품으로 걸린 위스키를 얻었을까?
그건 직접 읽으시면서 확인해 보시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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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지금까지 내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게 해 준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작가가 두 명 있다. 바로 코난 도일 경과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이다.
셜록 홈즈가 펼친 추리가 주는 재미는 그다지 길지 않은 나의 독서 경력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으며,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이 보여준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통찰은 놀라운 간접 경험이었다.
특히 크리스티 여사는 등장인물의 말 한 마디와 배경설명에 아무렇지도 않게 중요한 단서를 뿌려 놓는 것에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그녀의 능력은 같은 작품을 2-3번씩 재독하게 만든다.
추리소설이란 것이 범인과 트릭을 알게 되면 급격히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은 천천히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보물찾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런 ‘보물찾기’에도 한계가 있다.
결국에는 작가가 정해준 하나의 길, 즉, 범인과 트릭이 정해진 길을 다시 따라간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포와로나 미스 마플이 지명하는 사람을 범인으로 단정하며, 트릭을 그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혹시 여기에 허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피에르 바야르의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이런 점에 착안한다.
그의 작업은 크리스티 여사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길로 들어가 새로운 보물을 캐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크리스티 여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스포일러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유명하다.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아마도 누구나 ‘범인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내가 그 범인을 맞춰보겠다’라는 의욕에 차서 독서를 시작할 것이다.
물론 잘 맞출 때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은 의외의 범인과 트릭이 주는 반전에 경탄하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아둔함(?)을 탓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독자들은 무의식 중에 절대 범인일 수 없는 두 명을 빼고 생각한다.
바로 수사를 행하는 탐정과 이를 기록하는 화자이다.

크리스티 여사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이러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버렸다.
그녀의 설정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는 당대에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분분하여 롤랑 바르트나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학자들까지도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피에르 바야르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에서
크리스티 여사가 뒤집어 놓은 고정관념을 다시 한 번 전복시킨다.

피에르 바야르는 질문한다. ‘과연 에르큘 포와로가 지목한 범인이 진짜 범인인가?’
그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다. 진범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셰퍼드 의사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포와로의 ‘망상’의 산물이며,
독자들은 크리스티 여사가 창조한 기가 막힌 반전에 감탄하느라 포와로가 펼친 추리의 허점을 깨닫지 못하고 낚여 버린 것이다.
크리스티 여사가 창조한 추리소설에 대한 또 하나의 추리소설이 탄생한 셈이다.

물론 로저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당연히 근거가 있어야 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먼저 추리소설(특히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들)에서 어떻게 범인을 숨기고 독자들을 속이는가를 분석한다.
그는 여기서 특히 ‘생략’의 기법에 초점을 맞춘다.
작품 상의 화자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만, ‘모든(!)’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전공(정신분석학)을 살려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망상’과, 그 망상이 소설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티 여사의 다른 작품들인 [끝없는 밤], [커튼] 등이 함께 검토되며,
정신분석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역시 하나의 텍스트로서 다루어진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두 군데 있는데,
첫 번째는 역시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진범을 밝혀내는 마지막 장이다.
하지만 누가 진짜 범인인지 여기서 말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그 몫은 각자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피에르 바야르가 독자들에게 도전한 ‘추리소설’이니 말이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부분은 [커튼]과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비교하는 부분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커튼]은 포와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으로서, 여기서 포와로는 악마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던 피해자를 살해한다.
살인마를 죽여 앞으로의 살인을 막았으니 포와로의 동기는 순수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법과 정의의 수호자로 자리매김되어 있던 포와로가 살인죄를 범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포와로의 오랜 친구인 헤이스팅즈 대위 역시 부지불식간에 살인을 범한다.
결국 독자들이 추리소설에서 그토록 신뢰하여 마지않던 두 사람, 즉, 탐정과 화자가 과정이야 어떻든 모두 살인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에 감탄했다고 적었다.
수많은 추리소설 속에서 그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미움, 질투, 욕망 등이 살인이라는 극단의 행동으로 표출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인 살인자이다!!!’
다만, 이성의 힘이 그것을 억누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섬뜩하리만치 냉정한 크리스티 여사의 인간 평가와 세련된 추리소설 기법이 만나서 추리소설사에 빛나는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에 더하여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와 같은 새로운 시도를 만나게 되었으니 더욱 즐겁다.

왕년에 크리스티 여사의 광팬으로 자처하며 그녀의 소위 ‘빨간 책’을 모으고 다녔던 입장에서 피에르 바야르의 시도는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다.
보통 하나의 문학작품에 ‘텍스트’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고착화되고 정형화된 하나의 해석방법, 또는 무비판적인 작품 수용을 지양하고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키는 해석상의 ‘담론’을 도구로 하여
‘열린’ 해석방법을 적용하고 작품을 해체함으로써 그 이면에 숨겨진 진정한 논리와 구조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바라건데, 이와 같은 원작이 주는 고착성과 권위에 도전하여 그것을 ‘텍스트’로서 해체하고,
새롭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시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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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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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가리켜 ‘CCTV의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영국 전역에 설치된 CCTV 수는 약 400만대로서, 아침에 집을 나와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자신도 모르게 수천번 사진이 찍힌다고 할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영국이 이렇게 CCTV 천국이 된 원인 중 하나가 무척이나 마음 아픈 한 사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93년 리버풀의 한 쇼핑센터에서 ‘제임스 버거’라는 두 살 난 남자아이가 실종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아이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들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영국 범죄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영국을 CCTV 천국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조나단 트리겔의 소설 [보이 A]는 바로 이 ‘제임스 버거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년 범죄의 진면목을 조금 다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소설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보이 A]는 가해자 입장에서 범죄와 그 범죄 이후를 그려 냅니다.

열 살 난 여자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14년간 복역한 소년 A.
그는 복역을 마치면서 ‘잭’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어 세상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직장과 집을 얻고, 친구와 애인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간절했던 것들을 손에 넣을수록 그의 불안감과 죄책감은 깊어집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폭로하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감정이었죠.
어느 날 잭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한 여자아이의 생명을 구합니다.
잭은 영웅이 되었지만, 그동안 집요하게 교도소에서 나온 소년 A의 행방을 쫓은 미디어에 의해 감춰왔던 과거가 드러납니다.
범죄로 얼룩진 그의 과거 앞에 친구들과 애인은 차갑게 돌변하였고, 세상은 잭을 밀어내기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선택은....

뭐라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법률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본다면, 죄의 값을 감옥에서 치러낸 사람은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그를 대하는 것에 어떤 차별이 없어야 정상이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내가 사는 동네에 아동살해범이나 아동성폭행범이 형기를 마치고 살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아마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사법당국에 항의할 것이고, 지역주민 거의 대부분은 그를 배척할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그러한 사람을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없습니다.
[보이 A]는 이런 인간의 모순되지만 당연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태도에 문제를 던집니다.

주인공인 잭은 과거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물론 열 살밖에 되지 않았던 여자아이를 죽인 범죄는 분명 작은 것이 아니었고, 그러한 범죄행위는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어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주위의 친구들 및 애인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도 힘들게 얻은 직장, 친구, 애인과 같은 작은 행복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저는 잭이 친구를 위하여 폭력배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싸우는 모습,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음 직전에 처한 한 여자아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잭에게 더 이상 ‘아동살해범’이란 낙인을 찍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심정적 용서를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히 그의 과거 잘못이 밝혀져 다시 사회로부터 매장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믿을 수 없는 기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는 고귀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파렴치범들에 대해 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를 주장하는 논리가 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사회로 복귀하고자 하는 범죄자의 인권까지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또는 가해자의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범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교화敎化를 목표로 하는 교정대책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서 국가와 사회가 운영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이 점에서 범죄자 교정에 대한 국가나 종교의 역할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성인군자의 용서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만약 가족이 그런 범죄의 피해를 입었다면 도저히 그 범인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고, 나아가 법적으로든 개인 차원에서든 복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정주체(국가 및 종교)는 가해자에게 적합한 벌을 내리는 것과 아울러
그가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는지, 그래서 사회로 복귀했을 때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여 이 사회와 이웃들을 위한 삶을 살아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을지 제대로 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절대 요구할 수 없는 냉정하고 효과적인 교정정책, 그리고 ‘천부인권’이란 보편적인 관점에 입각한 인권 개념을 교정정책에 실현해 줄 것을 국가와 종교에 바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가 그토록 끔찍한 살해를 당했다면’ 하는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쳐 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가 바로 그 살해자였다면’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자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은 가해자 소년들을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마로 여겼다(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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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박스 세트 - 전2권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던 소설이었습니다.
이제 ‘신윤복은 사실 여성이 아닐까?’라는 의문은 마치 ‘정조는 독살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처럼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의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공중파 TV를 통해 방송된 드라마의 힘도 한 몫 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원래 미스터리가 있는 책은 결과와 반전을 알게 되면 읽는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지만,
이 소설은 충격적인 반전(이제는 반전이라 말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상식’처럼 알고 있으니..)을 읽기 전에 미리 알고 있음에도 흥미롭습니다.
이 흥미로움의 힘은 역시 우리 옛 그림이 직접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자신을 창조해 낸 화가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으로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름을 접한 것이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교과서가 떠오릅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라는 이름과 흐릿한 컬러 도판의 그림이었죠.
[바람의 화원]은 이렇게 막연하게 ‘조선 후기 풍속화가’라고 뭉뚱그려 암기해야 했던 두 화가를 허구의 소설 형식이지만 생생하게 되살려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워낙 작은 도판으로 실려서 배경과 인물을 구별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도 모르던 교과서 그림의 틀을 뛰어 넘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읽는 방법, 그리고 그 그림에 얽혀 있을 화가의 뒷이야기를 자유롭게 상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구를 본질로 하는 소설에 깐깐하게 ‘역사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바람의 화원]이 불러 일으킨 열풍은 그야말로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작년에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혜원 신윤복의 작품 전시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습니다. 매년 간송미술관을 가보는데, 그렇게 길게 줄을 늘어선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의 화원]이 결과를 알고 봐도 재미있는 소설이 된 것에는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이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작가가 초점을 맞춘 혜원 신윤복의 매력, 즉, 형식적 틀을 벗어나는 ‘파격’의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영조와 정조 시대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새로운 문화의 분위기가 넘쳐 흐르던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쟁을 겪으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은 과도한 관념성과 배타성으로 인해 그 허구성을 역력하게 드러낸 반면,
중인 이하 계층의 의식 성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기 시작하던 생산력과 맞물려 전혀 새로운 시대로의 발전의 맹아를 보였습니다.

[바람의 화원]의 김조년으로 대표되는 중인 출신 거상들,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에 등장하는 새로운 기술과 생산량 증대는 모두 이 시기의 사회적 사실들입니다.
또한 실학파實學派로 대표되는 사상적 흐름은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혁신과 새로운 풍조는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예술, 미술에 부여된 소명이었을 겁니다.
이 시대 문화적 생산과 소비는 향유 주체에서부터 형태와 기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전에 없이 다양했고, 이는 종래의 상투적 화법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내용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우물가에서 건강함을 표출하던 민중을 과감히 소재로 끌어온 단원과,
전통적 화풍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소재를 파격적인 빛깔로 형상화한 혜원은
모두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조금도 모자람 없이 감당한 것입니다.

[바람의 화원]의 독자들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천재의 혁신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그림 대결을 보면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파격과 혁신이 주는 신선함,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끊임없이 그와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파격의 주인공 혜원 신윤복이 누구였는지 역사상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윤복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3원 3재’ 중에 넣어서 말하지만,
사실 국가기관인 도화서 화원이었던 단원을 제외한 혜원의 삶에 대한 기록은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혜원에 대해서는 사료상의 기록은 물론이고, 동시대 인물의 증언조차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그림과 이름만 남은 천재화가.
[바람의 화원]은 그 천재화가의 일생을 ‘신윤복은 남장여자였다’라는 충격적인 추정을 곁들여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물론 [바람의 화원]은 어디까지나 허구인 픽션으로서,
‘신윤복은 여성’이라는 것은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한 시대 예술의 새로운 나아갈 길을 제시한 위대한 선조의 모습과 그 작품 속에 행복한 독서가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뱀꼬리 1
책 속에 하나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정조가 단원과 혜원으로 하여금 어진을 그리게 할 때, 자신을 ‘짐’이라고 호칭합니다.
제가 알기로 ‘짐’은 황제의 호칭이며, 황제 아래 군왕을 칭했던 조선의 임금은 ‘짐’이란 호칭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극이나 실록에는 모두 ‘과인’으로 표기되는 데 작가가 ‘짐’이라고 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뱀꼬리 2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옛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단원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의 그림 [기노세련계도]을 꼭 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몇 년 전 한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었는데, 이미지를 찾아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정말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그림의 소재는 개경(개성) 송악산 아래에서 잔치하는 장면인데,
1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그려놨는지, 넋을 놓고 그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꼭 한 번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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